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애환(讀書哀歡)

박완서 타계 10주기, 출간 작품을 읽다(2021/04/12~)

HoonzK 2021. 5. 26. 15:59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대 아직 꿈꾸고 있는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휘청거리는 오후, 목마른 계절, 아주 오래된 농담, 너무도 쓸쓸한 당신.

 

한번 들으면 각인되는 이 문장들은 모두 박완서의 작품 제목이다. 1931년생으로 스무살이 되던 해 박완서는 서울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학업을 마치진 못했다. 그 해 바로 한국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작은 아버지는 빨갱이로 몰려 희생당했고, 오빠는 인민군에 끌려갔다가 총상을 입고 돌아왔으나 후유증으로 유명을 달리한 상황에서 박완서는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아버지는 작가가 어린 시절 돌아가셨다.) 미군 PX에서 일하며 학교로는 끝내 돌아가지 못했다. 23살 때 결혼한 후 남편 뒷바라지를 하고 자식을 키우며 청춘을 다 보낸 이 여성은 마흔이 되는 해 문단에 나온다. 당시로서는 놀라울 정도의 늦깍이 데뷔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후 40년 넘게 치열하게 글을 써서 발표한다. 유종호 평론가가 정리한 대로 그녀의 주제는 '6.25의 파괴적인 충격과 그 여파의 꼼꼼한 관찰과 묘사'였다. 인물은 살아 숨쉬고 설명은 읽기 편하지만 의미깊다. 당대 현실을 너무나 잘 묘사하여 20세기의 후반의 한국 사회사를 알고 싶으면 박완서의 소설을 읽는 게 역사책을 보는 것보다 이해가 빠를 수 있다. 역사책이 미처 전달하지 못하는 당시의 정서까지 느끼게 해 주니까.

박완서 선생이 살아 있을 때는 그 분의 글을 읽지 못했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가 1984년 영화로, 1988년 KBS 드라마로 나왔을 때 그 원작자가 박완서라는 것만 아는 정도였다. 늦깍이 문단 데뷔 사실도 시인 선배가 알려주었다. 선생이 2011년 1월 돌아가시고 나서야 꾸준히 작품을 읽었다. 다수가 찾으니 나는 피하겠다. 사람들이 찾지 않지만 뛰어난 작품을 찾아 읽는 소수가 되겠다는 의도를 가진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볼 뿐만 아니라 평론가들이 자주 거론까지 하는 작품을 피할 수는 없었다. (김ㅈㅁ은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하지만 어떤 평론가도 그의 작품에 대하여 평하지 않는다.)


 선생이 돌아가신 것이 2011년 1월 22일. 올해가 10주기라 박완서의 작품이 새로 단장되어 재출간되었다. 처음 내가 손에 든 작품은 자전적인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이다. 서울에 있었던 스무살 처녀가 피난을 가지 못해 남과 북의 통치를 번갈아가며 살아내어야 했던 삶이 생생하게 담겼다. 올케와 빈집을 찾아가며 필요한 생필품을 챙기고, 미군 PX에서 밥벌이를 했던 시절이 영화를 보는 것처럼 지면에 펼쳐졌다. 이 책은 1995년 초판이었지만 타계 10주기가 되는 날 2021년 1월 22일 재출간되었다. 선생의 글을 읽기 시작하면 중도 포기, 도중 하차가 없다. 생생한 표현력에 혀를 내두르며 읽는데 지나간 세월이 무색하게 정확한 기억에도 거듭 놀란다. 선생에게는 기억 보관소가 따로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너무 진한 기억이라 끊임없이 곱씹으며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일까? <그 남자네 집>(371)에 나오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반 이상은 추억의 무게이다'라는 말대로 살아남은 자로 되새기고 또 되새길 수밖에 없었던 까닭일까?

코로나19가 종식되면 돈암시장 어디든 앉아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219쪽을 펼쳐놓고 1950년 한국전쟁 때의 광경과 무엇이 달라졌을까 상상해 보고 싶은 의욕이 샘솟는다.

 

내친 김에 문단 데뷔작 <나목>을 읽었고, <그 남자네 집>도 읽었다.

박완서 글읽기는 두 달 동안 이어져 5월에는 한국전쟁 전 어린 시절을 추억한 자전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잡고 있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가 소설로 그린 자화상 2편이라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1편이 되겠다.

 

강북청소년도서관과 솔샘문화정보도서관에서 빌렸다.

 

지렁이 울음소리에는 장편 <나목>이 실려 있다. <나목> 외에도 <지렁이 울음소리>,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카메라와 워커>를 읽었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의 실제와 <그 남자네 집><나목>에 더해진 허구를 비교해 읽는 재미가 있었다.

 

<나의 아름다운 이웃>은 작가의 짧은 소설만 수록해서 간단하게 읽기 좋았다.

 

돈암시장을 묘사한 대목.... 너무 생생해서 돈암시장에 가서 꼭 이 부분을 읽고 싶었다.

 

좋은 문장이나 잘 쓴 표현은 옮겨 적었다. 글쓰기를 배우고 싶어서.....

 

도서관 서가를 살피다가 박완서 소설전집이 나란히 꽂혀 있는 장면을 보는 일은 흔하다.

 

몇 년 전 읽은 책이지만 신판으로 다시 나와 빌려서 또 펼쳤다.

 

10주기 기념으로 박완서의 35편 에세이를 모아 낸 책. 남긴 산문 660여 편 중 가장 글맛 나는 대표작 35편이라고 하여 도서관마다 대출된 상태라 빌릴 수 없었는데 운좋게 송중문화도서관에서 빌렸다. 몇몇 에세이는 언젠가 읽은 기억이 있었지만 다시 봐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