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마라톤 대회 참가 여부를 두고 너는 꾸준히 망설였다. 가사도우미이자 간병인 신세로 묶여 있는 삶 속에서 허덕이다 설날이 되어서야 너는 자유로워졌다. 형제들이 집을 찾아온 덕분에 비로소 대문을 나설 수 있게 되었다. 모처럼 만끽하는 자유 속에서 너의 선택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달리기 대회에 참가하거나 카페에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내거나.
몇일 동안 허리가 아팠지만 너는 영등포구 도림천 근처의 마라톤 힐링 카페에 와서 참가자 명단에 네 이름을 올릴 것인지 주저했다. 너무 적은 참가자 앞에서, 칩도 달려 있지 않은 배번 앞에서, 당일 발급되지 않는 기록증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머뭇거렸다. 같은 구간을 네 차례나 왕복하는 코스의 지겨움 때문에도 대회 참가를 꺼리고 있었다. 이런 방해 요소에도 불구하고 네가 과감하게 풀코스 참가에 나선다면 다른 이와는 사뭇 다른 설날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데. 물론 달리지 않아도 무어라고 할 사람은 없겠지만.
풀코스를 달린 지 20일. 20일만에 풀코스를 달리는 일이 너무 오랜만이라 느끼는 것은 그동안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30킬로미터 이후의 12킬로미터를 어떻게 감당할지 난감하기만 할 것이다. 30킬로미터 이후에도 잘 달리는 몸을 만들려면 훈련을 꾸준히 해야 가능한 것인데 네가 처한 상황에서는 훈련을 하기가 어려웠다. 설날 연휴 기간 네 번의 대회가 열리니 설날 당일은 도림천 주로를 따라 하프 정도의 거리를 연습주로 하고 돌아갔다가 이틀 뒤 어떻게든 시간을 짜내어 대회 참가를 하는 게 좋겠다 싶었다. 연습주나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무렵 마라톤 힐링카페의 출입문이 힘차게 열렸다. 노원마라톤클럽의 희규형님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 형님을 보면서 너는 대회 참가쪽으로 급선회하게 된다. 9001 병준형님, 9002 희규형님에 이어 9003번 주자가 되는 것이다. 곧이어 4연풀에 도전하는 특전사님과 고구려마라톤클럽의 주자도 참가한다. 설날 대회 참가자는 단 5명이다.
모놀로그
웃도리는 긴팔티셔츠 두 장에 목도리 버프를 했다. 장갑도 끼었다. 하지만 아랫도리는 여름처럼 반바지를 입었다. 고구려마라톤클럽 주자는 민소매까지 착용했다. 다른 분들은 위아래로 겨울 중무장을 했다.
12시 정각.
5명이 출발했다. 우리가 출발할 때 잘 달릴 것처럼 보이는 사람 한 명이 출발점 근처에서 맴돌고 있다가 함께 달렸다. 이미 3시간 20분대 속도로 달리기 시작한 희규형님과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귀경 방문한 달림이로 대회 참가는 어렵고 해서 운동을 나온 사람이었다. 나는 이분들 뒤에서, 이틀 연속 풀코스를 달리는 특전사님은 내 뒤에서 달리고 있었다. 첫 1킬로미터는 5분 10초가 살짝 넘었다. 지난 1월 5일보다는 늦었다. 다음 구간에서는 20초 이상 빨라졌다. 2킬로미터까지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4킬로미터를 19분 40초로 지나게 되면서 어느새 3시간 20분대로 달리고 있었다. 희규형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하지만 빠르다는 느낌을 갖기가 무섭게 페이스는 뚝 떨어졌다. 우리에게 가장 적당한 페이스가 어떤 것인지 파악하는 동안 아침부터 달리기 시작하여 막바지 레이스에 돌입한 근규형님과 성하형을 만날 수 있었다. 하이파이브를 했다. 5.27킬로미터 지점 급수대에서 반환하고 돌아가는 동안 희규형님과 잡담 러닝을 할 수 있었다. 형님은 사흘 전에도 대회에 참가하여 3시간 36분대로 달린 적이 있어서 내가 따라간다는 장담을 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옆에 있었다. 형님은 2005년 10월 청계천 복원기념 마라톤대회에서 생애 첫 풀코스를 달렸다고 했다. 나는 그 때 10킬로미터 종목에 참가했고, 풀코스 데뷔까지는 5개월이 남아 있었다. 지난 해 부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낸 것은 나와 같았다. 형님의 풀코스 기록이 최악이었던 해가 2019년이었다고 했다. 이야기 꽃을 피우며 여유있는 달리기를 이어나가고 있을 무렵 9킬로미터 근처에서 초록색 자켓이 바람 소리를 내며 앞으로 밀고 나왔다. 특전사님이었다. 이틀 연속 풀코스 뛰는 분 맞아요? 안 힘들어요? 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특전사님은 쭉 치고 나갔다. 우리는 잡담을 하면서 3시간 30분대 중반의 주자가 되었지만 특전사님은 3시간 20분대 주자로 나서고 있었다.
