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회장에 도착한 것이 출발 15분 전이었다. 비가 흩뿌리는 날씨 속에서 짐을 맡기는데 물품 보관소가 붐비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화장실에 갈 시간은 없었다. 화장실 앞에 늘어선 줄을 보니 아예 기다릴 엄두도 나지 않았다. 스트레칭은 악착같이 했다. 허리 통증과 무릎 쑤심이 심상치 않기 때문에 스트레칭을 빼먹을 수는 없었다.
새벽 5시 36분. 화계역에서 우이 경전철 첫차를 아슬아슬하게 올라탔다. 이때까지만 해도 운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차후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두 정거장을 이동하더니 차가 멈추어 버렸다. 잠시 기다리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는데 그 잠시가 15분이나 될지는 몰랐다. 그 이후 운행이 잘 되었으면 좋았겠지만 다음 정류장에서는 문이 열리지 않아 직원이 와서 수동으로 개방하기까지 했다. 이래서는 지하철 4호선으로 연계될 때까지 하세월일 듯 싶어 내려서 버스로 갈아탔다. 152번 버스를 타고 서울역까지 이동하려고 했으나 아무리 새벽이라도 너무 자주 정차하는 버스에 몸을 맡길 수는 없었다. 성신여대입구역에서 내려 4호선을 탔다. 이런, 일이 꼬이다 보니 단 1초 차이로 서울역 방향 차를 놓쳤다. 기다림이 또 늘어났다. 서울역까지 가서 공항철도로 환승한 다음 청라국제도시역까지 가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셔틀버스를 기다리는데 그것도 제법 기다려야 했다. 하필이면 바로 옆에 흡연 부스가 있었다. 바람 센 날 담배 냄새를 호되게 맡았다. 정서진 아라타워 일원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대회 참가 차량이 몰리면서 도착 직전에 거북이 운행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을 다 잡아 먹고 대회장에 도착하여 부랴부랴 출발 준비를 해서 출발 장소로 갔더니 아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요즘 여자부 입상권에 드는 달해아름다워님이었다. 우승하세요, 라고 하는 내 말에 손사래를 쳤지만 5등으로 입상했다. 반환해서 돌아올 때만 해도 입상권 밖이었는데 후반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출발하는 지점이 매우 넓어서 답답한 느낌이 없었다. 아라뱃길 옆 주로에 들어서면 주로가 좁아지지만 이미 2킬로미터 쯤 달려 주로 정리가 되기 때문에 7백 명이 넘는 하프 주자들이 서로 부딪히는 일은 없었다. 최근 어떤 대회보다 초반 페이스가 좋았다. 1킬로미터까지는 2시간 페이스메이커가 나보다 앞서 나갔지만 5분 25초 페이스로 달리고 있는 내가 5분 40초로 달려도 되는 사람을 제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2킬로미터 기록이 10분 50초였다. 6월이지만 비가 내린 덕분에 기온이 25도 이하로 떨어져 30도를 넘는 날씨에 달리는 것과 비교하면 너무 수월했다. 올해 가장 더운 날씨에 참가한 대회는 놀랍게도 4월 14일이었다. 운동을 열심히 하니 6월말에도 비가 내려 기온을 떨어뜨려주며 하늘이 돕는구나 싶었다. 오늘 드디어 1시간 49분대 들어가는 거야, 하면서 너무 빨리 감동했다. 하지만 잊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1시간 49분 59초로 하프를 완주하려면 킬로미터당 5분 12초로 계속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재 페이스를 5분 전후로 끌어올려야 5분 12초보다 늦게 달린 구간을 메꿀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아라뱃길을 왼쪽에 두고 시천교, 목상교 아래를 통과했다가 아라뱃길을 오른편에 두고 달려서 돌아오면 이 레이스는 끝나는 것이었다. 시천교 쪽에는 관광지가 마련되어 있어 화장실도 가까이 있었지만 굳이 들르지는 않았다. 비가 제법 내리고 있었다. 지난 번 대회에도 내내 비를 맞으며 달렸는데 어떻게 비가 내리는 날을 찾아서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작렬하는 햇볕이 없는 것은 얼마나 큰 혜택인가? 빗줄기가 좀 굵어진다고 해서 투덜거릴 건 없었다. 꾸준히 발을 놀려 반환하는데 정확히 57분이 걸렸다. 남은 10.55킬로미터를 53분 이내로 달리지 못할 것도 없어 보였다. 돌아올 때 갈 때보다 3분 가량 빨라지는데 조금 더 애를 써서 4분 쯤 빨리 뛰면 1시간 49분대 진입이 가시화되는 것이었다. 