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데뷔 초기 5킬로미터만 몇 년 동안 나갔던 대회. 완주 후 제공되는 멸치를 받는 데 더 관심이 컸던 대회. 2012년 풀코스 달릴 때 북경마라톤 참가권이 당첨되었던 대회. 그리고 한동안 잊고 있었던 대회. 그 사이 풀코스 종목은 없어졌다. 이 대회에서 하프 종목에 참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참가비 4만원에서 5천원 할인 받는 얼리버드 접수로 무려 석달 전 참가비를 입금했던 대회였다.
요즘 컨디션은 최악이다. 일주일 전에도 하프를 달리며 애를 먹었고, 일주일 동안 피로를 제대로 풀지도 못했다. 옆구리살이 두툼하게 잡힐 정도로 살이 쪘다. 살이 찌고 있었지만 피로감 때문에 운동량을 늘릴 수도 없었다. 대회 전날에는 수면 장애로 애먹었다. 겨우 잠들었지만 단속적이었고, 번잡하기 짝이 없는 꿈만 들입다 꾸면서 도무지 휴식을 취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새벽 5시 38분 기상 알람이 울렸을 때는 일어나기가 너무 힘들어 진저리를 쳤다. 하프 완주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일단 대회장에 가기는 가야 했다. 지하철 4호선은 새벽에도 만석이었다. 5호선은 앉을 자리가 있었지만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여의나루역까지는 구간이 짧아서 눈감고 있을 여유도 없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꽉 들어찬 출발 장소였다. 6천 5백명이 이렇게 많은 인원이었나? 희수형님과 KISOO님과 인사를 나눌 수는 있었지만 사진을 찍을 공간은 나지 않았다. 8시 30분 출발 신호가 울려도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앞에 선 사람이 달려나갈 때도 서 있어야 했고, 앞사람이 움직여 여유 공간이 생겼을 때도 뛰지는 못하고 걷고 있어야 했다. 출발선을 지난 후에도 제대로 뛰지는 못했다. 서로 페이스가 다른 주자들이 뒤섞여 뛰다가도 속도를 떨어뜨리는 일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답답하고 몹시 덜컥거린다는 느낌이 줄곧 이어졌다. 2시간 페이스메이커도 따라갈 수 없었다. 비대면 달리기가 그리울 정도였다. 1킬로미터는 6분 35초가 걸렸다. 2시간 20분대 하프 완주에 만족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이럴 수는 없었다. 미꾸라지처럼 이리저리 빠지며 추월을 시도했다. 2킬로미터는 11분 50초였다. 2시간 7분대였다. 아직 2시간 페메의 풍선은 아득하게 멀었다. 희수형님을 제친 것이 3킬로미터 가기 직전이었다. 3킬로미터는 17분이 걸리지 않았다. 드디어 1시간 59분대. 주자들의 말이 너무 잘 들렸다. 오늘 너무 더운데. 하프 완주하기 힘든 날씨야. 뛰다가 중간에 돌아오는 게 나을 것 같아. 안 그랬다간 죽겠다 죽겠어. 겨울에 달린 게 엊그제인데 어느새 여름에 달리고 있다니까. 한국 날씨 봄 가을이 없어지고 그냥 여름 겨울 여름 겨울.... 이러네.
나는 더운 것보다 뚱뚱해지고 피곤한 게 더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랬다가 비만, 피로에 더위를 보태었으니 힘들다고 내 탓에서 벗어나 보려고 애썼다. 1시간 59분대 페이스였지만 2시간 페메 뒤에 있었다. 4킬로미터 직전에야 2시간 페메 뒤에 바짝 붙었다. 오늘 레이스 운용에 대한 소개를 들을 수 있었다. 친절한 안내에 박수도 쳤다. 5킬로미터 급수대 이용 때문에 앞으로 치고 나가기도 했으나 급수대 혼잡으로 물먹는 시간이 걸려 페메와 다시 달리게 되었다. 무심코 달리다 보면 페메로부터 5~6미터 떨어지곤 했는데 그때마다 스퍼트하여 따라붙었다. 이 와중에 페메의 풍선에 머리를 맞기도 했다. 5킬로미터 쯤 동반주했다.
성산대교, 월드컵 대교를 지나면서 도로 공사 구간을 만나 주로가 좁아질 때는 긴장해야 했다. 유난히 많아진 자전거를 피해야 했으니. 레이스패트롤을 맡으신 분이 소리 높여 주자는 한쪽 라인으로 달리라고 했고, 자전거 부대에게는 속도를 늦추어달라고 부탁했다.
