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링 엄청납니다. 단편을 읽기 전에 이 글을 읽지 않았으면 합니다.
문학은 상상력의 소산 아니던가? 1F/B1로 된 표식을 보고 FBI를 떠올리고 1F와 B1 사이에 그어진 /를 보고 언제나 끼어 있는 '건물관리자'를 연상해낸다.
2007년 4월 14일부터 24시간 동안 고평시 네오타운을 장악하겠다는 비횬개발. 그 음모와 연결된 건물관리자 연합의 보스 구현성. 이들이 꾸미는 프로젝트. 특공직원이 정전된 네오타운에 침입하여 폭행, 강도, 파괴 행위를 저지르고 공포의 도가니를 만든다. 호되게 당한 거주민들은 하나둘씩 떠나갈 것이다. 그러면 유명무실한 건물들이 속출할 것이고, 비횬개발은 당초 계획한 대로 네오타운을 매입하여 80층짜리 초현대식 복합 상가를 구축할 것이다.
하지만 그 계획은 '암흑 속의 전투'를 벌인 홈세이프 빌딩 건물관리자 윤정우, 오데웅 빌딩 관리자 조천웅을 비롯한 건물관리자들의 활약으로 저지된다. 구현성은 자취를 감춘다. 일대 혼란이 야기된 이후 자동 시스템은 수동 방식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네오타운은 '암흑 속의 전투'를 기점으로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걷잡을 수 없이 낡아갔다. 어두운 관리실에 앉은 윤정우는 비밀 관리실로 통하는 공간을 열어놓은 뒤 바람을 맞는다. 이것이 김중혁의 '1F/B1'의 내용이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김중혁은 1F/B1의 표식을 보고 자신의 작품을 구상했으리라. 창작 노트에서도 보이지만 한 기호가 무한한 상상력의 보고가 된다. 나같이 더 들어가기를 꺼리는 사람은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세계이다.
기본 얼거리에 살이 붙으면서 작품은 빛나기 시작한다. 기발한 착상으로 읽는 내내 흥미에 사로잡힌다. 불과 몇 십쪽이 되지 않는 단편이지만 하나의 세계가 짧은 순간 내 앞에서 완전히 펼쳐졌다. 접힌 것같다. 윤정우가 통로를 통하여 맞는 바람이 내게도 불어오는 것같았다. 이야기 상대로는 적합하지 않은 조천웅을 만나면 어찌해야할지 걱정스럽고, 3부리그 축구선수라는 윤정우의 축구 실력을 확인해보고 싶기까지 하다. 구현성이 써서 40만부나 팔렸다는 <지하에서 옥상까지-건물관리 매뉴얼 1. 모든 건물은 마찬가지다>는 서점이나 도서관에 있을 것같은 느낌마저 든다. 모름지기 소설이란 이런 것이지. '삶의 조각'을 잘라내어 독자들에게 선사하는 것.
즐겁다. 그리고 무언가가 있다.
깨달음의 순간. 재미와 교훈. 맞다. 소설은 그런 것이다.
김중혁의 '1F/B1'이 그렇다.
2010 제1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중혁 외. 문학동네, 2010
※ 2010년 9월에 읽고 썼다.
'독서 애환(讀書哀歡)'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0) | 2017.10.18 |
---|---|
강영숙 <라이팅클럽(writing club)> (0) | 2017.10.01 |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0) | 2017.09.14 |
위화 <인생> (0) | 2017.09.07 |
고리오 영감을 기억하다 (0) | 2017.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