10.55킬로미터를 달렸다. 이제 1회전을 마친 것인데 이 지겨운 왕복달리기를 앞으로 세 차례나 어떻게 감당할지 막막하였다. 그래도 4회전인 만큼 노천구간이 늘어나서 담배 냄새의 공격을 받는 일은 어느 정도 줄었다. 담배 냄새를 피하기 보다는 산책나온 사람들을 피해서 달리는 데 좀더 노련해져야 했다. 부딪치지 않도록 미리 주로를 확보해야 했다. 2회전에 나선 후에는 희규형님보다 앞에서 달리게 되었다. 곧 동반주를 하게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킬로미터마다 5분으로 딱딱 끊어서 달리고 있었다. 페이스를 계속 이어나갈 수는 없었다. 나의 2등 자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2회전이 끝나갈 무렵 화장실에 갔다 오면서 희규형님 뒤에서 뛰게 되었다. 2회전까지는 1시간 48분대였다. 20일 전보다는 좋은 페이스였다. 3시간 40분대 후반 페이스가 3시간 30분대 후반 페이스로 좋아져 있었다. 특전사님은 우리보다 1킬로미터 이상 앞서기까지 했다. 특전사 출신의 체력은 예순이 넘어도 떨어지지 않는 듯이 보였다. 그렇게 내내 달릴 줄 알았던 특전사님의 동작이 느려졌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 24킬로미터 이후. 25킬로미터를 지나면서 희규형님에게 따라잡혔고, 26.4킬로미터 반환점에서는 내게도 따라잡혔다.
27킬로미터 정도를 달리고 나서 15킬로미터 정도가 남으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들기 마련인데 이번 경우는 좀 달랐다. 30킬로미터 이후가 겁났다. 30킬로미터 이후에도 잘 달리려면 3회전 때 무리하지 말아야 했다. 희규형님을 50여 미터 앞에 두고 따라갔다. 맑았다가 구름이 몰려와 흐려졌지만 겨울 특유의 음산한 느낌은 들지 않는 것이 기온이 높은 탓이었다.
달리면서 오롯이 달리기에만 집중할 수는 없었다. 산재된 집안 일과 가족들의 건강 문제가 불쑥불쑥 튀어나와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다. 얼마나 더 달려야 달리기에만 전념할 수 있을까? 잠들 때 지독하게 지쳐야 잘 수 있고, 생명 유지를 할 정도의 수면만 취하면 다시 잘 수가 없는 삶, 병원과 경찰서를 쉴새없이 드나들어도 나아지지 않는 삶. 요즘 내 몸은 내 몸이 아니었다. 도전할 수도 없고, 관리할 수도 없었다. 햄스트링 통증은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는데 달리는 거리가 늘어날수록 기분나쁜 신호까지 보내고 있었다.
2017년 7월 9일이 떠올랐다. 한여름에 3시간 34분대로 달렸으면 매우 잘 달린 것인데 그때 희규형님을 끝내 따라잡지 못하고 몇 십 초 늦게 2등으로 골인했었다. 그 순간을 오늘도 그대로 재현할 것 같았다. 4회전을 시작한 형님은 나보다 100미터, 나아가 200미터까지 거리를 벌렸다. 어차피 1등은 희규형님으로 정해졌다. 따라갈 수 없으면 마는 것이었다. 다만 지난 크리스마스 이후 한 달만에 다시 3시간 30분대로 골인했으면 하는 목표는 이루고 싶었다. 4회전이라 거리 계산이 복잡했다. 그냥 5킬로미터를 남기고 3시간 15분을 넘기지만 말자고, 아니 넘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졌다. 3시간 15분? 그럼 남은 5킬로미터를 25분으로 달리겠다고? 킬로미터당 5분 페이스로 끊는다고? 훈련도 부족하니 조정했다. 3시간 13분을 넘기지 않기로 했다. 안 되면 마는 것이고. 3시간 40분이 넘더라도 받아들이기로 하고 몸에 무리를 주지는 말자고 마음먹었다.
