탈의실에서 시계를 찾아 헤매는 사람을 도와주고, 다리에 쥐가 나서 애먹는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해 주었다. 이런 사람이 지하철 선반에 배낭을 올리다 뚜껑이 열린 생수통 때문에 앉아 있는 커플에게 물 세례를 퍼부었다면..... 이건 한 때 유행하던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연상시킬 정도의 사태였다. 난처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아무리 사과한다고 해도 봉변을 당한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채원보다 어려 보이는 여성이 물을 꽤 많이 맞았는데 휴대용 화장지 한 통을 모두 쓸 정도로 젖었다. 처음에는 어찌할 줄 몰라 배낭에 든 휴지를 꺼내 줄 생각조차 못했다. 사실 배낭에는 흡수력이 좋은 키친타올도 꽤 있었지만 그것도 잊고 있었다. 젊다 못해 앳되어 보이는 여자에게 90도로 허리를 꺽어 사과하고 또 사과했다. 무섭게 노려보던 눈빛이 마침내 누그러졌다. 그제서야 지하철 승객들이 모두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시방석이 이런 것이었나?
새벽에는 내려야 할 정류장에서 내리지 못해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기까지 했는데 요즘 좀 이상해졌다. 이 대회는 아예 참가하지 않거나 참가하더라도 10킬로미터만 달리고 말았어야 했다. 일주일 전 오금 통증이 생겨서 아예 출전을 포기할까 하던 대회였다. 왼쪽 다리에 생전 없던 통증이 생겼으니 난감했다. 강도 높은 훈련을 이수해 나가던 중에 당한 일이었다. 지난 해 대회에서 골인점을 앞두고 부상을 입었던 일을 떠올려 보면 대회 전에 미리 다치는 게 낫기는 했다. 그래도 올해 첫 마라톤 대회 출전인데 일단 대회장에는 나가보자고 한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번 대회 출전을 통해서 생수통 뚜껑을 수시로 확인하는 습관을 얻었다는 게 씁쓸했다.
일주일 동안 거의 훈련을 하지 못해 살이 다시 붙었지만, 오금 통증은 조금 잦아든 것 같아 근육 테이프로 버티어 보기로 했다. 바람이 불고 있어 체감온도는 영하였다. 상의는 긴팔 티셔츠 두 장으로 보온에 신경썼어도 하의는 반바지를 입었다. 1천 1백 명이 넘는 하프 참가자들 사이에서 출발했다. 예상한 바이지만 첫 1킬로미터가 6분 33초나 걸렸다. 2시간 18분대가 예상되는 페이스였다. 이렇게 오래 달리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일단 1킬로미터만 더 가 보고 중도 포기하기로 했다. 2킬로미터 12분 35초였다. 두번째 1킬로미터는 6분으로 달렸다. 생애 첫 2시간이 넘는 하프가 되리라는 사실을 피할 수 없었다. 5킬로미터까지만 갔다가 돌아와 10킬로미터만 달리는 것으로 하고, 그 10킬로미터는 1시간 이내로 달려보자고 마음먹었다. 무념무상. 그저 발을 놀렸다. 10킬로미터 반환점에 왔다. 28분 51초였다. 5분 46초 페이스. 2시간 1분 39초가 예상되는 페이스였다. 페이스가 좋아졌다. 이제는 하프 완주를 포기할 수 없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후반에 좀 나아지리라 믿고 더 나아가기로 했다. 8킬로미터 지점 화장실에 들르지 않을 수 없을테니 그 시간까지 감안해야 했지만.....
8킬로미터 지점 화장실에 들를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냥 통과했다. 골인할 때까지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 화장실을 통과한 덕분에 반환점까지 59분 28초가 걸렸다. 현재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다면 이번에도 2시간 이내 완주였다. 지난 해 마지막 대회의 후반같은 꼴은 없기를 바랬다. 속도가 오른다 싶으면 자제하고 또 자제하면서 후반에 대비했다. 지난 대회까지는 반환하기 전 맞바람에 애먹었는데 이번에는 반환한 후 맞바람이 있었다. 이 맞바람 때문에 속도를 낼 수 없었던 것이 다리에 무리를 주지 않았다. 고동색 패딩을 입은 여성 주자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는데 반환점을 나보다 13초 먼저 돈 사람이라 페이스가 맞았다. 어느 순간부터 패딩 주자가 보이지 않았다. 달리다 되돌아가 저와 같이 가지 않으면 2시간 이내 완주는 힘들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내게는 없었다. 그녀는 후반에 조금 처져서 2시간을 넘겨 골인했다. 2시간 1분 16초.
15킬로미터가 넘었을 때는 폭주기니처럼 내달려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와 사람을 좌절시켰던 햄스트링 통증을 다시 불러올 수는 없었다.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후반에 느릿느릿 달리는 것.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언젠가 폭주기니처럼 달리는 날이 오기를. 제한속도를 설정한 것처럼 발을 내딛었지만 2킬로미터를 남기고는 2시간 페이스메이커에게 30미터까지 가까워졌다. 바로 질주해서 따라잡은 후 편안한 동반주를 이어나갈까 하다가 욕심을 버렸다. 자제하고 또 자제했다. 그렇게 자제하는데도 골인점을 200미터 앞두고는 페메를 추월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하면서.
최종 페이스는 킬로미터당 5분 36초.
최종 기록은 1시간 58분 15초 34
1:58:15.34
하프 완주자 1117명 가운데 459등이었다.
희수형님은 32.195킬로미터를 달렸는데 이 종목 참가자도 1천명이 넘었다. (1,068명 완주)
10킬로미터 완주자는 1,773명이었다.
하프 참가자 명단에 있던 로운리맨님, 10킬로미터 참가자 명단에 있던 아세탈님. 두 분 다 대회장에 오지 않았다. 로운리맨님은 나와 손절한 듯 문자에 답이 없었고, 아세탈님은 1박 2일로 지방에 가 있었다. 용왕산 마라톤 클럽 참가자들이 있어 희수형님과는 식사를 못하게 될 줄 알았는데 희수형님은 클럽과의 식사를 저녁으로 미루었다. 기수님도 함께 엄니식당에 갔다. 일주일 후 희수형님은 오사카마라톤에 간다고 했고, 기수님은 대구국제마라톤에 간다고 했다. 일주일 뒤 나도 풀코스를 달리는데 멀리 갈 수 없으니 한강에서 달린다고 했다. 오늘 달린 구간과 일부 겹치는 코스라 오늘 사전 답사한 셈이기도 하고, 지난 해 참가 신청을 해 놓고도 못 달렸던 대회라 만회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올해 첫 풀코스 도전이라 의미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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