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애환(讀書哀歡)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HoonzK 2017. 3. 5. 03:31

※스포일러 있습니다.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한미희 옮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2013. 6. 7 1판 2쇄



 예나 지금이나 학자들이 새 술부대에 신경을 쓰느라 오래된 포도주를 버리고 만다면, 예술가들은 종종 외적인 잘못을 태평스레 고집하지만 많은 이에게 위로와 기쁨을 준다. 그것은 단순하게 비교할 수 없는 비평과 창작, 학문과 예술의 오랜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전자는 항상 옳지만 어떤 이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반면 후자는 언제나 영원에 대한 예감과 믿음과 사랑과 위로와 아름다움의 씨앗을 뿌리고, 계속 좋은 밭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삶은 죽음보다 강하고, 믿음은 의심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51



 교사의 의무와 국가가 교사에게 맡긴 직무는 소년들의 거친 힘과 자연의 욕망을 제거해 뿌리부터 송두리째 뽑아버리고, 그 대신 국가가 인정하는 차분하고 절도 있는 이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학교의 그러한 노력이 없었더라면 지금 행복한 시민과 성실한 관리가 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걷잡을 수 없는 격렬한 개혁가, 쓸데없는 공상이나 하는 몽상가가 되었겠는가! 소년의 내면에는 거칠고 무질서하고 세련되지 못한 어떤 것이 있다. 교사는 우선 그것을 깨뜨리고, 위험한 불꽃은 끄고 밟아버려야 한다. 자연이 창조한 그대로의 인간은 예측할 수 없고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으며 위험한 존재이다. 그는 미지의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강이며, 길도 질서도 없는 울창한 원시림이다. 나무를 솎아서 베고 정리해 원시림을 강제로 억제해야 하듯이 학교도 자연 그대로의 인간을 깨뜨리고 정복하고 강제로 억제해야 한다. 학교의 사명은 정부가 인가한 원칙에 따라 자연 그대로의 인간을 사회의 유용한 일원으로 만들고, 병영의 세심한 훈련을 통해 마무리되고 완성되는 특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59



 왜 제목이 <수레바퀴 아래서>일까 궁금했다. 바닥에서 뒹굴며 세상을 등지고 숨어 있는 존재의 이야기같은 것일까? 일견 맞는 것같기는 하다. 100쪽을 넘어갔을 때 딱 한 번 언급되는 '수레'. 교장선생님의 말씀.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약속해 주겠나? ..... 친구, 아무튼 지치면 안 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고 말테니까. 119


 한 촉망받는 소년의 몰락을 그린 소설이다. '햇볕에 탄 가느다란 목 위에 예쁜 머리가 자유로우면서도 우아하게 놓여 있고, 얼굴은 이지적이었으며 눈에서는 정신적인 우월함이 엿보이는'(47) 한스 기벤라트는 우수한 성적으로 마을브론 신학교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하지만 동급생 힌딩거의 죽음을 경험하고 시를 쓰는 헤르만 하일너와 친해지면서 학업과는 담을 쌓게 된다. 신학교의 우등생은 급격하게 열등생으로 전락한 끝에 학교를 떠난다. 기술직을 찾게 된 한스는 에마라는 소녀와의 썸타기도 실패하고 물에 빠져 죽는 수순을 밟게 된다.


 한스. 이건 죄악이야. 네 나이 때는 바깥 공기를 많이 마시고 많이 움직이고 제대로 쉬어야 해. 대체 방학은 뭐 때문에 있는 거냐? 방 안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고. 너는 정말 뼈와 가죽뿐이로구나. 65 (구둣방 주인 플라이크)


 다른 길을 열어줄 수도 있었던 소년에게 강요된 한 가지 일만 보여주었던 것인가. 여러가지 가능성을 갖고 있던, 그런 어린 소년을 파멸로 안내한 듯한 느낌의 분위기.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내내 느끼는 감정이다. 불과 2백여쪽밖에 되지 않는 소설에서 한 인물의 인생을 충분히 보고도 남음이 있다. (2014. 9. 24)




내가 읽은 문학동네판



민음사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