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레 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이동렬 옮김. 을유문화사 2010)을 완독하였다. 이전에 나는 <고리오 영감>을 읽었고 이번에 재독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온통 생경한 줄거리에 놀랐다. 단 한번도 읽은 적이 없는 작품같았다. 이럴 수도 있는가? 책을 빌릴 때만 하여도 명작이니 두 번 읽어도 좋을거야라는 마음을 가졌는데 불과 몇 쪽을 넘어가기 전에 이건 아니야라는 느낌에 휘둘렸다. 초독의 생소함이 읽는 내내 내 머리를 휘어감았고 책 곳곳 행간마다 포스트잇을 붙이기 바빴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책이었고, 새로운 책에 나오는 인물은 놀랍도록 경이로운 인간군상의 집합 속에 담겨 있었다. 고리오 영감이 제면업자 출신으로 돈을 한몫 모았지만 딸들을 위하여 죄다 갖다바치고 빈털터리가 되어 죽어간다는 내용은 <리어왕>의 모티프와 차이가 없어 보였다. 아버지의 고초나 희생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두 딸은 거너릴이나 리건과 다를 바 없었다. 아나스타지 드 레스토 백작부인과 델핀 드 뉘싱겐 남작부인. 하지만 고리오에게는 그를 돌봐줄 세째 딸이 없다. 리어왕은 돈 한푼 주지 않고 세째 딸 코델리아를 쫓아 냈지만 코델리아는 두 딸에게 버림받은 아버지를 돕기 위하여 애쓴다. 그런 딸이 고리오에게는 없다. 전혀 피붙이가 아닌 젊은 법학도 외젠 드 라스티냐크 정도가 자식보다 조금 나은 구실을 하고 있을 뿐이다.
시정(詩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비참한 공간같은 하숙집에서 21살 먹은 법대생 외젠 드 라스티냐크는 귀족 부인의 애인이 되어 출세의 가도를 달리고자 애쓴다. 부모에게, 심지어 여동생들에게까지 돈을 구걸하는 그의 소행은 괘씸스럽다. 그는 아나스타지 드 레스토 백작부인에게 접근하고, 델핀 드 뉘싱겐 남작부인에게도 다가간다. 밤새워 파티를 여는 사교계의 중심에 서고 싶어 안달이 난 외젠은 두 여성 가운데 아무라도 잡기 위해 애쓴다. 고리오 영감이 그들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는 고리오 영감과도 친분을 쌓는다. 서슴지 않고 어음을 발행하고 돈으로 여성의 마음을 사려고까지 한다. 하지만 하숙인 빅토린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의외이다. 공식적인 연인 관계는 델핀이지만 오빠가 결투로 희생되면서 한순간에 연수입 1만 5천 프랑, 모친의 유산 30만 프랑을 받게 된 빅토린에게 구애한다면 외젠의 경제 사정은 한 순간에 풀릴 수도 있엇다. 하지만 그는 귀족 부인의 수하에 놓이면서 돈을 모두 쓰게 되고 고리오 영감의 처연한 죽음까지 감당해야 하는 신세가 된다.
<고리오 영감>을 읽고 느낀 점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불쌍한 노인네, 리어왕처럼 버림받은 아버지. 허영심에 가득차 사교계의 화려한 생활만 꿈꾸는 비정한 딸들. 인간이 치졸한 모습과 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낱낱이 보여주는 것이 이 작품인가? 출세를 위하여 부정한 방법을 써서 연줄을 놓으려는 젊은이,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나 하는 데 대한 맹렬한 비난. 사람을 쉼없이 옥죄는 금전의 학대. 그에 대한 통렬한 고발. 무엇이라고 해도 좋다. 우리는 비틀린 사회상을 생생하게 목격하면서 우리 마음에 들어찬 비정한 동정심과 저열한 속물 근성에 대하여 반성한다. 그러나 현실은? 아비를 무시하고 결국 아비로서 자식에게 버림받는 처절한 행보를 따라갈 것 아닌가? 가족들의 웃음 소리를 듣고 행복해 보여서 망치를 들고 들어가 잔혹하게 살해했다는 전과자. 우리네 삶에도 무서운 얼룩들이 너무나 많이 발견된다. (2010년 9월 13일 기록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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