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킬로미터를 넘어섰다. 도림천변을 빠져나와 안양천변에 들어서기 직전이었다. 이제 영양 섭취가 필요했다. 풀코스 이후 휴식을 제대로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풀코스를 달리니 내 몸이 어떻게 될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스포츠겔을 먹는 데 아주 고역을 치뤘다. 손이 얼어서 입구를 뜯어내는 데 여간 애먹지 않았다. 어렵게 꾸역꾸역 섭취하다 보니 함께 달리던 주자들이 앞으로 달아났다. 그보다 앞서.
해병대님의 숨이 거칠었다. 아무래도 힘들어 보였다. 378번의 풀코스를 완주하는 동안 단 한번도 SUB-4를 놓쳐본 적이 없는 분인데 오늘처럼 거친 숨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마치 내가 그분을 위하여 페이스메이커를 하고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우리 주변에는 꼭 한 명씩 동반주를 하고 있었다. 그 인물은 바뀌었지만 늘 삼인조가 팀이 되어 달리고 있었다. 내 옆머리에 달린 고드름이 점점 커져서 달릴 때마다 뺨을 때리니 아플 정도가 되었다. 그보다 앞서.
20킬로미터를 달린 후에야 해병대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곧 하프 반환. 1시간 58분이 조금 넘었다. 후반에도 이 페이스를 유지한다면 SUB-4는 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나흘만에 다시 풀코스를 달리고 있으니 자신할 수는 없었다. 물은 말할 것도 없고 콜라까지 얼어붙어 입김으로 녹여가며 마셔야 했다. 그보다 앞서.
해병대님을 꾸준히 따라가 17킬로미터 정도 달렸을 때 10미터 이내까지 간격이 좁혀졌다. 도림천에 들어서면서 확실히 바람이 줄어들었다. 맞바람 때문에 달리기 어렵거나 하지는 않았다. 추운 날씨이다 보니 소변이 몹시 마려웠다. 17킬로미터 지점에서 교각 그림자를 발견하고 거기에 숨어서 고민을 해결하였다. 이 바람에 해병대님과의 거리는 50미터 이상 벌어져 버렸다. 그보다 앞서.
도림천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르노삼성자동차 대야점 외술님과 동반주하였다. 매서운 한파가 밀어닥치다 보니 외술님의 복장은 크게 바뀌었다. 캡 대신 비니, 노랑조끼 대신 두터운 티셔츠. 내가 올해 풀코스 100회를 채운다고 했더니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주로에서 자주 만났는데 아직도 100회를 못했다니 믿을 수 없다고 했다. 풀코스를 달리게 되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10킬로미터 대회 120회, 하프 대회 122회, 5킬로미터 대회도 60번에 육박한다고 하니 그런 사람 별로 없다며 혀를 내두르셨다. 풀코스 완주 횟수를 늘리는 사람치고 하프나 10킬로미터 대회를 나처럼 많이 달린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하였다. 특전사님만 해도 200번이 넘게 풀코스를 달렸지만 10킬로미터나 하프는 단 한 번도 달린 적이 없다고 했다. 너무 춥다 보니 주로에서 신나게 달리는 주자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마시는 콜라는 얼기 시작하면서 거의 슬러시 수준으로 바뀌었다. 그보다 앞서.
10킬로미터 통과. 57분 14초. SUB-4를 하려면 56분 40초에는 달려주어야 하는데 오늘 내 능력은 여기까지인가? 그래도 안양천으로 들어서면 맞바람을 피할 수 있으니 좀 빨라졌을 줄 알았다. 뒤집어 썼던 방풍 비닐을 벗어버려서 조금은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었는데. 그러나 츄리닝 바지가 주는 제약이 있다는 것. 그보다 앞서.
여의도 이벤트광장에서 성산대교 방향으로 달리는 일은 아주 고역이었다. 북풍이 몰아치는 방향으로 달려나간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바람막이를 준비했어야 했는데 물품보관비닐봉투에 구멍을 내어 바람막이를 대신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버프를 끌어내려 귀를 덮었어도 귀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시렸다. 손가락은 곱아서 주먹을 말아쥐고 장갑을 끼고 있었다. 마스크 대용으로 착용한 버프는 내 입김 때문에 얼굴에서 사이를 떨어뜨린 채 꽁꽁 얼어붙었다. 얼음 원통처럼 변해 버린 버프라니...... 1킬로미터까지는 5분 40초가 나왔는데 달릴 때마다 속도는 느려졌다. 킬로미터당 페이스가 6분이 넘어가기 시작하면서 22분 40초로 달려 주어야 할 4킬로미터 기록이 23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그보다 앞서.
