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을 박하다고 말하지 말라. (莫謂陽川薄) -이병연(1671~1751)
8년만에 열린 대회였다. 그동안 대회가 열리지 않았던 것은 코로나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양천구청장이 목동마라톤클럽 소속이라 이 대회는 부활할 가능성이 컸다. 나는 11년만에 출전했다. 당시는 1시간 30분대에 달렸지만 이번에는 2시간 이내로만 달려도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과로가 심했던 일주일이었다. 기침을 하거나 코를 풀면 피가 나왔다. 4,600명이 참가한다고 했다. 대회장인 해마루축구장은 붐빌 것 같아 신도림역에서 화장실도 들르고 스트레칭도 마쳤다. 공원사랑마라톤 출발지를 지났는데 풀코스 출발 직전인 샛별상민님을 만났다. 빨리 준비하고 나와. 샛별상민님 말에 저는 다른 대회 나왔어요, 지나가고 있을 뿐이지요. 참, 지난번에 풀코스 400번 하셨다면서요? 축하드려요. 악수를 했다. 2020년 7월 300번 했던 이 분은 코로나 상황에서도 참 열심히 달려왔다. 1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대회장으로 가면서 회의감이 들었다. 꼭 뛰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는가? 너무 고단하기 짝이 없는데..... 아직 봄인데 여름 같은 느낌이 강한 아침인데.....
희수형님을 만나면서 달릴까 말까 하는 망설임은 완전히 사라졌다. 형님은 주로가 좁아 2시간 이내로만 뛸 생각이라고 했다. 따가운 햇살이 안양천 자전거 도로와 산책로를 데우는데 주자들의 열기까지 더해져 한여름 느낌이 가득했다. 이런 날씨에 대회에 참가해 본 것이 벌써 3년 전이었다. 더울 때 달리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이제 잊혀질만 한데 피부에 햇빛이 닿기가 무섭게 생생하게 기억이 소환되었다. 한달 전 풀코스를 달린 이후 몸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도로 살이 쪄 버렸으니 높은 기온 속에서 얼마나 힘들 것인가?
한데 뒤엉켜 출발하는 느낌이 드는 8시 40분이었다. 주자들이 많아 안 그래도 좁은 주로가 너무 좁아져 버렸다. 비좁은 틈바구니에서 제 속도를 올리기 힘들텐데 체중이 불어 어차피 빨리 달리지 못하니 오히려 다행이라 할까? 4월 두 차례 하프를 모두 1시간 40분대로 달렸던 희수형님이 자기 동네에서는 1시간 50분대 후반으로 달린다고 했으니 나도 그 방식을 따라야겠다는 생각이...... 그런데 나, 오늘 2시간 이내 완주는 가능한 거야?
좁아진 공간에서 마라토너들과 자전거 부대가 공존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자전거 도로를 빼앗긴 자전거족은 분노한다. 양보 좀 해주세요, 라는 길잡이에게 자전거 도로를 자전거 탄 사람이 가겠다는데 무슨 양보냐고 되받아친다. 길잡이의 반응은 '그래, 너 잘났다'였다. 이 말에 자전거족은 '뭐라고, 이 개새끼야.'라고 퍼붓는다. 본격적으로 싸움이 붙을텐데 다들 달리기 바빠서 이 싸움의 마무리는 확인할 길이 없다. 나로서는 고단한 몸이 첫 1킬로미터에서 어느 정도의 페이스를 내어놓을지가 더 궁금할 따름이다. 출발 패드를 찍기 몇 초 전 시계 버튼을 누르지 않고 출발 패드를 밟는 순간 눌렀으니 1킬로미터 페이스는 시계가 보여주는 것과 맞아 떨어질 것이다. 2시간 이내, 1시간 59분대 완주를 바란다면 킬로미터당 5분 40초 페이스, 그것만 기억한다. 하지만 첫 1킬로미터는 5분 50초이다. 10초가 넘어갔다. 이대로 가면 2시간 4분 전후가 내 기록이 될 것이다.
오금교 아래 심장을 두들기는 듯한 북소리가 들렸다. 목동마라톤클럽의 응원부대였다. 이들은 대회가 끝날 때까지 쉬지 않고 주자들의 달리기를 응원할 것이었다. 그들에게 엄지척하고 발을 놀렸다. 페이스가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는 주로 정리가 이루어지자 앞사람을 피해 달리며 받는 스트레스가 조금 줄었다.
