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코스 참가자 482명, 하프코스 참가자 483명이었다. 내가 풀코스에 참가했다면 풀코스 참가자가 하프코스 참가자를 상회할 수 있었다. 하지만 풀코스 도전하기에는 훈련이 너무 부족했다. 10킬로미터도 무리일 수 있지만 조금 더 모험심을 발휘하여 하프코스를 신청했다. 목표는 2시간 이내 완주지만 장담할 수 없었다. 생애 처음으로 2시간이 넘어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요즘 기를 쓰고 달려보아도 킬로미터당 5분 30초인데, 1시간 59분대로 골인하려면 5분 40초 페이스로 21번을 반복해야 했다. 그게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1초 차이로 방화행 열차를 놓친 결과 화장실 이용이 쉽지 않았다. 대회장에서 5백 미터 쯤 떨어진 화장실 앞에도 줄이 서 있었다. 대회 참가자가 많다는 뜻이었다. 아직 하프 종목 출발까지는 1시간 가까이 남아 있었지만 여유가 없었다.
여의도이벤트광장 주변을 맴돌다 풀코스 주자가 출발하는 8시 30분에 대회장에 들어섰다. 출발선 앞쪽에 있다가 슬금슬금 물러나 2시간 페이스메이커 뒤로 왔다. 영상과 영하가 맞물린 기온이라 복장 선택이 애매했지만 반바지를 입었다. 모자는 캡으로 하려다가 귀가 시려워 늘 쓰던 바이저 버프로 했다. 15년이 넘도록 지켜온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버프였는데 휘문19님이 내 이름을 모를 때에도 바이저 버프 때문에 내 얼굴을 기억할 수 있었다고 했다. 白현태님이 말을 걸어왔다. 나는 모르는데 그 분은 나를 알고 있었다. 공원사랑마라톤 대회에서 자주 뛰지 않으셨어요? 그때 정말 자주 보았는데. 요즘은 어떠세요? 풀코스 몇 번이나 뛰셨어요? 코로나 아니었으면 벌써 3백번 넘으셨겠는데. 저도 그동안 훈련이 부족해서 하프 뛰는데 님처럼 2시간 안쪽은 안될 거예요.
말을 걸어온 달림이 또 한 분이 있었다. 해외 참가를 자주 하는 효준님. 다음 주에도 일본 쿄토에서 풀코스를 뛴다고 했다. 1킬로미터를 6분 가까이 걸려 달리고 정말 오늘은 2시간 이내가 완주가 힘들겠구나 할 때 뒤에서 치고 나오며 말을 걸어왔다. 대화하며 달리다 자연스럽게 내가 뒤로 처졌다. 두 달 전 하프와 비교하게 되는데 그 때보다는 컨디션이 좋았다. 집안 일 때문에 새벽 1시가 넘도록 잘 수 없었고, 잠도 요란한 꿈으로 채워진 것에 비하면 의외였다. 차츰 페이스가 좋아져 2킬로미터 이후에는 2시간 페이스메이커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2시간 이내로 달리는 레이스패트롤 두 분이 기준이 되어 주었다. 반환점까지는 꾸준히 따라갈 요량으로 발을 놀렸다. 5킬로미터는 28분이 걸리지 않아 2시간 이내 완주 요건을 충족했다. 80킬로그램이 넘는 몸으로 뒤뚱거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5분 40초 페이스를 넘지 않으며 맞은편에서 오는 풀코스 참가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상기님, 성하형, 춘효형님, 은수님, 기옥형님..... 기옥형님은 내 사진까지 찍어주셨다. 로운리맨님은 찾지 못했다. 어디쯤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하프 반환 58분 12초.
두 달 전보다 1분 가까이 빨랐다. 그때와 비슷한 점이 있다면 화장실에는 꼭 들러야 겠다는 마음이었다. 뚝섬 코스보다는 화장실이 많은 코스라 다행이긴 한데 16킬로미터 이상 달린 이후에야 계단이 없는 화장실에 갈 수 있었다. 조금 참아 보려다가 12킬로미터 정도 달렸을 때 계단 이용이 불가피한 화장실에 갔다. 시간은 제법 잡아먹었지만 근심은 제대로 풀었다. 소변기가 한 개라 내 뒤에 온 분은 기다려야 했다. 일을 보고 나가는 내게 기다렸던 분은 뭔 돈이 나온다고 이렇게 뛰는지 모르겠어요, 라고 했다. 맞장구를 쳐드리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내 기준이 되어주었던 광화문클럽의 레이스패트롤 두 분은 멀리 가 버린 상태였다. 그래도 마음은 홀가분했다. 두 달 전 화장실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과는 사정이 달라졌다. 마음이 편해지니 속도도 오르고 있었다. 화장실 다녀온 후 2킬로미터 쯤 달리고 나니 레이스패트롤과의 거리는 10미터 이내로 줄어들었다. 화장실 다녀오느라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풀코스 주자인 은수님 뒤에 바짝 따라붙기도 했는데 안양천 방향으로 가는 지점에서 갈리기 때문에 말을 걸지는 않았다.
