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 가서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면 어차피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것.
그래서 생각했다. 날밤 새고도 풀코스를 달리는 데 무리가 없는 체력을 만드는 것을.
그것도 무난히 SUB-4를 달성하는 데 무리가 없도록 하는 것을.
이번 대회가 그 시험무대가 되었다.
경주에 낮차 타고 내려가 숙소 잡고 일단 편안히 누울 수 있으면 좋을텐데.
그리고 나서 풀코스를 달리면 참 좋겠네.
그런 것을 떠올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시간과 경비를 고려하여 밤 12시 차를 탔다.
강남이 아닌 동서울에서 탔다. 만 원 정도 저렴한 교통비이니.
네 시간 걸린다는 차가 3시간 40분만에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 닿았다.
눈만 감고 있었던 3시간 40분이었다. 선산휴게소에 들렀을 때는 화장실 갔다 오고 기사가 소등할 때까지 책을 읽었다.
도착하자마자 늘 먹던 식당에서 돼지국밥을 먹었다. 내부 인테리어 수리하고 가격을 올렸다. 2013년 10월 경주국제마라톤 때보다 1천원 더 올랐다.
새벽 4시의 돼지국밥. 잘 먹고 나왔다.
그리고 가까운 PC방에 앉아 있었다.
눈을 감지 않고 인터넷 창 열고 한글 문서 살피며 부지런히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다가 새벽 5시 반에 나왔다.
주인은 왜 벌써 나가냐고 물었다. 지금 셔틀버스 탈 사람들 여러 명이 PC방에 앉아 졸고 있는데 좀 여유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아! 마라톤 대회 참가자들이 나처럼 PC방에서 시간을 보내는구나.
길게 설명할 것없이 뭐 좀 먹어야지요라고 했다.
안동에 가야 할 일이 있어서 짐이 많았다. 고속버스터미널 물품보관함에 일부 짐을 넣고 셔틀버스를 탔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단지에 도착한 것이 6시 30분.
빨리 도착한 덕분에 여유가 많았다.
봄날씨치고는 쌀쌀하였다. 반팔을 입었다가 긴팔로 바꾸어 입었다.
오래 기다렸지만 출발 시간은 점점 가까워졌다.
벚꽃 만발한 대회장을 출발한 것이 8시.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겼다. 4시간 페이스메이커가 삽시간에 백 미터 이상 차이를 내 버렸다. 2킬로미터를 가는 데 12분 30초나 걸렸다.
보문호 둘레에 심어진 나무가 죄다 벚나무인 것을 4월에 경주에 와서야 알았다. 어떻게 벚꽃 만개일에 맞추어 대회날짜를 잡을 수 있었을까? 고개를 살짝만 들어도 하얀 벚꽃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어느 정도 만개 시기를 지났을 때 바닥에 깔리는 벚꽃 잎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벚꽃은 나무 위에서만 존재했다. 나무 아래는 그늘만 있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온 달림이들은 달리기보다는 벚꽃 구경과 촬영이 우선인 듯 달리다가 수시로 발걸음을 멈추고 셔터를 눌러 대었다. 잠을 자지 못한 나로서는 풍성한 벚꽃을 보니 마치 환상에 빠진 것같은 착각이 들었다. 보문호를 오른편에 끼고 내려가다 보니 스피드가 조금씩 오르고 있었다. 5킬로미터를 28분 12초에 통과하였다. SUB-4 기준이 5킬로미터 28분 20초이니 여유가 생겼다. 6킬로미터 지점을 지나면서 4시간 페이스메이커도 따라잡았다. 8킬로미터 지점 대릉원 지나며 만난 큰 화장실. 일단 들어갔다 나왔다.
10킬로미터 지점 통과. 페메는 여유있다고 말했다. 내 기록은 55분 40초 정도.
중앙시장 방향으로 달릴 때에는 4시간 페이스메이커 앞으로 나아갔다. 오토바이 한 대가 한 여성을 따라잡으며 취재를 하고 있었는데 그 부대를 따라갔다. 흰색 티셔츠 입은 남성 둘이 호위무사처럼 가녀린 여성을 보호하고 있었다. 하늘하늘한 느낌을 주는 몸매에 새하얀 얼굴을 한 여자는 일본 연예인같았다. 연예인의 풀코스 도전 장면을 취재하기 위하여 일본에서 건너온 VJ. 그런 거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여성, 아주 잘 달린다. 힘든 기색이라곤 하나도 없이 자세도 흐트러짐없이 주로를 갖고 노는 느낌을 준다. 저 여성을 따라서 뛰면 SUB-4는 무난히 하겠군. 그래서 계속 따라갔다. 30킬로미터를 넘게 달려도 100미터 이상 떨어진 거리를 줄이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의 페이스메이커로 삼았다.
