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묵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또 다시 떠들고자 합니다. 자질구레한 에피소드를 일일이 끌어내어 기록에 남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몹시 더운 날 풀코스를 어떻게 완주했는지 오래 기억하길 바라면서.....
8월 초에 풀코스를 달리는 일이 어느 시기보다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같은 8월이라도 8월초는 8월말보다 훨씬 힘들다. 2014년 8월 초였다. 야심차게 풀코스에 도전했다. 생애 처음으로 하프 코스에 도전한다며 조언을 구하는 주자에게 신나게 떠벌리다 출발했다. 달리는 거리가 늘어날수록 기고만장했던 내 기세는 한없이 꺽이고 있었다. 결국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하프만 달리고 말았다. 8월초에는 풀코스를 달리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지난 해 8월 초 7월 옥천금강마라톤 기권에 대한 벌칙으로 8월 초에 풀코스를 다시 달리긴 했지만 잘 달려봐야 4시간 16분이 최고 기록이었다. 2015년 8월초에는 4시간 35분이 걸리기도 했다.
8월에 4시간 이내 완주는 늘 숙원이었고, 지난 해 8월 생애 첫 SUB-4 완주를 달성했다. 그때는 8월 말이었고 20도가 되지 않는 기온에 비까지 내려주었다. 올해는 어떨까? 괜한 짓을 하는 것은 아닐까? 연일 폭염 특보로 한없이 데워지고 또 데워진 날씨. 더울 것을 감안하여 주최측은 출발 시각을 7시 30분으로 당겼지만 이미 기온은 30도에 육박하고 있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더위보다 수면 부족이 두려우니 좀더 늦게 출발했으면 했다. 요즘 새벽 3시가 넘어 겨우 잠이 드는데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잠을 설치고 4호선 당고개행 첫 차를 타고 노원역으로 가서 7호선으로 갈아탔다. 공지영 소설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단 한 줄도 읽지 못했다. 풀코스 러너는 죽지 않는다고만 중얼거렸다. 로운리맨님 드릴 와인과 아세탈님 드릴 면 네 종류를 챙기다 보니 배낭은 어느 때보다 뚱뚱했다.
뚝섬유원지역에서 내려 화장실부터 들른 뒤 대회장으로 가다가 希洙형님을 만났다. 10킬로미터 배번을 달고 계신 형님의 모습은 너무 생소했다. 그래도 벌써 춘천마라톤과 중앙서울마라톤을 참가신청하시고 부상 회복을 하기 위하여 애쓰는 모습이 매우 감명깊었다.
로운리맨님이 대회를 마친 후 점심을 사겠다고 했다. 내 선물을 한꾸러미 준비했다는 아세탈님도 함께 하기로 했다. 출발할 때마다 앞으로 가던 로운리맨님은 뒤쪽에 머물렀다. 하프에 도전하는 아세탈님이 병목 현상을 걱정하며 앞으로 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냥 뒤에서 출발했다. 페이스메이커가 뒤죽박죽 뒤섞여 달리고 있었다. 4시간 20분 페이스메이커가 4시간 페이스메이커보다 앞에 있기도 했다. 몇 백 미터는 지지부진하게 달리다가 잠시 속도를 올려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갔다. 제치고 나갈 때마다 만나는 분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시각장애인 도우미 은기님, 제비한스님, 안녕하세요. 한구님. 오랜만입니다. 은수님. 다시 뵙네요. 바깥술님. 앞에 계시네요. 첫 1킬로미터는 5분 30초가 걸렸다. 다음 1킬로미터는 오르막을 넘으면서도 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머릿 속에서는 로운리맨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건달님. SUB-340하실 겁니다.' 8월 초에 3시간 30분대라?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일단 실현시켜 보려고 했다. 풀코스 3시간 40분 페이스메이커를 따라 달렸다. 하프 주자 광희님과 잠깐 인사를 나누고 2리터 물통을 들고 달리는 30대 후반의 광배님과 만났다. 동숭동 거주, 동성중고 졸업, 휴먼 레이스 소속. 최고 기록 3시간 3분.
-옥천에서는 30대 2위 하셨더라고요.
-그 때 30대 1위가 3시간 9분, 싱글을 했는데 그 더운 날씨에 말이예요. 여름엔 아무리 빨라도 20분 정도 밀리는데 2시간 40분대도 가능한 사람이란 거지요.
-그럼 유명한 사람이겠네요.
-그렇지도 않아요.
광배님과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했지만 워낙 달리기 능력이 좋은 사람이라 12킬로미터 이후에는 나보다 쭉 앞서 달리게 되었다.