9킬로미터 직전 드디어 페메 앞으로 나아갔다. 이 순간부터 골인할 때까지 2시간 페메와 동반주하는 일은 없었다. 10킬로미터 급수대에서도 여러 주자들과 부딪쳐야 했다. 날씨가 더운데 참가자도 많으니 피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59분 11초에 반환했다. 지난 6개월간의 달리기에서 가장 늦은 반환이었다. 늦었으니 이제부터라도 빨리 달려야겠다는 생각은 아예 할 수 없었다. 앞에서 바람이 불고 있었고, 햇빛을 마주하면서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는데다가 땀은 지난 주보다 두 배 이상 많이 흘렸다. 지난 주에는 완주한 후 땀이 티셔츠의 명치 부근까지 젖었지만 이번에는 반쯤 달리고도 상의 전체가 흠뻑 젖어 있었다. 돌아올 때 보니 너무 많은 주자들이 걷고 있었다. 더위를 견디지 못해 달리기를 멈추어 버린 주자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독려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희수형님은 2시간 페메 뒤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달리고 있었다. 오후 축구 일정이 있으니 1시간 59분대 페이스에 만족하시는 것 같았다. 본의 아니게 앞사람의 어깨를 치기도 했었는데 추월하면서 자전거도 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사과는 했지만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었다. 참가자가 많다 보니 하프에서도 젊고 예쁜 여성이 적지 않았다. 남녀 커플이 아니라 여자 두 명이 보조를 맞춰 달리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띠었다.
14킬로미터 쯤 달렸을 때 자전거 타는 사람이 짜증을 내며 한쪽 주로만 쓰라고 소리쳤다. 주로의 오른쪽만 이용하던 주자들이 왼쪽 주로로 넘어가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도 왼쪽 주로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급수대가 반대편에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급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날씨이니 주자들은 급수대를 찾고 있었다. 반환하기 전에는 오른편에 있던 급수대가 반환한 후에는 왼편에 있으니 달리기 동선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자전거가 거의 몰아쳐 오는 한강변에서는 위험천만이었다.
더위 속에서도, 고단함 속에서도, 체중 하중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페이스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보다 2분 빨리 반환한 JINSIK님과 용왕산 KISOO님을 15킬로미터 넘기 전에 모두 제쳤다. 파이팅을 외쳤지만 JINSIK님은 너무 지쳐서 그런지 반응 조차 없었다. 추월당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달린 거리가 늘어날수록 햄스트링 통증이 도졌지만 그냥 페이스를 이어나갔다. 6킬로미터를 남기고 질주하는 방식은 버렸다. 아직도 6킬로미터나 더 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적지 않았다. 결국엔 이 고통도 끝날거야, 라고 달래며 달리고, 또 달래며 달리고 있었다. 급수대에서는 액티비티드링크 광동온더그린과 생수를 마시고 뿌리고 했는데 드링크제를 얼굴에 뿌리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고 있었으니 힘든 와중에도 정신은 있었다. 6킬로미터 남기고 골인할 때까지는 누구에게도 추월당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4킬로미터 남기고 YRC라고 적힌 유니폼을 입은 건장한 청년이 내 앞으로 치고 나왔다. 내 뒤에서 치고 나왔다면 나보다 빠른 페이스이니 더 빨리 달리지 않는 한 따라잡을 수 없었다. 처음 몇 백 미터는 따라가볼까 했다. 눈에 보이기는 했지만 점점 멀어지고 있어 따라가기를 포기했다. 더울 때 달리는 일이 이렇게 힘들었나 묻고 또 물었다. 코로나 유행 기간 더울 때 마라톤 참가하는 일이 거의 없어 잊고 있었다. 그동안 들렸던 노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노래는 이어지지 않고 그냥 한 단어만 떠올랐다. Unforgiven! 마지막 급수대도 혼잡했다. 넋놓고 달리다가 급수대를 발견하고 뒷사람 동선을 배려하지 않고 뛰어드는 주자들이 적지 않았다.
YRC 주자는 19킬로미터를 넘기 전에 따라잡게 되었다. 서강대교를 지나고도 아직 1킬로미터 이상 남았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거의 다 온 것이었다. 마포대교를 지나고도 아직 500미터나 남았다는 사실에 넋두리가 나왔지만 정말 다 온 것이었다.
1시간 56분 38초
후반에 조금 빨라진 덕분에 아슬아슬한 2시간 이내 완주는 아니었다. 아슬아슬한 2시간 이내 완주는 2시간 페메들이 보여주었다. 1시간 59분 52초. 희수형님은 나와 정확히 3분 차이 나는 1시간 59분 38초였다. 14킬로미터 지점에서 추월 당한 두 분은 2시간을 넘기고 말았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더워지는 만큼 살을 빼는 게 급선무. 운동 횟수와 양을 늘리는 게 우선. 만약 오늘 이 더위에 달리지 않았다면 운동이 시급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몸상태를 수시로 체크해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마라톤 대회 출전은 필요하다. 따라서 6월에도 하프 참가 두 번 정도를 계획한다. 일단 가장 가까운 대회는 6월 11일 전마협 하프. 그때까지 준비 좀 제대로 하자 한다. 준비를 잘 하는 만큼 대회장에 나와 맛보는 고통은 줄어들테니까. aespa 의 신곡 'Spicy' 가사가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좀 더 강도를 높여 우리는 한계를 앞서
새로운 도전 끝에 변화할 시간이야. 지금 이 순간
Don't stop 겁내지마 마침내 번져오는 조이
Next step myself
완주 직후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생수 한 통을 비워내고 그늘에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 겨우 숨을 고른 뒤에야 마스크를 쓰고 탈의실에 들어갔다. 갈아입은 옷이 무색하게 흠뻑 젖어 버렸다. 여름에는 티셔츠 한 장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옷을 입고 냉방기 틀어진 지하철을 탄다는 건 쉽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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