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감을 맛보는 것도 이제 아주 일상이 되었네. 일주일도 안 되어 갑자기 잘 달리게 될리는 없고, 과한 운동으로 수년 전 다쳐서 애먹었던 햄스트링에 또다시 통증이 생겼으니 좌절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회일 6일 전 참가 신청을 한다. 신청할 때만 해도 햄스트링 통증은 없었는데. 혹시 1시간 40분대로 뛸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 쭉쭉. 일요일 동아마라톤 응원을 가기로 했으니 장거리 훈련을 토요일 미리 해야겠다는 계획은 세우고 있었지만 굳이 돈들여 대회 출전까지. 하프 정도는 배낭 메고 개인 훈련을 해도 되지 않는가? 군자교까지 뛰어갔다 오거나, 중랑천 청계천 거쳐 동대문 도서관까지 달리면 하프 거리는 채우고도 남는데. 그런데 그것도 아니지. 2만 5천원을 지불하고 대회에 출전한다면 마음가짐이 달라져 제대로 된 운동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코스는 지난해 12월 11일 달렸던 뚝섬-구리 코스. 그 때보다는 조금이라도 빨라지지 않았을까 하는데 더 나아질 것도 없을 수 있겠다는 것이 햄스트링 이상 증세와 운동의 피로감 때문이었다. 3월 12일 우천 속에서 하프를 달리고 나서는 문제가 없었다. 다음날 가볍게 뛸 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화요일(3월 14일) 200미터 빨리 달리기 18회를 하면서 다리에 무리가 간 것 같았다. 햄스트링 부상으로 1년이나 고생해 봤기에 급히 운동량을 줄였다. 아픈 부위에 물리 치료 조사기를 작동하고 테이핑을 하는 등 애를 썼다. 달릴 때마다 통증이 느껴지고, 한참 달린 후에야 무감각해지는, 그렇다고 빨라지는 것은 아닌 패턴으로까지 진행되지는 않았다. 다쳐 본 경험 덕분에 몸 안에서 방어기재가 작동했을 수도 있다.
다음날이 동아마라톤이라 참가자가 거의 없을 줄 알았는데 그런대로 붐비고 있었다. 같은 날 여의도이벤트광장에서 열리기로 했던 대회는 취소되기도 했다. 출발하자마자 마스크는 벗어 팔에 끼웠다. 주자들 틈바구니에서도 어느 정도 속도를 올렸다. 첫 1킬로미터가 5분 15초가 나오니 고무적이었다. 그래봤자 이 페이스로는 1시간 50분 45초라는 사실을 몰랐다. 1시간 49분 59초로 달리려면 꾸준히 5분 12초를 유지해야 했다. 계산이 잘 되지 않는 초반에는 1시간 50분 페이스메이커의 노랑풍선이 바로 앞에 있어서 따라잡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착각했다. 그 착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2킬로미터를 지나면서 5분 30초 페이스로 내려앉았고, 그 페이스가 고착되었다. 1시간 50분 페메는 아득히 멀어졌다. 4킬로미터 지점에서 르세라핌 김채원 단발머리를 한 여성 주자를 따라잡은 후부터는 그냥 '가시밭길로 라이딩'이었다. 남성 주자들에게는 참으로 꾸준히 추월당했다. 신기한 것은 나보다 먼저 골인한 여성 주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10킬로미터는 54분 40초가 걸렸으니 2시간 이내의 완주에서 2분을 벌었을 뿐이었다. 이대로 달리면 1시간 55분 19초로 완주한다. 1시간 54분대로 달렸던 세 달 전의 동일 코스보다 느려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더 속도를 올릴 수도 없는 것이 햄스트링 통증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배쪽으로 뭉쳐진 살덩어리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언제까지 복대(?)를 차고 달려야 하나?
반환은 57분 55초였다. 나보다 늦게 출발한 2시간 페이스메이커가 바짝 붙어 있었다. 12킬로미터 직전 굳이 보지 않아도 되는 소변을 보기 위하여 주로를 이탈했다. 지난번 같은 코스에서 후반에 화장실을 찾지 못하여 애먹었던 기억 때문이었다. 소변을 보고 오니 2시간 페이스메이커 그룹이 내 앞에 있었다. 예수님을 제자들이 따르듯이 12명이 페메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나도 따라가게 되었다. 소변을 보고 오면 나도 모르게 빨라지곤 했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근근히 페메를 따라가는 정도였다. 반환하기 전에는 눈이 부셨는데 이제는 태양을 등지고 있다는 것만 좋았다. 10년 넘게 신었던 하프 전용 마라톤화 대신 10킬로미터 뛸 때만 신었던 타사질 4를 신고 있어서일까? 10킬로미터 이후 자꾸 발이 끌렸다. 바닥을 예리하게 쓰는 소리 때문에 주변 주자들을 놀래키기도 했다. 10킬로미터 이상 적응 기간이 아무래도 필요한 러닝화였다. (완주 후 발톱 주위에 통증이 생겨 몇 일 고생하게 된다.)