5킬로미터 25분 30초. 8월 초순이라고 하기에는 엄청나게 빠른 페이스였다. 로운리맨님의 목소리는 주로 어디에도 있었다. 건달님은 서브340 하실 겁니다. 3시간 40분 페이스메이커보다 앞에서 달리는 하프 1시간 50분 페이스메이커를 따라갔다. 따라가는 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그냥 편안했다. 흐린 날씨에 비도 조금씩 뿌려주었다. 구리시에 들어섰을 때에는 굵은 비도 제법 맞았다. 그러나 비를 맞기 전에 이미 젖어 있었다. 달리는 주자는 비에 젖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더 이상 젖을 데도 없었다. 보조를 맞추면서 따라가고 있는 내게 1시간 50분 페메가 지적했다. 발 소리 좀 내지 말라고. 발을 구르듯이 뛰라고. 그 못된 습관을 고치려면 3년은 걸리겠지만 그래도 고쳐야 한다고. 주눅이 들어 조금 뒤쪽에서 발 소리를 낮추고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내 주법에 회의감이 들면서 신나게 달리던 기세가 꺽였다.
10.5킬로미터 지점에서 반환하고 보니 로운리맨님이 바로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건달님 입상권이에요. 아닐걸요. 마주 보게 되는 주자들에게 인사할 시간이 되었다. 오늘따라 아는 분들이 내 뒤에 있었다. 바깥술님, 달물영희님, 두경님, 은수님, 태현님, 은기님, 제비한스님, 한구님, 맹순여사님, 특전사님. 특전사님은 새벽에 끝난 100킬로미터 대회에서 2위로 입상하고 와서 아내의 페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다리던 그 분. 아세탈님! 팔을 흔들면서 인사했다.
달리는 거리가 늘어날수록 물이 더 필요했다. 급수대에 놓인 물컵만으로 부족해 500밀리 생수통을 챙겨 달리면서 마셨다. 15킬로미터를 달리자 서울에 다시 돌아왔다. 만약 하프라면 지금부터 질주를 시작할테고, 충분히 그럴 힘도 남아 있는데 풀코스를 달려야 하니 힘을 아껴야 한다. 하프만 달리면 얼마나 좋을까? 그냥 하프만 달릴까? 이 더운 날씨에 하프만 달려도 운동은 충분한 것이니 하프 기록증을 받고 아세탈님과 로운리맨님을 기다릴까? 그것도 괜찮은 생각인데.
하프를 달리는 달해아름다워님을 제쳤다. 싱글의 기록을 갖고 있는 여성인데 더위 앞에서는 한없이 지쳐 버린 듯했다. 18킬로미터쯤 달리자 뒤처져 있던 3시간 40분 페메가 내 앞으로 나왔다. 처음에는 지친 기색이었는데 언제 기력을 회복한 것일까? 빨리 달릴 수 있는데도 참고 있었던 것인가? 달해아름다워님도 2킬로미터를 남기고 분발하여 나를 제치고 나갔다.
골인 지점이 보였다. 하프만 달리고 말아야지 하는 유혹을 이겨내고 반환했다. 꿀물과 홍삼드링크를 마시고 2회전에 나섰다. 1시간 50분이 걸리지 않았다. 정말 3시간 39분대 완주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경험이 질주를 막았다. 이대로 가다간 35킬로미터를 넘어 아예 뛰지도 못할 정도로 기가 다 빠져 나가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뜨거운 기운을 죄다 모아 주로에 응축해 놓은 듯한 느낌인데다 비는 내리다 말다 하면서 땅바닥에서 습기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한증탕 속에서 달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없이 데워진 공기 속을 뜨거워진 주자들이 달려나가며 누가 더 열이 많은지 경쟁하는 듯한 이 대회에서 생애 마지막 대회를 참가한 것처럼 내달려서는 안될 노릇이었다. 끝까지 달리기로 결심한 이상 42.195킬로미터를 모두 달려 내기 전에는 멈추지 않겠지만 좀더 유연한 대응이 필요했다. 현저하게 속도를 줄였다. 로운리맨님은 내게 다시 연대별 입상이 가능하다고 외쳤다. 언뜻 SUB-4로만 달려도 입상이 가능하다고 말한 것같았다.
잠실롯데월드타워를 바라보며 나아가 구리암사대교와 대형 태극기를 다시 보고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걷는 것은 절대 금물. 풀코스를 달리는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고 걷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일찌감치 축지법을 배워 두었으면 어땠을까? 자전거가 지나가면 잠시 빌려 타고 몇 백미터만 갈 수는 없을까, 앰블런스가 지나가면 얻어타고 몇 킬로미터만 이동하면 안 될까. 어떻게 그렇게 빨리 왔어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열심히 달리니 천지의 기운이 저를 돕더군요하는 식으로 너스레를 떨면 얼마나 흥미로울까. 뒤쪽에서 바람이 나를 밀어주지 않을까. 장대비가 떨어져 대기를 식혀주지 않을까. 일부러 속도를 떨어뜨린데다 달리고 싶지 않은 마음을 달래어 뛰다 보니 속도는 더 떨어지고 있었다. 1회전 때에는 수시로 페이스를 체크했는데 2회전 때에는 시계를 보는 것도 귀찮아졌다.
