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구보(仇甫)씨는 시내를 하루 종일 떠돌아 다니면서 지인들을 만나고 낯선 사람들을 관찰하며 일일이 생활상을 기록한다. 어머니는 빨리 결혼하여 처자식 먹여 살리는 월급쟁이가 몇 갑절 낫다고 생각하며 자식이 글쓰는 일을 탐탁해 하지 않는다.
어디로 갈 것을 잊은 듯이, 그러할 필요가 없어진 듯이, 얼마 동안을, 구보는, 그곳에 가, 망연히 서 있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199)
20세기 한국소설 06 <이태준 박태원> 2005. 7
구보는 '구포'라고 잘못 불리고,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눈깔아저씨'라고도 불린다. 뚜렷한 목적지는 없이 쉼없이 떠돌고 있다. 소설가의 삶이 원래 그런 것인가 한다. 혼담 거론에 질색하고, 17세 정도되는 예쁜 딸이 있었으면 하는 그 언밸런스한 태도로 흔들리면서 집에 돌아갈 즈음에는 아래와 같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쩌면, 어머니가 이제 혼인 얘기를 꺼내더라도, 구보는 쉽게 어머니의 욕망을 물리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218
자칫 무력해지기 쉬운 다람쥐 체바퀴같은 삶에 진력이 날만도 한 것이다. 그게 소설가의 일일이니까.
단편이 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고민할 때가 많다. 그저 읽어 버리고 아무 기록을 남기지 않을 경우 나중에 남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한두번 경험한 것이 아니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읽었지만 사실 박태원의 소설이 처음은 아니었다. 몇 년 전 <천변풍경>을 읽었다. 그렇지만 <천변풍경>의 줄거리도, 등장인물도, 그 주제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왜? 독후감을 쓰지 않았으니까.
스무해 전에 읽었던 소설을 오히려 더 잘 기억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시간에 쫓기지 않고 곱씹어가며 소설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수시로 기록과 독후감 내지 서평을 썼으니 재생 작업을 꾸준히 하는 게 얼마나 오래 남는지 알 수 있다. 단편을 읽고 글을 쓸 때는 '인생의 단면(Slice of Life)'에서 얻는 깨달음을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인데, 독자가 찾아낸 깨우침이 영 유치하거나, 소설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찾기 어렵다면 억측이 난무하게 되고, 글을 쓰면서도 자신감이 없으니 진도가 나가지 않고, 진도가 나가더라도 속도감을 얻을 수 없다. 단편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재독하기는 부담스럽다. 그래도 앞뒤로 들추어보고 줄거리 정도는 정리해 보는 것이 좋겠다.
스물여섯살 소설가는 '밤낮으로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고, 혹은 공연스레 밤중까지 쏘다니고'(151)한다. 장가 가라는 어머니의 독촉에는 손사래를 친다. 천변길을 따라 광교로 걸어가며 격렬한 두통을 느낀다. 가까스로 자전거를 피하며 자신이 중이질환(中耳疾患)을 앓고 있다고 생각한다. 차후 전기보청기의 도움을 받게 될까봐 걱정도 한다. 구보는 종로 거리를 바라보고 걷는다. '대낮에도 자신을 가질 수 없는 자신의 시력을 저주한다.'(157) 전차 선로를 두번 횡단하여 화신상회 앞으로 간다. 화신상회에 머무르다 전차를 기다린다. 전차가 와도 멍하니 서 있다가 전차가 움직일 때가 되어서야 급히 뛰어오른다. 차는 동대문을 돌아 청량리를 거쳐 성북동으로 간다. 구보는 고독을 두려워한다. 전차 안에 있는 여자 승객을 주목한다. 여자와의 일을 떠올리며 벗의 누나를 사랑했던 일을 기억해낸다. 오후 두 시 다방이 등의자에 앉은 젊은이들의 우울과 고달픔을 헤아린다. 구보는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 여름 한낮의 뙤약볕에서 구보는 다시 걷는다. 신경쇠약, 변비, 요의빈삭(尿意頻數), 피로, 권태, 두통, 두중(頭重), 두압(頭壓)..... 구보는 건강을 해친 지 오래다. 살풍경하고 또 어수선한 태평통의 거리는 몸뿐 아니라 마음도 어둡게 한다. 옛 벗을 인사치레로 아는 체 하고 그저 걷는다. 남대문 밖으로 나가 경성역을 본다. 군중 속에서 그는 고독을 느낀다. 구보는 인간 본래의 온정을 찾을 수 없는 무리들 속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을 관찰한다. 노파를 보며 그의 삶이 어떨 것인가 헤아린다. 젊은 아낙네가 시멘트 바닥에 떨어뜨린 복숭아를 찾으려 분주하기도 했고, 개찰구 앞에 서 있는 두명이 사내를 보기도 했다. 한 사내의 애인인 듯한 여성을 살피며 그의 남자가 갖고 있을 재력을 탐내보기도 한다. 구보는 어느새 조선은행 앞에까지 와 있었다. 한 벗을 생각해내고 길가 양복점으로 들어가 전화를 빌려 벗을 다방으로 불러내었다. 다방에 앉은 소설가는 강아지를 살핀다. 신문사 사회부 기자인 벗이 왔다. 조선문학 건설에 열의를 갖고 있는 벗과 구보는 소설에 대하여 대화한다. <율리시스>를 논하는 벗을 앞에 놓고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다 헤어진다. 구보는 종로 네거리에 서서 노는 계집의 무리들을 본다. 종로 경찰서 앞을 지나 조그만 찻집에 들른다. 여자를 동반한 청년을 살핀다. 그리곤 후미진 좌석에 앉아 노트에 끄적거리고 있었다. 제법 시간이 흐른 뒤 찻집의 주인과 만나 대창옥으로 가서 설렁탕을 먹는다. 한길 위에 우두커니 선다. '좁은 서울이었다.'(195) 광화문통에 이르렀다. 가엾은 여자의 뒷모양을 보았다. 술주정꾼 두 명은 어깨동무를 하고 수심가를 불렀다. 각모 쓴 학생과 젊은 여자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구보 앞을 지나갔다.
박태원이 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그 최초의 착상은 <율리시스>이었을 것이다. 블룸스데이(Bloom's Day)라고 불리게 된 6월 16일. 그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기록한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그 소설을 통하여 착상을 얻은 뒤 소설을 썼을 것이다. 서울 시내를 돌면서 천태만상을 살피고 인간군상을 낱낱이 기록하는 일, 그런 일을 한 것이다. 하루 일과를 시시콜콜 다 적어내는 이에 무슨 큰 사건이 있을 수 없다. 하정우, 전도연 주연의 영화 <멋진 하루>처럼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고괴담 2>처럼 하루에 자살과 집단 공포가 들어차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을 건드리지 못하고 그저 지켜 보고 이야기의 소재 거리 정도나 구하는 나약한 소설가의 일일을 통하여 그저 평범한 하루를 나열한 데 지나지 않는다.
종로와 광화문, 남대문과 서울역 일대를 떠돌며 다방을 전전하고, 사람들을 보며 온갖 상상으로 머리를 채우는 게 소설가의 일일이었다. 그저 그렇기만 한 삶을 조금 바꾸어 볼까 하는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결혼하여 처자식을 건사할 소망이 슬며시 보인다. 그럴 경우 소설가의 일일은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아침에 나가 밤늦도록 돌아다니며 관찰하고 상상하며 따지는 일을 꾸준히 할 것이다. '소설가의 구보씨의 일일'은 그렇게 곱씹어 보는 일상사가 한없이 계속될 수도 있음을 알린다. (2010년 12월 9일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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