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바지를 입고 달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12월에 반바지와 민소매를 입고 달리는 주자도 있지만 대부분이 롱팬츠를 입고 달리는 대회가 되었다.
나는 긴팔 두 장에 츄리닝 바지를 입었다.(이 츄리닝 바지는 첫 풀코스 완주할 때 입었던 바지이기도 하다.)
희수 형님과 SUB-4 기준에 맞추어 즐겁게 동반주할 계획이었지만 출발 전 만난 희수 형님은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쥐가 자꾸 나서 아예 4시간 15분 페이스메이커 따라 가려고요.
이 말씀으로 내 행보는 완전히 바뀌었다.
함께 달릴 수 없게 되었으니 희수 형님과 동떨어져 4시간 페메, 나아가 3시간 45분 페메를 따라가는 레이스가 되었다.
암사대교에서 반환하여 돌아올 때 보니 희수 형님은 4시간 15분 페메보다는 조금 빠르게 달리고 계셨다. 나는 6킬로미터 지점을 넘어서면서, 에라 모르겠다 가 보자라는 식으로 3시간 45분 페메보다 앞서 달리고 있었다.
-같이 달리면 참 좋을텐데요.
그런 인사로 형님을 보내고 내 나름대로의 레이스를 펼쳤다.
영하 7도까지 떨어진 날씨가 오후가 되어도 회복되지 못하고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머리카락쪽으로 흘러내리는 땀은 찬 공기와 만나면서 얼어붙어 고드름이 되어 덜렁거렸다. 몇 번이고 장갑낀 손으로 얼음을 훑어내었다.
맑기라도 했으면 좋았겠지만 음산한 느낌으로 구름이 내려와 있었다. 더 춥게만 느껴지는 날씨. 일주일만에 이렇게 바뀌어 버리다니.
3시간 45분 페메보다 빨리 달린 덕분에 10킬로미터 지점은 52분 정도에 통과하였다.
암사대교쪽의 오르막을 탔다면 14킬로미터 지점에서 화장실을 만나겠지만, 주최측이 암사대교쪽의 오르막을 없애준 덕분에 12킬로미터 지점에서 화장실을 만났다.
달리는 동안 제대로 된 화장실은 이게 마지막일 것이니 좀 이르더라도 들르는 게 현명하였다. 양재천쪽에 화장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에서 꽤 벗어나 높은 지대에 있어서 달리기 시간을 잃게 된다. 내가 입고 달리는 츄리닝 바지는 사타구니쪽이 삭아서 구멍이 나 있는데다 허리 고무줄이 느슨해져 끈으로 꽉 묶고 있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화장실에 들어가고 나오고 하는 동안 끈 처리하느라 시간을 제법 잃었다. 화장실에서 나오니 3시간 45분 페이스메이커가 마스터즈를 이끌고 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따라갔다. 함께 달리면 바람을 막아주고 오버페이스를 제어하는 등 도움이 되지만 급수대에서는 방해가 된다. 결국 15킬로미터 지점 급수대에서 주자들이 몰리다 보니 물컵 구경도 못했다. 쵸코파이 한 조각을 씹어먹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20킬로미터 지점에서는 꼭 급수를 해야지. 거기서는 하프 주자들이 없어지고, 10킬로미터 주자들은 지나간 지 오래일테니 물먹기가 수월할거야. 그래도 3시간 45분 페메 무리와는 떨어져야 해. 이럴 경우 뒤로 가는 것보다는 먼저 가는 게 물마실 확률이 높아진다. 서서히 피로감이 몰려왔지만 3시간 45분 페이스메이커 앞으로 치고 나가서 앞에서 달렸다. 20킬로미터 지점에서는 물도 마시고 게토레이도 마셨다. 중간에 빼먹은 만큼 더 마셨다. 그게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오늘의 레이스는 양재천에 들어서고도 한참을 가서 하프 지점을 만나니 지루했다. 올림픽대교와 암사대교쪽으로 갔다가 오는 코스는 양재천에 들어서기 전에 하프 지점을 지나기 마련인데 이번 레이스는 암사대교의 오르막을 피한 대신 양재천을 끼고 오래 달려야 했다. 다리도 몇 차례 건너야 했다. 20킬로미터 지점에서 급수를 마치고 난 후 몇 백 미터 가기도 전에 요란하게 지축을 울리는 소리를 들었는데 3시간 45분 페이스메이커 세 명과 20여 명 가까운 마스터즈들이었다. 박연익 페메가 인사하였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내 이럴 줄 알았어요.(추격당할 줄 알았어요.)