덥고 고단하고 몸은 무겁지만 2킬로미터 통과 기록은 11분 07초였다. 1~2킬로미터 구간은 5분 17초로 달렸다. 오늘도 2시간 이내의 완주가 가능하기를. 킬로미터마다 설치된 큼직한 거리 표지판 덕분에 페이스 파악은 수월했다. 3킬로미터 17분, 6킬로미터 34분, 9킬로미터 51분을 넘지 않으면 1시간 50분대는 달성된다. 희수형님은 내게서 200미터 정도 앞서 달리고 있었다. 4킬로미터를 넘기 전에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는 10킬로미터 선두 주자들이 있었다. 안 그래도 비좁은 주로를 더 비좁게 마련해 달려야 했다. 앞 사람을 추월할 때는 주자들의 오른쪽으로 갔다. 5킬로미터 급수대는 아쉬웠다.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10킬로미터 주자들이 반환해 오는 오른편에 설치해 놓았기 때문에 물을 마시려면 주로를 가로질러야 했다. 10킬로미터 주자들과의 충돌을 피하더라도 쉴새없이 밀려오는 자전거의 충돌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결국 급수대는 지나쳤다. 몇 백 미터 나아가 도로변의 수돗물로 갈증을 풀었다.
5킬로미터 지점을 27분대에 지나면서 주로에 조금 여유가 생겼다. 10킬로미터 주자들이 이제 되돌아갔기 때문이었다. 7킬로미터 직전 하안교를 만나 안양천을 건넜다. 내내 한강과 멀어지던 달리기는 이제 한강과 가까워졌다. 건너편에 고척스카이돔이 보이면 반환할 때가 되는 것인데 그 거리는 아득히 멀었다. 걷지 않고 달려 나가다 보면 달린 거리는 늘어날 수밖에 없고, 달릴 거리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마음으로 그저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더 나은 페이스를 기대할 수는 없고 현재 페이스를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 안양천변 둔덕이 주는 그늘은 백여 미터 정도로 짧았지만 잠깐이라도 달콤하기 이를데 없으니 에너지 충전이 되고도 남는다며 최면을 걸었다. 날이 더운 만큼 급수대를 빠뜨리는 일은 없어야 했다. 생수 보다는 게토레이를 마셨다. 시간을 잡아먹더라도 컵을 내려다 보며 연두색 액체만 찾고 있었다. 7.5킬로미터 지점에서는 초코파이, 11킬로미터 지점에서는 바나나를 먹었다. 두번 다 굳이 먹을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먹으면 달리기가 조금 더 수월할까 하는 바램 때문이었다.
하안교를 건너 6킬로미터 남았다는 표지판을 보면 가열차게 달려봤으면 좋겠지만 고단함이 이를 데 없었다. 손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훑어내고 눈에 들어간 땀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며 달려야 했다. 노란 개망초, 빨간 장미..... 봐야 해. 여유를 가져야 해. 힘들었다. I'm a mess, mess....in distress. We don't dress to impress. I don't run, run... for fun. 출발 전 피곤함을 견디지 못해 화장실 계단에서 두 번이나 넘어질 뻔 했던 일을 떠올리면 섬짓했다. 계단에서 굴러 팔이 부러지거나 머리부터 떨어져 목뼈가 부러질 수도 있었다. 신정동, 고척동, 철산동, 하안동, 가산동, 구로동 들러 신도림동을 코 앞에 두고 돌아서 왔다. 마라토너가 기대하는 세 가지 조건에서 모두 벗어난 날이었다. 충분한 사전 훈련, 기상 조건, 당일 컨디션.
1시간 52분 48분 35초
내 기록이었다. 두 달 전 기록이 1시간 52분 45초 73이었으니 기록이 지난 3월 수준으로 퇴보한 셈이었다. 뚱뚱해져도, 피곤해도, 더워도 21.0975킬로미터를 걷지 않고 달릴 수는 있겠으나 몹시 힘들다는 것. 앞으로도 이렇게 달리는 게 좋다면 살은 꾸준히 찌우고, 훈련은 늘 소홀히 하고, 대회 당일 몸도 고단하게 하라고. 날씨는 덥고 습도도 높아지기를 바라마지 않으라고.....
돌아오는 동안 바늘이 가슴을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머리도 쑤셨다. 쓰러져 죽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은 예전에도 몇 차례 있었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있었다.
양천을 박하다고 말하지 말라. (莫謂陽川薄) -이병연(1671~1751)
'도전! 마라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회 사회안전, 국민통합 전국마라톤대회(2023/06/11)-HALF 187 (4) | 2023.06.22 |
---|---|
제28회 바다의 날 마라톤 대회(2023/05/20)-HALF 186 (2) | 2023.05.25 |
제15회 여명808 국제마라톤(2023/04/15)-FULL 231 (8) | 2023.04.18 |
제11회 김포한강마라톤(2023/04/09)-HALF 184 (7) | 2023.04.18 |
KOREA OPEN RACE(2023/03/18)-HALF 183 (6) | 2023.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