달리면서 옆구리살을 자꾸 만지곤 했는데 거의 잡히지 않아서 그동안 열심히 훈련한 티가 나고 있었다. 힘차게 치고 나가며 10킬로미터 남았다는 표지판을 보니 1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호호. 10킬로미터 남기고 1시간 걸리지 않았으니 남은 10킬로미터를 1시간 이내로 달리면 1시간 49분대가 가능하겠구나, 하는 착각을 했다. 이것 보세요. 지금부터 1시간 이내로 달리면 이전 203번의 하프 완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2시간 이내 완주가 가능해지는 것 뿐이예요. 정신 좀 차리시라고요. 50분 정도로, 즉 킬로미터당 5분 페이스로 10번을 달려야 1시간 49분대인 거예요. 아이구. 이런. 아주 착각을 했네. 페이스 체크에 들어갔다. 11.1킬로미터에서 12.1킬로미터까지, 12.1킬로미터에서 13.1킬로미터까지. 모두 5분 15초 페이스였다. 이 페이스는 훈련할 때 기를 쓰고 달려야 나오는 속도이니 아주 못 달리는 것은 아니지만 1시간 50분 페이스메이커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2킬로미터를 달리는 동안 30초를 잃었으니 다음 2킬로미터에서 4분 45초 페이스로 달려내어야 했다. 하지만 페이스는 5분 20초로 나빠졌다. 시천교가 가까워지고, 6킬로미터 남자 27분만에 6킬로미터를 주파하지 않는 한 1시간 49분대는 먼나라 이야기였다. 주중 나를 괴롭혔던 허리 통증은 거의 없었지만 오른쪽 다리 무릎 통증이 생겼고, 왼쪽 발 아킬레스건이 쑤셨다. 속도를 더 빨리 낸다는 것은 무리였다. 5킬로미터를 남기고 1시간 27분 40초가 흘렀다. 그친 줄 알았던 비가 다시 내리고 있었다. 앞으로 5분 페이스로 달려도 1시간 52분 40초였다. 이때부터 의무적인 감상이 시작되었다. 앞만 보고 달리던 내가 아라뱃길을 보면서 참 멋지다는 생각을 여러번 했다. 여유를 부리면서도 혹시 올해 최고 기록은 가능할까 하고 계산도 해 보았는데 안 되는 거였다. 아라뱃길 주로를 빠져나오자 2킬로미터가 남지 않았다. 대로가 시작되고, 1킬로미터가 조금 더 남았을 때 골인 아치가 보였다. 춘천마라톤 마지막 1킬로미터 직선 주로가 떠올랐다. 다행히 춘마 때처럼 골인 아치가 뒤로 달아나는 느낌은 없었다. 달리면 달릴수록 'FINISH'라는 글자가 크고 선명해졌다.
01:52:31.12
마지막 5킬로미터는 25분 이내로 달리긴 했다. 다만 반환 전 보다 반환 후 3분 이상 빨라지던 패턴에 비하여 다소 아쉬운 구석이 있었다. 전반보다 후반에 고작 1분 30초밖에 줄이지 못한 것이다. 무릎에 붙였던 근육 테이프는 반환 전, 종아리에 붙였던 테이프는 반환 후 떨어져 나갔다. 다리 놀림이 힘차서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빗물에 젖어 떨어져 나간 것이었다. 출발할 때는 스피커를 통해 레드벨벳의 신곡 'Cosmic'이 흘러나왔는데 골인할 때는 스테이씨의 'BUBBLE'이 나오고 있었다. 하루 차이로 스테이씨의 신곡 'Cheeky Icy Thang'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BUBBLE'을 부르는 심자윤의 목소리를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응원받는 느낌이 컸다.
올해 6월에는 하프를 네 차례 달렸다. 지난해 6월 기록과 비교하면 5분 정도 기록이 잘 나오고 있으니 살짝 고무되기도 하지만 올 6월에 달린 4번의 기록을 지난해와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1시간 52분 41초로 달린 6월 2일의 새벽강변 국제마라톤대회는 457미터나 짧았고, 1시간 50분 32초로 달린 KTX 광명역 평화 마라톤대회는 300미터가 짧았다. 6월 22일 1시간 51분 13초의 국민행복마라톤과 6월 30일(오늘) 1시간 52분 31초의 인천육상연맹회장배 때는 비가 내려 25도 이하의 날씨였다는 것이다. 단순 비교는 성립되지 않는다. 물론 6월 2일 새벽강변과 9일 광명역은 코스 난이도가 만만치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금 발전했다고 봐도 될 것 같기는 한데......
11년 전 옥천포도마라톤에서 들었던 형님들의 말이 내게도 나타난 건 아니길 빈다. 훈련은 변함없이 꾸준히 하고 있고, 특별히 힘든 것도 없고, 어디 아픈 데도 전혀 없는데 기록은 자꾸만 나빠진단 말이야. 이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인가?
어쨌든 6월 한 달 나는 287킬로미터를 달렸다. 아직 한창 마라톤 대회 참가할 때 보다는 몸이 무겁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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