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부쇼보 사전편집부에서 사전 만들기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의 노력과 열정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 사전 한 권을 만들기까지의 긴 세월과 난관. 그 극복의 과정을 담은 스토리.
<배를 엮다>
미우라 시온/ 권남희 옮김
도서출판 은행나무, 2013. 4. 10 1판 1쇄
"사전은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야."
아라키는 혼을 토로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사람은 사전이라는 배를 타고 어두운 바다 위에 떠오르는 작은 빛을 모으지. 더 어울리는 말로 누군가에게 정확히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만약 사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드넓고 망막한 바다를 앞에 두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거야."
"바다를 건너는 데 어울리는 배를 엮다. 그런 생각을 담아 아라키 씨와 내가 이름을 지었죠."
마쓰모토 선생이 조용히 말했다. 36
소설의 제목이 왜 <배를 엮다>가 되었는지 알려주는 대목이다.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자주 만나는 책으로 양장본이라 소장하고 싶은 책이긴 했다. 하지만 너무 비쌌다. 얄팍한 책이 무슨 9천원을 넘는지. 굳이 구입할 필요가 있는가? 언젠가 도서관에서 발견하면 빌려서 보도록 하지.
강북청소년문화정보도서관에서 책을 발견했다. 무조건 빌렸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여주와 원주에 다녀오면서 다 읽었다. (2013년 11월 23~24일)
마쓰모토, 아라키, 마지메, 기시베로 이어지는 사전 집필의 에피소드. 한 가지 일에 완전히 빠져 버린 전문인들의 삶과 그 디테일이 흥미진진하다. 무언가 이루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슴 뭉클함을 안기고, 새로운 직업의 세계를 통하여 여러가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직장인의 애환이 있고, 젊은이의 꿈과 사람이 있다. 나이든 이와 아직 젊은 사람간의 이해와 교유가 있다. 베스트셀러가 갖고 있기 마련인 장점을 가득 소유한 책이 <배를 엮다>이다.
이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마지메를 보는 눈은 아래와 같다.
책상 위에는 교정지인지 대량의 종이가 쌓여 있어 빈 공간이 거의 없다. 컴퓨터 조자도 차양처럼 내달린 자료 아래에서 불편한 듯이 몸을 움츠리고 있다. 책상 주변 바닥에는 책이 몇 겹으로 쌓여, 의자에 앉은 마지메의 모습을 감춰버릴 기세다. 요새나 동면 중인 짐승의 소굴같은 양상이었다. 197
그렇게 파고 드는 기세가 사전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하고도 13년이 걸리는 대작업. 끝이 보이지 않는 작업. 사전 편찬의 나날. 겐부쇼보의 지옥의 진보초 합숙. 표제어 하나의 상실과 누락 때문에 판본을 모조리 훑어야 하는 지극히 힘든 여정. 그러다 보니 마쓰모토 선생은 <대도해> 완서 한 달 전에 유명을 달리한다. 그는 유서를 남긴다.
당신(아라키)과 마지메씨같은 편집자를 만나서 정말로 기뻤습니다. 당신들 덕분에 내 생은 더할 수 없이 충실해졌습니다. 감사라는 말 이상의 말이 없는지, 저 세상이 있다면 저 세상에서 용례 채집을 할 생각입니다. <대도해>를 편찬하는 날들이 얼마나 즐거웠던지요. 여러분의 <대도해>의, 끝없이 행복한 항해를 기도합니다. 327
끝이 없어 보이는 작업도 하다 보면 마무리가 보인다. 멈추지 않으면 결국 닿는 법이다.
