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애환(讀書哀歡)

그 겨울 그리고 가을-나의 1951년

HoonzK 2017. 3. 10. 01:37

<그 겨울 그리고 가을-나의 1951년>
유종호 (주) 현대문학, 2009

 

한국전쟁. 1951년 1.4후퇴 피난길. 마을 어귀마다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우리 동네엔 전염병이 돌고 있습니다.
이 마을엔 돌림병이 들었습니다. 피란민 사절.

 

 설마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을까? 엄동설한에 돌림병이 가당키나 할까? 평온한 우리 동네에 딴 지방 사람들이 들어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견딜 수 없다는 뜻이지.


 1.4 후퇴 때 광목천 배낭을 메고 수안보와 연풍을 잇는 국도 근방의 집을 떠나 피난 나온 6인 가족. 옥천군 청산 못미쳐 원남면에 똬리를 틀고 난을 피했다. 한참 학업에 매진해야 할 고등학생 신분의 주인공은 청주중학교에 주둔한 미해병대 노동 사무소를 찾아가 절규했다.

 

 Hello, I want to work.

 

 최하위 말단 고용인으로 오일 스토브 청소같은 허드렛일을 하며 밥벌이를 하는 17세 청소년. MILKY WAY 초콜릿에 사로잡히기 보다는 영어를 더 잘하고 싶고 책을 더 읽고 싶은 159센티미터의 사내 아이로 전시의 인생 살이를 배운다. 제 이익을 채우기 위해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을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일하며 버티기를 하는 이 학생. 1951년을 죄다 미군부대에서 보내고 9월 중순에야 학교로 돌아간다.

 

 깟댐과 싸나마베치. God damn, Son of a bitch. 미군들이 입에 붙이고 사는 욕찌거리를 평상어처럼 듣고, 레이션 박스에 들어 있는 콘돔을 보며 전시 미군부대 주변을 맴돌기 마련인 양공주가 어린 나이에도 낯설지 않다. 장대같이 큰 미친개라는 별명의 일병에게 억울하게 두들겨 맞는가 하면, 돈버는 데 혈안이 된 어른들의 꾐에 그저 이용되기만 한다. 전투 장면이 꼭 나와야 전시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유종호의 <그 겨울 그리고 가을-나의 1951년>을 읽으면서 느낀다. 전쟁 장면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지만 전쟁 영화라고 할 수 있었던 <아름다운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같지만 한국 전쟁의 공통 경험과 맞물려 공감을 준다. 글쓰기란 모름지기 사람들 사이에서 동떨어진 너스레나 넋두리가 아니니 그럴 것이다.

 

 1.4 후퇴 때부터 그 해 가을까지 문학평론가 유종호가 경험한 전시체험이 여기 담겼다. 고등학생이었던 이 문학인은 6.25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살아야 했던 1951년을 글로 남겼다.

 

 많은 것을 기억하는 쪽이 약자이며 강자는 결코 기억하지 않는다는 깨우침이 섬광처럼 머리를 스쳤다. 많은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많이 상처받았다는 것이고 많이 아팠다는 것이다. 삶의 강제가 안겨준 아픔의 흉터가 아니라면 기억이란 대체 무엇인가? 생존이란 본원적 치욕의 그때그때 상흔이 바로 기억이 아닌가? 기억은 상처입은 자존심이고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내적 독백이다. 용서되지 않는 것이 주제이건 타자이건 우리를 飜弄하는 우연과 필연의 거역할 길 없이 막강한 힘이건. 그러니 기억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다. 116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발견되는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자는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마련이다."(조지 산타야나)라는 문구처럼 한국전쟁 시기 청소년을 살았던 사람은 기억을 그대로 묻어 버릴 수는 없었나 보다.

 

 청주 소재 미해병대 노동사무소에서 재니터로 일해야 했던 필자는 평시라면 열심히 학업에 매진했어야 할 나이였다. 일하는 신분. 적응이 힘들었을 것이나 사람이란 난경에 적응하게 되어 있어 우선 큰 일만 일어나지 않으면 이럭저럭 견디어가게 마련(243)이지만 결국 적응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상 적응 안 되는 상태에 익숙해진다는 것일 뿐 진정한 적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My happiness has a sad face,, so sad that for years I took if for my unhappiness and drove it away. 나의 행복은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 너무 슬퍼 보여 오랫동안 불행으로 오해하고 내몰았다. (아이리스 머독 <그물을 헤치고>)

 

 삶을 보는 시각에 따라 삶은 색깔을 달리 할 것이다. 자기 이야기를 소설처럼 써보는 일도 값질 것이다. 시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담아낸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같다. 청소년이 각박한 세상에서 야비한 어른들과 만나 서서히 어른이 되어가는 되어가는 스토리는 1951년이나 현재나 상호 공감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2012.9)

 

 

 

 

목차

1. 북풍한설 찬바람에
2. 내가 받은 첫 새경
3. 은하수 밀크초콜릿
4. 4월의 올드 랭 사인
5. 담요 한 장 짊어지고
6. 부칠 곳 없는 편지
7. 중앙선 간현역 부근
8. 밥집의 공포
9. 여름밤의 산술
10. 마법의 손거울
11. 가을 목숨 시름시림
12. 세월이 간 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