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감정은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남아 몇년 째 군림하고 있다. 누구나 우울하다. 다만 우울에 대처하는 방법이 다를 것이다. 악착같이 이겨내거나, 여지없이 무너지거나, 적당히 타협하거나. 내가 우울을 이기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마라톤에 참가하는 것이다. 대회 참가가 어렵다면 혼자서 운동이라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상황은 여의치 않다. 운동이라도 해 보려고 집을 나섰다가 긴급 소환되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대회가 줄줄이 취소되거나 연기되고 있지만, 대회가 정상적으로 열린다고 해도 내 개인 사정만으로도 참가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다.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려면 이동하는 시간까지 포함하여 나만을 위한 최소 8시간은 필요했다.
내 방에는 서까래가 없어서 밧줄을 달 수 없다. 서까래가 있는 집에는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 불행일까 행운일까 따져보기를 거듭하다가 2월의 정중간쯤 되는 날 도망나왔다. 나는 몇 시간 동안 소환당할 수 없었다. 수천 통의 전화가 걸려와도 나는 연락두절 상태였다. 도림천변에 고립되어 있었다. 2월 9일, 16일, 23일 마라톤 대회가 줄줄이 취소되면서 공원사랑마라톤 대회 참가자는 갑절로 늘어났다. 이 대회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SUB-3 달성 주자가 세 명이나 나왔고, 전체 참가자 가운데 50% 이상이 서브 4 완주를 했다. 마라톤 힐링카페에 들어설 때 신발 벗을 자리를 찾기가 어려웠던 것은 드문 일이었다.
봄같은 기온 속에서 긴팔 티셔츠 한 장만 걸치는 행운을 누렸지만, 불어난 살집 때문에 속도를 번번이 제어당했다. 지난 대회 때 보다 2킬로그램 이상 늘어난 체중 때문에 5분 이내의 페이스로 달린 것은 마지막 1킬로미터 구간 뿐이었다. 11킬로미터와 18킬로미터 지점에서는 화장실에도 다녀와야 했고, 달리는 거리가 늘어날수록 몸을 사리는 일이 잦아졌다.
3:45:39.25
나름대로 선방한 기록이었다. 지난 설날 풀코스를 달린 이후 3주간 제대로 운동을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마라톤 힐링 카페에서 떡국을 먹을 때 형님 한 분이 물었다.
오늘 기록이 어떻게 돼? 뭐라고? 설렁설렁 뛰는 것 같던데 3시간 45분이었다고?
이 말로 자족(自足)할 수 있을까?
지난 1월 12일 여수마라톤에서 부상을 입은 샛별홍진님과 첫 1킬로미터를 나란히 달렸다. 5분 40초. 서브 4에 딱 맞는 페이스였다. 5킬로미터는 26분 20초. 간밤에 매시간마다 잠을 깨었던 일을 떠올리면 잘 버티고 있었다. 기록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기록에 대한 욕심은 접었지만 페이스는 체크해야 했다. 6킬로미터 이후 신대방역까지 나아가지 않고 미리 목재 아치 다리를 건너는 코스로 바뀌면서 7킬로미터 이후 거리를 꼼꼼하게 따져 볼 수가 없었다. 이전의 10킬로미터 표지는 아직 10킬로미터를 달린 것이 아니니 페이스를 파악할 길이 없었다. 지난 주부터 코스가 바뀌면서 반환점에서 출발점이 바로 보이게 되었다. 이 새로운 코스에 대해서 거리가 늘어났다, 아니 줄었다 하며 의견이 분분했다. 31킬로미터 쯤 달리고 몹시 지친 주자가 눈에 보이는 출발점으로 바로 골인하여 오늘은 31킬로미터만 달리겠다고 할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서브4는 해야겠다며 달리는데 달해아름다워님이나 류성룡님은 너무 빨리 달리고 있어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3시간 10분대 주자의 여유와 서브4 주자의 여유는 달랐다. 시각장애인 마라토너 이흥의님은 도우미와 함께 내 뒤를 바짝 따르고 있었다. 이 분의 도우미 역할을 했던 것이 19개월 전인데 이 분은 나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그 때 몇번째 풀코스 도전이었는지도 잊지 않고 있었다. 풀코스 200회에 도전하는 용왕산마라톤클럽의 홍순진 고문님은 내 뒤를 따라오다 내가 화장실 간 사이 앞으로 빠져나갔다. 칠마남수님, 칠마태현님, 칠마용석님, 의계님, 용구님과 인사를 나누었다. 팔순이 넘은 재연님과는 좀더 길게 응원을 주고 받았다. 아이언맨 복장을 하지 않은 기민님의 모습은 낯설었다. 장비의 부담이 없어서인지 이름처럼 기민하게 느껴졌다.