출발하기까지 얼마나 갈등이 많았는가? 몇 명의 참가자들은 기념품만 수령해서는 돌아갔다. 영하 10도에 강풍까지. 체감온도는 영하 15도 이하로 곤두박질쳤다. 오늘이 1월 1일이 아니었다면 달리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내 생애 최초의 풀코스가 체감온도 영하 15도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아예 출발선에 서지도 않았을 수도 있다. (2006년 3월 12일 동아마라톤의 기억) 츄리닝 바지에 티셔츠 두 장, 그리고 방풍 비닐과 버프. 새해 벽두에 그저 운동을 할 따름이라고 암시하였다. 그보다 앞서.
주최측에서는 탈의실용 천막도 치지 못했다. 너무 심하게 바람이 불어 설치 자체를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야외 화장실을 이용하여 달릴 준비를 하였다. 새해의 일출은 화장실 창문을 통하여 보았다. 너무 추워서 나가고 싶지 않은 날씨였다. 정말 나는 미친 거야. 중얼거렸다. 여러 사람과 함께. 다시 돌아와. 30킬로미터 지점으로 다시 돌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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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킬로미터 정도 가까이 달려서 급수대를 만났다. 온수가 담긴 컵을 건네주는 자원봉사요원에게 한없이 감사했다. 스포츠겔을 먹느라 달리기의 페이스를 잃었던 나는 페이스를 다시 회복하였다. 남은 10킬로미터를 51분에 주파하였다. 첫 10킬로미터를 57분 넘게 걸린 것에 비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스피드를 낸 것이다. 안양천을 빠져나가기 직전 2킬로미터 정도는 맞바람 때문에 어지간히 힘들었다. 하지만 한강변에 들어서자마자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뒤에서 바람이 밀어주니 신나게 달렸다. 이 몸이 나흘 전 풀코스를 달린 사람 맞나 할 정도로. KBS 연기대상, SBS 연기대상을 다 보면서 한 살 더 먹고 나서 자다 보니 잠이 부족했다. 새벽에 몸을 일으킬 때에도 모닝콜을 10분씩 뒤로 밀어놓으며 버티고 버티다 이불 밖으로 뛰어나왔고, 매서운 한파가 내 전의를 상실하게 했지만 옷을 겹쳐 입고 대회장으로 왔던 기억을 해내었다.
바람에 날개를 단 듯이 사정없이 달렸다. 37킬로미터 지점 급수대의 물은 바위처럼 딱딱하게 얼어 있었다. 집어 들었다가 어이가 없어 내려 놓아야 했다. 그나마 따라 놓은 지 얼마 안 되는 콜라를 마시고 힘을 내었다. 2킬로미터쯤 남기고 한 사람을 제쳤다. 그리고 더 스피드를 올렸다. 내일 모레 풀코스를 달려야 하는데 무리하는 것 아니야? 내 자신에게 물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야.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보자고. 나 자신을 더욱 채찍질하였다. 골인 지점에 가까워 가면서 카메라맨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런 추운 날씨에 카메라맨이 있겠는가? 골인할 때 표정같은 건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골인하였다. 기록을 계시하는 심판원이 말했다.
-5등으로 골인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내가 풀코스 5등을 하다니.
3시간 40분대 기록은 못 세웠는데 5등이라고?.
3시간 50분 38초의 기록으로. (2014년 1월 1일 같은 코스에서 반바지 입고 달린 것보다 몇 분 빨라졌다)
풀코스 완주자는 49명. 거기에서 내가 5등이었다.
그러고 보니 평소에 나보다 잘 달리던 사람들 여러 명이 내 뒤에 있었다.
워낙 추운 날씨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실력 발휘를 하지 못하였다.
해병대님이 나중에 악수를 청하셨다.
-어떻게 후반에 그리 잘 나가요?
-미쳤나 봐요.
-힘들었는데 함께 달려준 덕분에 SUB-4를 했습니다.
-그럼 379번 연속 SUB-4시네요.
떡국 한 그릇 먹고 대회장을 빠져 나왔다.
※ 김 솔 단편소설 <은각사>의 말투를 흉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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