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제를 먹고 자다 일어난 것같은 노곤함, 사라질 기미가 없는 햄스트링 통증, 6일 전 풀코스를 달린 후 헤어날 길이 없었던 피로와 무력감.
어차피 이 마라톤은 무료 참가였다. 도저히 안 되면 포기할까 했다. 주최측에서는 여의도 벚꽃 마라톤 코스와 달리 풀코스를 2회전 방식으로 바꾼다고 했다. 그나마 그늘을 달릴 수 있었던 도림천 구간이 사라지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노천 구간을 달리게 되었다. 1회전 하프만 달리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게 생겼다. 처음부터 해가 쨍쨍 내리비쳤다. 게다가 기온은 27도까지 치솟는다고 했고, 미세먼지까지 있다고 했다. 내 몸부터 주변 여건까지 도움이 되는 게 없었다. 용왕산마라톤클럽의 希洙형님은 축구를 하러 간다고 했다. 같은 클럽의 홍순진 고문님은 오늘은 더울테니 아예 욕심을 버리고 4시간 20분으로 뛰겠다고 했다. 나도 그래야 하나?
마라톤 TV 주최 대회에는 나오지 않던 광배님이 보였는데 5월 소아암환우돕기와 바다의 날 마라톤 풀코스가 없어지면서 달릴 대회가 없어 아쉬운 대로 이 대회에 나오게 되었다고 했다. 내게 이 대회 무료 참가권을 주었던 은수님도 시간을 내어 출전하면서 흑마늘즙과 연양갱을 주셨다. 수원샛별마라톤클럽의 명홍진님, 칠마회의 태현님, 용석님, 홍근님 등과도 만났다. 용구님에게도 인사를 드렸다.
바로 직전 마라톤대회와 마찬가지로 고운인선님, 죽음에서 살아돌아온 분과 함께 초반 레이스를 함께 했다. 뇌경색으로 연명할 때 한강에 몸을 던지려고 한 적도 있다고 했다. 마라톤이야말로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자신을 구한 운동이라고 했다. 마라톤에 임하는 자세가 이 분보다 진지한 주자가 있을까? 함께 달리며 대화가 늘어나는 만큼 받는 힘이 커졌다. 또한 이 분의 스마트폰 앱으로 페이스를 제대로 체크해 볼 수도 있었다. 킬로미터마다 페이스 멘트가 나오면 이 분은 내가 잘 들을 수 있게 스마트폰을 내 귀에 대어주었다. 5분 20초 언저리의 페이스는 쭉 이어졌다. 2킬로미터를 넘기도 전에 웃도리가 젖기 시작했다. 확실히 더워진 날씨였다. 더웠지만 우리는 3시간 45분 페이스메이커 바로 뒤에서 달릴 수 있었다. 3시간 45분 페메는 류성룡님이었다. 과거 박연익 페메만큼이나 내게 도움을 주었던. 따라가는 데 편안했다. 어깨 놀림과 골반의 움직임에 집중하면서 다리에 가는 부담을 줄이는 자세를 유지한 덕분이었다.
고운인선님은 그렇게 힘들다는 혹서기 과천마라톤에서 풀코스에 데뷔했고, 최고 기록은 3시간 14분대라고 했다. 류성룡 페메도 대화에 동참했다. 달리기 토크쇼가 되었다. 서로 아는 사람들 이야기부터 마라톤 일화를 쉴새없이 꺼내어 놓았다. 급기야 류성룡 페메는 마라톤 소재를 벗어나 메이저리그 강정호의 부진과 기아 타이거즈 선수단 운용에 대하여 불만까지 터뜨렸다. 안양천 둔덕에서는 근규형님이 나타나 큰소리로 부르기도 했다. 근규형님과 류성룡 페메는 동갑이라 서로 잘 알고 있었다.
가끔 몸이 무너지는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그럴 때마다 다리가 아픈 만큼 자세를 바로 잡고 다리는 그냥 따라갈 뿐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마라톤은 다리로 하는 운동이라기 보다는 몸 전체로 하는 운동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 앞으로 기울어지는 몸을 일으켜 세웠고 시선은 좀더 멀리 보았다. 처음에는 테이핑을 했다가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방해할 것같아 떼어버렸다. 10킬로미터는 54분이 넘었다. 3시간 47분대로 달렸을 때보다 1분이 더 늦어졌지만 기록에 대한 집착을 이미 일주일 전 버렸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지금이야 3시간 45분 페메와 가고 있지만 날씨는 점점 더워지는데다 몸은 힘들어질테니 4시간 페메와 가게 될 수도 있고, 그것도 어려우면 기꺼이 4시간을 넘겨 달리고자 했다.