1회전 완료. 1시간 54분이 걸렸다. 간신히 서브4를 목표로 했다가 서브 350이 가능해 보여서 안도하면서도 부담이 생겼다. 후반에 훈련 부족의 티가 나기 마련인데 3시간 40분대에 들어가려고 애쓰다 보면 몹시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시계를 보지 말고 몸가는대로 달리는 게 현명했다. 홍순진 고문님은 50미터 쯤 앞에 있었는데 27킬로미터 쯤 달리니 200미터 이상 앞에 있었다. 거리를 좁히고 싶지만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역시 훈련 부족은 도전 의지를 꺽어 놓는다. 조심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홍고문님과 점점 가까워졌다. 내가 빨리 달린 바 없으니 홍고문님이 속도를 늦춘 게 틀림없었다. 31.6킬로미터 급수대에서 콜라를 마시고 반환할 때 홍고문님을 제치게 되었다. 홍고문님은 이제 힘드니 천천히 따라가겠다고 했다. 10킬로미터 쯤 남았을 때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그때 건너편에서 오는 샛별홍진님을 만났다. 1회전 때만 해도 서브 4 페이스를 지켰던 샛별홍진님은 눈에 띄게 속도가 느려져 '훈련 안 한 몸은 거짓말 안 해'라는 말을 거듭하였다. 그에 비하면 나는 잘 버티고 있었다. 햄스트링 통증은 은근히 남아 다리 놀림을 방해하고 있었지만 견딜만 했다. 나를 옥죄는 것은 옆구리에 흔들리는 살이었다. 정말 꾸준히 찾아오는 살, 조금만 방심해도 불어나는 살. 그리고 또 하나. 신발끈이지나치게 펄럭거려 신경을 쓰이게 했다. 신발끈을 잘 묶어서 풀리지는 않았는데 평소와 달리 길게 늘여뜨려놓은 것이 발목을 자주 때렸다. 신발끈을 잊으려고 애썼는데 신발끈을 잊으려고 애쓰는 것 자체가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신발을 신은 것 같지 않게 달려 나가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달리기인데......
37.2킬로미터를 3시간 20분에 통과했다. 이전보다 7분 쯤 늦었다. 3시간 40분대 골인은 낙관할 수 있었다.
2월의 풀코스 기록을 기억했다. 매우 빨리 달렸던 2017년과 2018년을 싹둑 잘라내고 보면......
2013년 3:56:38
2014년 3:55:16
2015년 3:55:47
2016년 3:57:19
간섭포(간신히 서브 4 페이스)가 대부분이니..... 오늘은 그보다는 나아질 듯.
마지막 5킬로미터는 잘 버티어 내었다. 25분대로 달렸다. 매우 지쳐서 발걸음을 옮겨 놓기도 힘들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완주한 후의 햄스트링 상태는 출발할 때보다 도리어 좋아졌다.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마지막 1킬로미터를 4분 45초에 달렸다.
2011년 12월부터 99개월 연속 풀코스를 달리게 되었다. 이제 3월에 풀코스를 달리면 100개월 연속 풀코스 완주다. 이게 성취일까? 그런데 나는 왜 이것이 파멸로 느껴질까? 어떻게 해도 파멸로 나아가고 있다. 파멸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그 파멸을 외면하려고 애쓴다. 결론은 알지만 그 결론이 나기 전에는 다른 서술을 하고 싶은 고집을 꺽을 수가 없는 것이다. 몇 년 째 늘 이렇다.
풀코스를 완주하고 나면 성취감이 따라오기 마련이지만 우울하다는 대전제는 바뀌지 않는다. 그래도 조금은 덜 우울하다.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렇게 믿고 산다.
출발점이자 골인지점
제주감귤먹기 마라톤대회라는 명칭을 단 이유는 모르겠다.
완주 후 마라톤 힐링카페에서 떡국을 먹고 나왔다.
제주감귤먹기 마라톤대회이니 귤도 얻었다.
허수아비님이 주신 장갑을 끼고 달렸다.
꾸준히 이 신발을 신고 달리지만 한번도 제대로 된 기록을 세우지 못했다.
햄스트링 통증으로 고생할 때 늘 함께 하던 신발이라 정은 들었다.
아에드는 달리기 전 미리 마셨고....
양말 하나를 또 버리게 되었다.
여기저기 뜯어져 제 기능을 상실했다. 자세가 무너질 때 양말을 자주 버린다.
지난 1월 5일보다는 조금 빠른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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