아무리 조금씩이어도 진행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빛이 보인다. 삼장법사가 멀리 천축까지 여행하여 갖고 돌아온 두꺼운 불경을 중국어로 옮기는 위업을 달성했듯이. 젠카이라는 스님이 30년 세월 동안 꾸준히 바위를 뚫어 터널을 만들었듯이. 사전도 역시 말이 축적된 책이라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친 불굴의 정신만이 진정한 희망을 초래한다는 걸 체현하는 서적이자, 사람의 에지의 결정이다. 317
지난 7월 대전에서 4만원이지만 중고할인가로 16,200원에 구입한 민중서림 <엣센스 국어사전>(제6판 전면 개정판)이 새로와 보인다. 3천쪽에 가까운 사전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마제마가 제지회사에게 요구했던 미끈거리는 손맛이 어떤 것일까 하고 가늠해 본다.
'펜이나 젓가락을 사용하는 손쪽'이라고 하면 왼손잡이인 사람을 무시하는 게 되고, '심장이 없는 쪽'이라고 해도 심장이 우측에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하더군요. '몸을 북으로 향했을 때 동쪽에 해당하는 쪽'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무난하지 않을까요? 26
소설의 설명을 보고 우리나라 국어사전도 찾아보았다. 우(右)-오른쪽-북쪽을 향했을 때의 동쪽과 같은 쪽. 그렇게 설명이 붙어 있다. 이런 것이구나. 사전을 만든다는 것이 편견이 있으면 안 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것. 만인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말이란 게 허망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사전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말에 대하여 철저한 신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말을 다루는 사전은 나올 수 없다. 더욱이 말은 그 의미를 바꾸면서 나이를 먹어가니 사전에 있어서 완결판이란 없다. 쉴새없이 용례를 확인하고 개정판을 준비해야 한다.
사전은 완성한 뒤부터가 진짜랍니다. 보다 정밀도와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출간 후에도 용례 채집에 힘써서 개정, 개판에 대비해야 합니다. 285(마쓰모토)
말을 믿는 자, 말을 믿게 된 자. 사전을 달리 보게 된다.
사전을 만들면서 말과 진심으로 마주서게 되고서야 나는 조금 달라진 느낌이 든다. 기시베는 그렇게 생각했다. 말이 갖는 힘. 상처 입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고 누군가에게 전하고 누군가와 이어지기 위한 힘을 자각하게 된 뒤로, 자신의 마음을 탐색하고 주위 사람의 기분과 생각을 주의깊게 헤아리려 애쓰게 된다. 258
말은, 말을 낳는 마음은 권위나 권력과는 전혀 무연한 자유로운 것입니다. 또 그래야 합니다. 자유로운 항해를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엮은 배. <대도해>가 그런 사전이 되도록 계속해서 마음을 다잡고 마무리해 나갑시다. 288
죽은 이와 이어지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과 이어지기 위해 사람은 말을 만들었다. 328
완결은 어렵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마음먹고 사전을 만들어 나가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배를 엮다>이다. 완결했다고? 13년만에 <대도해> 일본어 사전을 완결했다고? 그건 완결이 아니다. 수정을 전제한 임시 완결이었다. 사전은 진실한 의미에서 '완성'을 하지 못하는 서적이다.(133)
마지메군. 내일부터 바로 <대도해> 개정 작업 시작하자고. 329 (아라키)
사전의 사용자가 감수자, 원고집필자, 편집자의 작업에 참여한다. 지혜와 힘이 집약된다. 긴 세월에 걸쳐.
27세의 마지메가 40세기 되는 동안의 과정. 그 동안 결혼과 직장 생활, 사전 만들기. 단어 하나 하나의 의미를 따져서 단출하고 촌철살인의 설명을 다는 디테일이 매우 흥미롭다. 사이교(西行)의 설명이 달리는 과정(160~)은 주목해 볼만 하다.
진실하기만 한 주인공이 말을 통하여 어떻게 사랑을 얻고 직장에서 성취해 가는지 지켜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되겠다. 니시오카의 천방지축 행동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를 쓴 미우라 시온의 작품. 2012 일본서점 대상 수상작.
영화로 만들어져 2014년 2월 우리나라에서 개봉했을 때는 제목이 <행복한 사전>이었다. 잠깐 상영했을 때 대한극장으로 달려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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