이런저런 이유로 5분 30초 페이스에 길들여진 것처럼 나아가다가 14킬로미터 직전 급수대에서 물을 마시고 나서부터는 돌변했다. 2시간 페메 그룹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초반에 까먹었던 시간을 되찾고 있었다. 화장실에 갈 일이 없으니 오롯이 달리기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것이 석 달 전 레이스와 크게 달라진 점이었다. 골인할 때까지 누구에게도 추월당하지 않았다. 내 뒤를 바짝 따라오는 숨소리가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스퍼트해서 떨구었다. 오르막이 나오면 '내가 좋아하는 구간'이라고 되뇌이며 전력질주했다. 아니, 오르막이니 전력질주했다고 느꼈을 수도. 5분 이내의 페이스로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전반보다 15초 정도 빠른 페이스는 보이고 있었다. 자꾸 바닥을 내려보려는 못된 버릇이 나와 일부러 고개를 들어 한강 건너편의 잠실롯데타워와 잠실종합운동장을 힐끔거리면서 달렸다. 15.1킬로미터 통과 기록이 1시간 22분대였다. 남은 6킬로미터를 30분, 페이스를 5분으로 맞출 자신이 없었다. 애를 써 보지만 5분 10초 언저리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마지막 1킬로미터를 남기고 1시간 48분 25초였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속도를 올렸다. 씽씽 날아가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악착같다는 느낌만 들었다. 햄스트링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많이 달려 마비된 탓인지, 초반에 조심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마지막 1킬로미터를 5분 전후로 끊는 것이 목표였는데 의외로 4분 20초까지 끌어올렸다. 사회보는 분의 응원에 답하면서 골인한 후 2초 이상 지나 시계 스톱 버튼을 눌렀다. 1시간 52분 49초 43. 출발할 때 2초 전 미리 누르고 골인한 후 2, 3초 지나 나중에 눌러 기록을 측정하는 스타일이니 넷타임 기록은 1시간 52분 45초 정도가 될 것 같았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면서 보니 다들 휴대폰을 확인하고 있었다. 기록 문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나한테는 오지 않았다. time.spct.kr 사이트를 열고 내 기록을 보니 5킬로미터와 반환점 통과 기록만 있었다. 골인점 통과 기록이 1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을 때도 있는가?
옷을 갈아입은 후 골인 지점으로 갔다. 그때 갑자기 내 신발에 그대로 달려 있던 칩으로 골인 기록이 인식되면서 기록 계시원의 노트북 컴퓨터 모니터에 2시간 12분이라고 떴다. 골인할 때 인식되지 않았던 칩이 이제서야 인식이 된 것이었다. 좋은 기록은 아니지만 20분이나 늦은 기록으로. 기록 계시원은 골인하는 사람들의 배번을 일일이 시간대별로 적었던 알바생의 기록지를 확인했다. 1시간 52분대 기록에 내 번호 22701이 보이지 않았다. (차분하게 천천히 찾아보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하프 주자들이 계속 골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 기록만 가지고 시간을 잡아먹을 수 없었다.) 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유령이라도 된 것 같았다. (이틀 후 기록 칩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내가 골인하는 동영상이 있었다. 유령은 아니었던 것으로.) 계시원은 융통성을 발휘하여 내게 기록을 묻고 조정해 주었다. 이내 문자가 왔다. 골인한 지 25분이나 지난 뒤였다.
코리아 오픈 레이스 완주를 축하드립니다.
강훈식님 기록은 01:52:45.73입니다.
아주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오차가 나 봐야 1초 이내일 것이었다. 내 기록이 1시간 40분대와 50분대에 걸쳐 있는 것도 아니고, 입상권도 전혀 아니라서 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어쨌든 이번에는 화장실 이용 시간을 쓰고도 1시간 52분대이니 3개월 전보다는 기록이 좋아졌다고 볼 수도 있다. 운동을 열심히 해도 기록은 아주 천천히 좋아진다. 아직까지는 꾸준히 좌절감을 맛보아야 한다. 좌절감이 성취감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그때까지 로운리맨님이 해 준 말을 되새길 것이다. 아니, 그 이후에도. 달린 거리는 배신하지 않는다. 走った距離は裏切ら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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