어느 정도 따라가는 기세였지만 내 앞으로 치고 나간 무리들과 보조를 맞출 수 없었다. 하프 지점까지는 1시간 51분 정도 걸렸다. 후반도 같은 페이스로 달리면 3시간 45분이내의 기록은 무난하게 작성할텐데. 내 기세는 꺽였다. 30킬로미터 지점까지는 20미터에서 50미터 사이에서 꾸준히 따라갔지만 그 이후부터 3시간 45분 페이스 주자들은 나와 멀어져 갔다. 26킬로미터 지점을 지나면서 스포츠겔을 먹어서 기운을 차렸다고 암시를 걸어 보았지만 쳐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12월 영하의 날씨에 초반 오버페이스 한 것은 아닌가? 일단 35킬로미터 가서 생각해 보기로.....
29킬로미터 후반 정도에서 2차 반환하고 30킬로미터를 향하여 달려가는데 앞서 가던 주자 한 분이 몸을 돌리더니 아는 체 하였다.
-참 잘 달리시네요. 난 힘들어서 못 뛰겠어요.
광화문 페이싱팀의 류성룡님이었다. 소형 카메라를 들고 달리면서 지인들을 일일이 찍어주시는 베테랑. SUB-3 정도는 가볍게 하시는 분인데 힘들다니.....
레이스패트롤하면서 배낭을 메고 달렸으니 힘드셨을 것이다. 게다가 전라도 사시는 분이 서울까지 오셨으니.....
-무리하지 마시고 천천히 오세요.
30킬로미터 지점은 2시간 39분대에 통과하였다. 3:45 이내 골인에는 무리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이 3:45 페메와는 점점 멀어진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달리면 달릴수록 3:45 페메와 100미터, 200미터, 거의 300미터까지 떨어지는데 난감하기만 했다. 광화문 페이싱팀의 빨간 티셔츠와 파란 풍선은 아득히 멀었다. 르노삼성자동차 대야점 조끼를 입고 달리는 주자도, 휘문 72 주자도 3:45 페메 뒤 쪽으로 쳐지고 있었다. 그 많던 동반주자들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3:45 페메 세 명만 한 데 모여서 역주하고 있었다. 얼추 35킬로미터 지점을 지났다고 생각했다. 34킬로미터 지점 이후 38킬로미터 지점까지는 거리 표지판이 없어서 거리를 그저 어림짐작으로 가늠해야 했다. 대략 35킬로미터 지점을 지났다고 생각했을 때 르노삼성자동차 대야점 주자와 150미터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3:45 페메는 200미터 정도의 거리 차. 달리면 달릴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그들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38킬로미터 표지판을 만났다. 이 지점에서 3시간 45분 페이스메이커 한 분을 제쳤는데 이 분은 페이스 조절에 실패해서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진 탓이었다. 제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는 페메와는 100미터 정도로 가까워졌다. 40킬로미터 지점 급수대 통과. 르노삼성자동차 대야점 주자와 해후한다.
-따라오느라 아주 죽는 줄 알았어요.
-머리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렸어요.
왼쪽 머리카락에 머리장식처럼 달려서 흔들리는 고드름이 내 뺨을 때리고 있었다. 르노삼성자동차 대야점 주자를 제치고 나갔다. 이 와중에 걸어가던 한 주자가 기를 쓰고 달려와 나를 제쳤는데 잠시였을 뿐이다. 이내 그는 걸어 버렸다.
이제 따라가야 하는 사람은 3시간 45분의 박연익 페메.
양재천을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따라잡은 뒤 한 마디하였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기준이 되어주셔서.
그리고 또다른 페메, 현장운님을 제쳤다.
이제는 될대로 되라지. 스퍼트하고 또 스퍼트하였다.
구간마라톤을 하느라 9.4킬로미터만 달리는 제6구간 주자들을 몇 명 제칠 정도였다. 골인 지점을 코 앞에 두고 허리를 숙여 버린 주자에게 ' 다 왔어요. 힘내세요.'라고 외치기도 했다.
힘차게 힘차게 달려가 올해 23번째의 풀코스 완주에 성공하였다.(한해 풀코스 최다, 종전 기록 2013년 22회, 2012년 15회)
기록은 3시간 41분 32초 08.
12월에 달린 풀코스 가운데 최고 기록이었다.
후반에 어떻게 페이스를 회복하고 역주할 수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37개월 연속 풀코스. 생애 75번째 풀코스 완주. 2015년 100회 완주가 눈 앞에 보인다.
올해가 가기 전에 두 번 더 풀코스를 달릴까 한다. (12월 20일, 12월 25일)
나를 촬영하는지 미처 몰랐다. 이따금 고개를 숙이고 달릴 때도 있었겠지.
이런 순간도 나의 모습이니까 환영.
희수 형님은 골인 지점에서 찍혔네.
나는 골인 지점의 사진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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