안양천 합수부를 지나 15.1킬로미터 표지판을 본 이후에는 페이스가 한결 좋아졌다. 5분 30초대로 달리는 주자들 사이에서 5분 5초 이내의 페이스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앞의 주자들을 굳이 제치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제치고 있었다. 6킬로미터를 남기고는 누구에게도 추월당하지 않았다. 5킬로미터를 남기고는 평균 페이스가 5분 3초였다. 3킬로미터를 남기고는 레이스패트롤 앞으로 나아갔고, 2킬로미터 남기고는 초반에 나를 추월했던 SENIOR MODEL도 추월하게 되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노래 소리. 영어를 번역해서 들었다. 그냥 지금 당장 전화 걸어줘. 넌 내 거라고 말해줘. 네가 좋아하는 걸 다 아니까. 우리는 정말 잘 맞는 사이잖아. 내 지난 날들은 눈 뜨면 잊는 꿈. Hype boy 너만 원해. 지난 해 댄스 챌린지 열풍을 일으키고 요즘 역주행하고 있는 뉴진스의 '하입보이'였다. 젊은 주자 한 명이 스마트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달리고 있었다. 희수형님 따라뛰면서 씨스타와 티아라 노래를 들었던 10여년 전의 추억이 소환되었다. '와! 뉴진스 노래다! 덕분에 힘나요'라는 말은 못하고 지나친 게 아쉬웠다. 노래는 더 듣고 싶고 댄스 챌린지를 하며 달리고 싶기도 했지만 어느새 1킬로미터도 남지 않아 5분 안쪽 페이스로 치고 나가고 있었다. 점점 늘어나는 거리의 부담감과 점점 빨라지는 속도의 부담감은 기억으로 조율했다. 일주일 전 25킬로미터를 달린 적이 있으니 그보다는 짧은 거리 아니겠어. 미진하긴 했지만 400미터 인터벌 시늉을 낸 주중 훈련도 하지 않았겠어.
화장실에 들르고도 반환 전 보다 반환 후가 3분 가량 빨라져 두 달 전 기록보다는 38초 앞섰다.
1:53:45.65
두 시간 이내의 완주 목표를 달성했지만 1시간 40분대로 들어가려면 선행해야 할 과제가 생겼다. 체중 감량! 80킬로그램이 넘는 체중으로는 1시간 40분대로 갈 수 없으니. 탈의실에서는 웃도리를 갈아입을 때 몹시 부끄러웠다. 나처럼 옆구리가 부풀어오른 주자를 2시간 이내 완주자들 틈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로운리맨님을 기다리는 일이 남았다. 로운리맨님은 자기를 기다리면서 운동을 좀더 하고 있으라고 했지만 하프에 온 힘을 다 쓰고 나니 그럴 여력이 없었다. 기온은 제법 올랐지만 가만히 있으려니 추웠다. 배도 고팠다. 여의나루역 안쪽으로 들어가 유튜브 동영상을 보며 기다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거긴 더 추웠다. 바람이 들이치는데 지상의 바람이 지하로 밀려내려오는 느낌이었다. 잠시 갈등했다. 힘들어서 먼저 갈게요, 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떠날까 했다. 약속을 해 놓고 중간에 태도를 바꾸어서는 안되었다. 지상으로 올라왔다. 코로나 유행 이후 전혀 보지 못했던 단골 마라톤 판매상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분이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대회장에 오니 햇볕을 받을 수 있어 오히려 따뜻했다. 가방에 넣어두었던 마라톤 완주 간식을 먹어 허기는 때웠다. 스마트폰으로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을 들으면서 완주기를 메모해 보는데 잉크가 얼어 써지지 않았다. 연필이라도 가져올 걸. 시간은 흘렀다. 풀코스 주자들도 속속 들어왔다. 3시간 30분 페이스메이커 한 분이 3시간 27분대로 들어오고 난 뒤 낯익은 분이 나타났다. 무릎이 아프면서도 3시간 29분대 골인을 앞둔 로운리맨님이었다. 역시 그 실력 어디 안 가는군.
로운리맨님과는 오랜만에 엄니식당에 갔다. 코로나 이후 처음 간 것이니 4년만에 방문한 것인데 사장님은 우리를 기억했다. (기록을 찾아보니 2019년 6월 2일 마라톤 풀코스 완주를 마치고 로운리맨님과 들른 이후 처음이었다. 그렇게 오래 되었는 줄 몰랐다.) 제육볶음과 부추비빔밥. 추억이 소환되었다. 코로나 유행 전으로 이제 거의 돌아왔다고 해도 될까? 달리는 동안 KF94 마스크는 끌어내려 턱에 걸고 있었다. 사실 내내 쓰고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코로나 감염 위험보다 미세 먼지가 좋지 않았던 날이었으니까. 그걸 깜빡하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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