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 360밀리 병소주가 아니라 640밀리 패트병 소주. 로운리맨님과 YS님의 반주가 되고 있었다. 숨을 고르지 못한 채 맡긴 짐을 찾아 탈의실 앞에 온 나로서는 어묵과 돼지고기를 먹으며 반주도 나누는 모습이 별천지 세상 사람들 광경처럼 보였다. 물품을 맡기기 전에 내가 건넸던 패트병 소주가 두 분의 즐거운 완주(走)주(酒)가 되고 있다니. 나보다 한 세월 일찍 들어온 분들의 여유란 이런 것이었다. 술을 즐기는 모습이 너무 부러워 술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겠느냐고 청하시는 80대의 어르신도 계셨다. 한 잔이 아쉬워 두 잔을 드신 분은 달린 후 마시는 이 소주가 인삼 녹용 부럽지 않다는 말씀까지 하시며 로운리맨님에게 한 잔을 따라주기까지 했다. 잔 돌리는 것이 금기시되어 있었던 코로나 유행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주최측에서는 어묵까지 제공을 했는데 이 역시 놀라운 변화였다. 코로나 유행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랄까.
대회일이 수요일이었다. 일요일 고구려마라톤대회가 열리는 대회장까지 갔다가 집까지 달려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가 모두 틀어지고, 월요일에야 3킬로미터 인터벌을 세 차례 한 바 있었다. 그 피로감이 남아 있어서 몸이 무거웠다. 그 무거운 몸을 더 가라앉히는 것은 코스가 생소한데 주로까지 좁다는 것이었다. 풀코스와 하프코스 참가자가 같이 출발한 데다가 각기 다른 페이스의 주자들이 좁은 주로에 뒤섞여서 달리기의 리듬이 변칙적이고 우발적으로 튀고 있었다. 마음을 비우고 달려도 수시로 끊기는 호흡은 견디기 힘들었다. 아직 뱃살이 많아서 빨리 달리지도 못하는 주제에 답답했으니 어이없긴 했다. 2시간 10분 페이스메이커와 2시간 20분 페이스메이커가 함께 달리는 광경도 목격했는데 그만큼 주로가 혼잡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뒤에서 치고 나오는 효준님과 대화 나누고, 앞에 달리는 은수님 따라잡으며 대화 나누며 속도감은 아예 잊었다. 2킬로미터까지 11분 30초가 걸렸다. 5분 45초 페이스. 이대로 달리면 2시간은 넘기 마련이었다. 고무적인 사실 하나는 기온이 제법 올라 티셔츠 한 장만 걸쳐도 상관없었고, 챙겨간 장갑은 아예 꺼내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이었다. 로운리맨님은 민소매를 입을 정도였으니 3월은 3월이었다.
느렸던 페이스가 조금 올라온 것은 인천고 기옥형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부터였다. 어느새 2시간 페이스메이커를 따라잡았다. 기옥형님이 앞서 나간 일은 수차례 있어도 10미터 이내의 거리를 유지했다. 5킬로미터까지는 27분 50초가 걸렸지만 5킬로미터부터 10킬로미터까지는 26분50초가 걸렸다. 10킬로미터 표지판을 지나며 춘효형님 옆에 섰다. 10킬로미터 지점. 춘효형님과 만나다. 이런 서사를 날리며. 하지만 10킬로미터 이후는 선방한 것 같지 않았다. 풀코스 4시간 페이스메이커를 12킬로미터 직전 잡았지만 수세적 달리기에 나서고 있었다. 초코파이 조각을 베어물거나 생수보다는 게토레이를 찾아마시고 급수대를 지나쳤다 콜라가 있어 재빨리 되돌아와 마시는 등 후반을 위한 에너지 비축에 나섰다. 12킬로미터를 넘기고도 아직도 9킬로미터나 더 가야 해, 하는 좌절감이 들었지만 풀코스 주자들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다. 이분들은 아직 30킬로미터를 더 달려야 했다. 꾸준히 달리다 보니 15킬로미터를 넘었다. 이쯤 되면 자주 해오던대로 폭발적인 스퍼트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지 못했다. 풀코스 주자인 기옥형님 앞으로 나왔을 뿐이었다. 돌아오는 로운리맨님의 기세도 조금 꺽여 있었다. 1시간 40분 페이스메이커가 바로 뒤에 있었다. 아득하게 멀리 있었던 초반과는 달랐다. 나중에 들은 사실이지만 1시간 40분 페메에 추월당했던 로운리맨님은 다시 승부욕을 발휘하여 1시간 39분대로 골인했다고 했다. 사흘 전 달린 풀코스의 피로감 때문에 애먹었다고도 했다.
뜻하지 않게 나오는 오르막이 레이스 운용을 힘들게 했지만 우려했던 것보다는 잘 넘겼다. 사흘 전에도 풀코스를 달렸던 샛별상민(개명 전 샛별홍진)님은 오늘도 3시간 30분대 페이스를 이끌고 있었다. 늘 하던대로 밝은 표정으로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날씨가 풀리면서 자전거를 탄 사람들도 많이 보였는데 자전거도로와 산책로를 점령한 달리기 주자들 틈바구니에서 속도를 내지 못하여 애를 먹고 있었다. 그들은 내게 달리기 코스를 묻기까지 했다. 지금은 풀코스 주자와 하프코스 주자가 뒤섞여 있지만 하프코스 주자들이 올림픽공원쪽으로 빠지고 나면 나아질 거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올림픽 공원 안으로 들어선 후 1킬로미터가 남았을 때는 방향 전환을 알리는 화살표 간판이 너무 자주 나타났다. 쭉 달려 나가도 쉽지 않은 판국에 수시로 몸동작을 틀어야 하니 달리기 속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지난번 하프보다는 빨리 들어오고 싶어 최대한 스퍼트를 했다. 방향 전환이 잦았지만 4분 37초가 걸렸다. 이 구간은 출발할 때만 해도 5분 45초가 걸렸던 구간이었다. 마지막에 이를 악물고 속도를 올린 것은 아슬아슬하게 직전 기록보다 늦을까봐 그랬던 것인데 사실 착각이었다. 조깅하듯이 달려도 기록은 깨게 되어 있었다.
01:51:49.00
화장실에 다녀오지 않은 덕분에 조금 더 기록을 단축했다. 마지막 스퍼트를 하면서 내가 매우 빨라서 날아들어오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나중에 동영상을 확인하니 아니었다. 거구의 살찐이가 몸을 가누지 못하며 뒤뚱거리며 골인하고 있었다. 쌀가마니를 이고 뛰는 느낌이었다. 체중 관리가 시급해 보였다. 다음 대회까지는 열흘 남짓 남았는데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기간 동안 열심히 훈련해야겠다고 각오했다. 미사리 경정장 네 바퀴를 도는 지루한 코스를 이겨낼 수 있도록. 매번 만나는 일정한 코스에 지겨워지지 말고. 새로운 기분으로 매번 다시 달리는 것이다. 첫바퀴를 돌 때의 마음가짐을 그대로 이어가는 것이다. 그래, 처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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