17킬로미터 직전에 만나는 급수대를 먼저 이용하면서 3시간 45분 페메 앞에서 달리게 되었다. 내가 빠른 것은 아니었다. 매우 빠르게 가던 헬스지노님이 1회전을 마치기도 전에 더위에 지친 듯 현저하게 느려져 내 뒤로 왔다. 앞으로 나아가면서 파이팅을 보내었더니 받아주었다. 축구 스타킹을 신고 달리는 주자를 바짝 따라가게 되었는데 매우 낯익었다. 축구 스타킹을 신고 달리는 주자가 흔한 것도 아니니 지난 해 12월 초에 만났던 사람이 맞을 것이었다. 수원FC 유니폼을 입고 달리던 기억이 나서 수원에서 왔느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했다. 그럼 같은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그쪽에서 기억했다. 어디서 뵌 것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요. 시즌마감 마라톤이요. 강환(허)님이 맞았다. 그때 내 바로 뒤에 골인했던 주자. 오늘은 서브4를 목표로 한다고 했다. 여유가 있겠네요. 파이팅을 외치면서 이 분 앞으로 나아갔다. (이 분은 아쉽게도 4시간 01분으로 골인했다.)
2회전에 나서기 직전 1시간 54분이 지나 있었다. 3시간 48분대가 예상되는 스피드. 345 페메보다 앞에 있어서 빠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몇 십 미터 떨어진 페메는 언제라도 나를 따라잡을 느낌이었다. 류성룡 페메는 서브3 주자라 페메 임무 수행에는 전혀 무리가 없어 보였다. 실제로 류성룡 페메는 3시간 44분 53초로 달려 3시간 45분 페메의 임무를 잘 수행했다.
23킬로미터 쯤 달리고 나니 1회전 때만 해도 3시간 30분 페이스메이커 바로 뒤에 있던 은수님이 내 뒤로 오게 되었다. 25킬로미터 쯤 달렸을 때 13킬로미터 지점에서 만나 컨디션을 물어보았던 아세탈님을 다시 만났다. 매우 여유있게 운동하는 모습이었다. 내게 서브 345를 하라고 응원했는데 나는 부정적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345 페메가 바짝 따라와 나를 추월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이었다. 달리는 거리가 늘어날수록 다리로만 달리려는 못된 습관이 나오고 있었다. 바로 고쳤다. 상체를 세우고 팔놀림을 활발하게 했다. 공중에 몸을 띄웠을 때 발을 바꾸어주면서 발이 바닥을 치는 충격을 최소화시켰다. 덕분에 안양천이 시작되는 27킬로미터 지점에서는 페메와의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달리면 달릴수록 피곤해져서 마주하는 주자들에게 응원을 보내기도 힘들어졌지만 그래도 목소리 높여 응원했다. 한데 모여서 달리는 칠마회 어르신들을 만났을 때는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칠마회 파이팅'을 외쳤다. 광배님에게는 현재 순위가 5위임을 알려주기도 했다. 광배님은 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빠른 레이스를 이어나간 끝에 3시간 18분대로 골인했다. 제비한스님, 홍순진님, 이흥의님에게도 인사드렸다.
31.6킬로미터 지점에서 반환할 때 칩 인식 기계는 없었다. 심판이 나와 배번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었다. 바짝 따라오고 있었던 페메도 조금 떨어져 있었고, 달물영희님도 더위에 지친 듯 속도가 느려졌다. (달물영희님은 4시간을 넘겨 여자부 2위에 만족해야 했다.) 건너편에서 오는 홍순진 고문님은 밝은 표정으로 내게 341 파이팅이라고 했다. 내 페이스를 3시간 41분대로 계산해내어 좀 놀랐다. 좀더 힘차게 몸을 움직인다면 3시간 41분대도 가능했기 때문에......
더운 날씨와 따가운 햇빛 사이로 버드나무 꽃가루가 주로에 퍼져 있었다. 안양천부터 한강까지 꽃가루는 눈처럼 내리고 있었다. 눈에라도 들어올 까봐 손을 저으며 달리기도 했다. 선글라스를 낀 주자들이 부러웠다. 꽃가루가 입에 들어가 뱉어내는 일도 있었다. 그 바람에 안양천변을 수놓은 개망초를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다.