나보다 2분 쯤 앞선 희규형님을 보니 넉넉하게 서브 340이 가능한 페이스가 부러웠다. 오늘 3시간 30분대 주자는 희규형님이 유일하겠다 싶었다. 급수대에서 콜라를 마시고 37.2킬로미터 지점으로 돌아오니 3시간 13분이 넘어 있었다. 3시간 13분 05초. 아하. 남은 5킬로미터를 26분 50초 정도로 달리면 3시간 39분대로 골인할 수 있었다. 킬로미터마다 구간 기록을 체크했다. 두 번 연속 5분 15초 전후였다. 이 정도로만 달려도 3시간 39분대 주자가 될 수는 있었다. 세계기록 보유자 킵초게처럼 미드풋 착지에 신경썼다. 팔놀림도 자연스럽게 했다. 머리 속에는 tvn에서 4부작으로 방영한 <런>이 돌아다녔다. 마지막 회가 설날 연휴 전날 밤 방영되었기에 기억이 생생했다. 단 한번도 풀코스, 아니 마라톤 대회 출전 경험 조차 없는 네 명의 남자 배우들이 짧은 기간의 훈련을 통하여 피렌체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하는 여정을 담은 프로그램. 주자들 뒤로 펼쳐치는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풍광은 덤이다. 어느덧 40대 중반이 된 배우 지성은 생애 첫 풀코스를 4시간 9분 16초에 완주한다. 20대 막내 이태선은 4시간 30분대로 골인한다. 부상 때문에 완주를 장담할 수 없었던 황희는 외다리 주자에게 감명받아 걷다 뛰다를 반복하며 통증을 이겨낸 끝에 결승점에 도달한다. 청룡영화제 참가 일정으로 이탈리아와 한국을 오가며 제대로 훈련을 하지 못한 강기영은 30킬로미터까지만 달려낸다. 마라톤 초보라고 할 사람들이 새로운 도전을 하는 모습은 신선했다. 마라톤 데뷔 초기에 가졌던 두려움과 설레임의 순간으로 돌아가 달리기에 대하여 돌아볼 기회를 가졌다. 시청률이 1%도 되지 않는 프로그램이었지만 매주 목요일밤 11시 본방사수에 열을 올렸다. 머릿 속을 맴돌던 잡념이 모조리 사라진 것은 39킬로미터를 넘어서였다. 200미터 이상 차이났던 희규형님이 100미터 이내에 있었다. 2킬로미터가 남았을 때 내 기록은 3시간 28분 20초. 앞으로 5분 50초 페이스로 달려도, 풀코스 4시간을 살짝 넘겨 달릴 때의 속도로만 달려도 339가 가능해졌다. 나도 모르게 스퍼트를 시작했다. 느리게 달려도 되는데 도리어 빨리 달렸다. 5분 이내의 페이스로 들어섰다. 희규형님과 매우 가까워졌다. 신정교 아래를 빠져나와 만나는 직선주로. 1킬로미터를 남기고 희규형님은 4분 50초로 달리기 시작했는데 나는 4분 30초 이내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에 숨어 있던 힘인가? 희규형님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워졌다 싶었을 때 바로 앞으로 나아갔다. 형님은 이 순간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했다. 추월당하는 시점이 조금 늦었을 뿐이라고 했다.
첫 5킬로미터는 24분 58초
마지막 5킬로미터는 24분 37초
후반 5킬로미터가 초반 5킬로미터를 이겼다. 내 기록은 외우기도 편한.....
3:37:37
희규형님은 3:37:48
서브 4가 힘들만큼 지쳐 보였던 특전사님은 후반 스퍼트로 3시간 42분 30초. 다른 두 분은 4시간을 넘겼다.
에필로그
희규형님은 네가 없었다면 페이스 조절이 되지 않아 3시간 30분대로 뛰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다. 마라톤이 고독한 운동임에는 틀림없지만 비슷한 페이스로 달리는 주자가 주로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말이다. 전우애마저 느껴지는 협동의 스포츠가 될 수 있다. 사실 마라톤 대회 참가를 결심한 것도 희규형님의 등장 덕분이었다. 달리기 전에는 온갖 회의감을 갖지만 달리고 나면 성취감과 만족감이 내내 우울했던 삶을 어루만져 주지 않는가? 그렇게 주저하고 망설여도 결국 달리는 게 달리지 않는 것보다는 나은 것이다. 햄스트링 통증이 불쾌하게 남아 있지만 그건 차후에 해결할 일이고 또 한번의 풀코스를 달린 네 자신을 격려하는 게 좋겠다. 아주 잠시라도.
새해복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문 앞에서.....
설날 참가자 다섯 명이 출발 직전 포즈를 취했다.
공원사랑마라톤대회가 2019대한민국교육문화체육공헌대상을 받았는지는 몰랐다.
설날이라 쌀떡국 사발면이 제공되었다. 희규형님, 특전사님과 함께 먹었다.
칩이 없어 배번이 가볍긴 했다. 이 배번의 재질은 얇은 천이라 플라스틱 판형칩을 달기도 어려워 보인다.
칩을 쓰지 않을 때 사용하려고 별도로 제작한 배번일 것이다.
이 기록증은 이틀 후 일부러 대회장을 찾아가 받았다.
4부작으로만 구성되어 한달만에 종방되니 아쉬웠다.
이런 프로그램은 계속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매우 뜸하게 재방송이 편성되어 반복해서 보기가 힘들다. 시청률이 1%도 안 나와 방송사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겠지.......
인터넷으로 프로그램 편성표를 늘 확인하고 재시청하고 있다.
어떤 프로그램을 편성표를 확인하고 찾아보는 일은 내 이력상 거의 없는 일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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