점점 지쳐간다는 느낌이 들면서 3시간 40분 페이스메이커가 보이지도 않게 되었을 때 나 자신을 달랠만한 기억을 끄집어 내었다. 그래도 지난 주중 폭염경보가 내린 대낮에 나가 인터벌 훈련할 때 보다는 편하구나. 그 때는 칠부바지를 입었고, 배낭까지 메고 있었다. 다소 무거운 훈련화까지 신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이 얼마나 홀가분한 옷차림인가? 뙤약볕도 아니다. 이틀 전에는 소고기로 영양보충도 잘하지 않았는가? 혼자 달리는 것도 아니라서 응원을 주고 받으며 힘을 얻을 수도 있다. 바깥술님은 내게 오늘도 날아간다고 표현했다. 절대 그럴 일은 없는데. 아세탈님에게는 정말 힘들다고 하소연하였다. 그러고 나니 좀 힘이 났다. 급수대마다 물통 하나씩을 챙겼다. 완주할 때까지 여섯 통을 넘게 건드렸다. 뚜껑을 따서 마시고 얼굴에 뿌리고 목에 뿌리면서 화기(火氣)를 다스렸다. 종아리에 붙여 놓은 근육 테이프는 덜렁거리더니 30킬로미터를 넘으면서 떨어져 나갔다. 2차 반환점에서 전마협 차량이 급수대에 바짝 붙어 있었지만 비집고 들어가 악착같이 에너지젤을 받았다. 거기에 생수 한 통까지 챙겼다. 500밀리 생수를 급수대를 만날 때마다 받아 그 물을 다 마신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물을 많이 마셔대면 화장실에 자주 가야 할 것같았다. 하지만 화장실에는 한번도 가지 않았다. 수분 보충보다는 수분 배출이 많았으리라. 웃도리를 벗은 로운리맨님이 무척 힘든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힘들어요. SUB-4 못할 것같아요. 이런 더위, 이런 컨디션은 처음이라 힘들어 죽겠다는 말로 들렸다. 이겨내면 강해질 거예요.(이 말은 못하고 말았네) 달리다 지쳐 걷기 시작한 헬스지노님은 두 팔을 들어 박수를 치며 나를 응원했다. 주로에서는 아는 체도 거의 하지 않는 분이 이런 깜짝 이벤트로 감동을 주다니......
암사대교 아래를 지나갈 때부터라도 킬로미터당 5분 페이스로 달린다면 3시간 39분대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협했다. 3시간 49분대로 가 보자고. 그렇게 해도 8월 생애 첫 3시간 40분대가 아닌가? 가능하면 지난 해 세웠던 8월 최고 기록 3시간 57분 12초에서 10분만 줄이자. 달리면서 타협에 타협을 거듭했다.
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초연한 듯 달리고 있었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인사는 했지만 이제 큰 동작으로 인사할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람이 없을 때는 입을 다물고 나 자신과 싸웠다. 내 속에서는 난폭한 읖조림이 있었다. 나 자신의 속을 헤집어 버릴 정도로 거센 울부짖음도 있었다. 난폭한 침묵(violent silence). 37킬로미터를 넘겼을 때 건너편에서 맹순여사님을 이끄는 특전사님이 오고 있었다. 나는 5킬로미터가 남았지만, 이분들은 아직 16킬로미터가 남아 있었다. 그래, 이분들보다는 내가 훨씬 편한거야. 앞에 있던 롯데월드타워는 뒤쪽으로 물러나고 골인 지점은 가까워지기 마련이었다. 악착같은 발놀림. 격렬한 피로감 속에서 한걸음 한걸음 치고 나갔다. 마지막 1킬로미터. 그래도 마지막이니까 질주했다. 4분 30초로. 골인 아치가 보였다. 그 아치가 가까워질수록 분홍색이 눈에 들어왔다. 분홍색 티셔츠를 입은 아세탈님이었다. 완전히 젖어 버린 나. 사진을 찍어주셨다.
3:47:15.05
8월 최고 기록을 9분 57초 줄였다.
로운리맨님은 연속 풀코스로 쌓인 피로와 좋지 않은 컨디션에서도 3시간 59분대로 완주했다. 3시간 37분대로 골인한 광배님과 앉아서 오늘의 무용담을 한동안 떠들어대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다 방송을 들었다. 내가 연대별 3위 입상이라고 했다. 로운리맨님과 아세탈님의 환호성. 로운리맨님도 연대별 4위에 입상했다.
마라톤은 완주하는 것만으로도 칭찬받을 수 있는 운동인데 입상까지 하다니.... 단상에 올라가 크리스탈 트로피를 받고 로운리맨님의 식사 대접과 아세탈님의 선물까지..... 그만 뛰고 싶은 유혹을 이겨낸 내게 너무 과분한 포상 아닌가? 달리고 나서 시원한 콜라 한 잔만으로도 그 포상은 충분했는데......
※ 연대별 입상, 로운리맨님의 식사 대접, 아세탈님의 선물은 별도로 포스팅합니다.
골인점에 점점 가까워지는 모습을 아세탈님이 찍어주셨다.
물통을 들고 골인하면서 시간을 체크하고 있다.
2회 왕복은 항상 지겹다.
8월 최고 기록을 9분 57초 줄였다.
8월초 기록은 29분을 단축했다.
마라톤화를 세척해야 했다. 여름에는 달리고 나면 무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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