자세 바로잡기도 몸이 팔팔할 때나 먹히나 싶었다. 햄스트링 통증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자세 바로잡기를 선택했는데 초반에는 꽤 통했다. 그러나 이제는 지쳤고, 기온도 올랐다. 안양천과 한강의 뜨거운 햇살이 몸놀림을 방해했다. 3년 전 같은 대회에서 잘 달리다 한강을 만나 여지없이 무너졌던 일을 떠올리며 제발 좀 견디자고 이를 악물었다. 더울 때 힘든 것은 다 아는 사실이고, 풀코스를 아무리 많이 달려도 풀코스는 달릴 때마다 힘든 것도 이미 아는 사실이니 악착같이 버티기에 들어갔다. 풀코스 주자가 많은 것이 아니라 주로는 한산했다. 자전거가 더 많았다. 주로를 바꿀 때는 정말 조심했다.
올해 세운 3시간 44분 03초 기록을 깨뜨리고 3시간 43분대로 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그 생각을 지웠다. 집착하지 말자. 그냥 완주만 하자. 자꾸 기록에 부담을 주지 말자. 시계를 보지 말자.
내내 콜라 70%, 생수 20%, 포카리스웨트 10%를 섭취하며 급수대를 빠뜨린 적이 없는 만큼 수분 보충이 충분해서 마지막 급수대는 그냥 넘길까 했는데 너무 더워 그럴 수 없었다. 콜라와 생수를 모두 잡았다. 그리고 2킬로미터가 남았다. 걷고 싶었다. 단 몇 미터라도 걸으면 편해질 것이고 에너지가 바로 충전될 것같았다. 그러나 결코 걷지 않았다. 달렸다. 더울 때만큼 걷고 싶은 유혹이 큰 일은 없고, 그걸 이겨내는 것이 여름철 마라톤의 묘미라는 사실을 되새겼다.
마포대교 아래를 지나면서 바로 앞에 골인점이 보였다. 내 사진을 찍는 아세탈님도 보였다. 올해 최고 기록 달성이 가능했다. 사회보는 해병대정의님이 내 이름을 불러주며 완주를 축하해 주었다.
3:43:37.29
1회전 하프를 1시간 54분에 달린 내가 2회전 하프는 1시간 49분에 달린 덕분이었다. 간만에 후반에 빨라지는 레이스를 펼쳤다. 그렇다고 후반을 엄청나게 빨리 달린 것도 아니었다. 마지막 10킬로미터는 53분대로 달렸을 뿐인데......
운동을 마치고 골인 아치쪽에 있던 근규형님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더운데 이렇게 빨리 들어와. 대단하네. 거기에 해병대정의님도 요즘 정말 잘 뛴다고 했다. 이 말에 동의하기는 어려워 보이는데......
주로에서 시달린 만큼 내게는 수분섭취와 휴식이 필요했다. 그늘에 자리잡고 앉아 꽤 쉬면서 숨을 돌린 후에야 탈의실에 가서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하프를 완주하고 오래 기다려 준 아세탈님과는 엄니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다.
3시간 43분대 골인은 올해 들어 처음이었다. 올해 11번의 풀코스 가운데 최고 기록이었다.
3시간 43분대도 힘들었는데 점점 더워지니 3시간 39분대는 어려울 것이다.
탈의실에서 주자들이 다들 더워서 힘들었다고 했다. 앞으로 9월까지 눈 앞이 깜깜하다는 내 말에 옷을 갈아입던 분들이 웃었다.
아세탈님이 사진을 찍어주었다. 골인 직전 애를 쓰고 있다.
다 왔다.
뒷모습도 찍어주셨다.
아이 주려고 아예 90 사이즈를 선택했다.
땀 자국이 흥건한 배번
은수님이 주신 흑마늘과 연양갱
당초 공지한 이 코스와 달리 풀코스가 하프코스 2회 왕복으로 변경되었다.
정말이지 더워진 날씨 속에서는 원래 코스를 지켜주어야 했다.
아세탈님과 엄니식당에 갔다. 6일 전과 똑같은 메뉴로.....
3년 전 이 대회를 마치고 처음 엄니식당에 왔었다. 로운리맨님과 함께...
초반에 넉넉한 서브4 페이스로 가다가 후반에 전의를 상실하고 4시간 13분을 넘기고 말았던 바로 그 대회였다.
로운리맨님이 눈이 빠지게 기다리게 만들었던 대회......
달물영희님이 내게 선물을 내밀었다. 45리터 배낭.
배낭이 많다면서 내게 주면서 쓰라고 했다.
30리터 전후는 많았지만 40리터가 넘는 배낭은 처음이라 요긴하겠다. (감사합니다. 영희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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