보문호를 빠져나가면서 추억을 되새기는 달리기가 되었다. 북군동 펜션마을, 알천축구장, 분황사, 오릉, 대릉원.... 전부 벚꽃으로 뒤덮였다. 일본 요미우리 신문사에서 이 대회를 주최하고 있을까? 혹시 일본 국가의 상징인 벚꽃 때문에..... 혹시 이 벚꽃은 일제강점기에 다 심어진 것일까? 그런 생각도 했지만 일단 눈은 즐거웠다. 이렇게 많은 벚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벚꽃 속에서 헤엄친다는 느낌 속에서 피로를 잊었다.
형산강변을 달리며 만난 반환점. 19.332킬로미터 지점.
그리고 21킬로미터. 1시간 56분이 걸렸으니 하프는 1시간 57분이 조금 넘었을 것이다.
이대로 후반에도 밀고 나간다면 3시간 54분에서 55분의 기록으로 완주할 것같았다.
아직 일본 여자 연예인을 따라 잡지는 못하고 있지만.
건너편에서 휠체어를 탄 동료를 밀고 오는 사람이 있어 응원을 보내었다. 대단하십니다.
응원해주는 자원봉사 여학생들에게는 소리쳤다. 예쁘다.
하지만 후반부로 들어갈수록 걱정이 커졌다. 물품보관함에 짐을 넣으면서 스포츠겔까지 넣어버렸고, 스포츠겔 없이 계속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1천 명이 넘게 풀코스를 달리고 있으니 바닥에 떨어진 스포츠겔이 있지 않을까, 혹시 주최측에서 급수대에서 스포츠겔을 제공하지 않을까 했지만 뜻한대로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그냥 급수대에서 제공하는 바나나, 쵸코파이에 의존해야 했다. 한 입 베어먹고 버리던 쵸코파이를 남김없이 다 먹기까지 했다. 미리미리 에너지 보충을 위하여.
26킬로미터 지점에서 소변을 한번 더 보았다. 잠을 못 자면 소변을 자주 보게 된다.
화장실 가느라 추월을 허용했던 주자는 몇 백 미터 가기 전에 따라잡았다.
7부 바지 입고 달리는 마른 체형, 초로에 든 일본인 주자와 경쟁이 붙었는데 한동안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30킬로미터 지점 2시간 46분 통과. 일본인 주자는 32킬로미터 지날 무렵 알천교를 건너면서 내 앞으로 쭉쭉 치고 나가 몇 백 미터쯤 거리 차이를 내었다. 나 역시 내내 기준으로 삼았던 일본 여자 연예인과 촬영 오토바이를 알천교를 건너기 직전 추월하였다. 32킬로미터 통과 기록이 2시간 57분 30초 정도되었기 때문에 10.195킬로미터를 62분 30초에 달려도 SUB-4가 가능해졌다. 그런데 내 마음에 부정적인 사고를 심어주는 게 덜컥 나타났다. 스포츠겔의 결여. 스포츠겔을 먹지 못했단 말이야. 스포츠겔은 신체적 충전뿐만 아니라 심리적 충전까지 해 주는 음식이었다. 그게 없으니 지속적으로 비관적인 생각이 침투했다. 어떡하지? 후반에 쳐질 수도 있어. 경주벚꽃마라톤 골인 직전의 오르막은 상당히 힘들다고 하던데. 겁이 났다. 지난 해 5월 의령에서 당했던 일을 경주에서 당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너무 오랜만에 풀코스를 달린다는 것도 부담이었다. 한 달 만에 풀코스를 달리다 보니 거리 감각도 많이 사라져 있었다. 3월 25일쯤 풀코스를 달려 주었어야 했는데...... 날씨는 더워졌다. 긴팔 입은 것을 후회했다. 초반 2킬로미터를 지나 팔소매를 걷은 후 내린 일이 없었다. 처음부터 반팔을 입고 달렸어야 해.
왼편으로 북군동 펜션마을. 오른편에 보문호. 아주 무시무시한 오르막이다. 거대하고 길다.
35킬로미터를 지난 후 맞이하는 오르막이라니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주변 주자들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이 순간 나는 5년 전을 기억해 내었다.
5년 전 여름 경주 북군동 펜션마을에서 숙박할 때 조깅한 적이 있던 구간이라는 것. 그때 힘들었지. 하지만 이겨내었지.
그러니까 이 코스는 초행길이 아니야. 한번 경험한 적이 있는 코스라고.
이렇게 되뇌이자 힘이 났다. 쭉쭉 치고 나가 여러 명을 뒤로 보내었다.
오르막을 넘고 나자 다시 한번의 오르막이 있었다.
그것도 이겨내었다. 초로의 일본인을 거기에서 제쳤다.
39킬로미터 지점. 이후 질주에 질주를 거듭했다.
39.2킬로미터 지점에 패드가 있어서 달리고 난 후 내 기록을 분석해 볼 수 있었다.
잔여 3킬로미터를 13분대에 달린 것으로 나왔다. 출발할 때 3킬로미터 지점까지 17분대로 달린 것과 비교해 볼 때 정말 열심히 스퍼트한 것이다.
SUB-4에 성공하며 골인하였다.
3:52:43
| ||||||||||||||
![]() |
'도전! 마라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2회 호남국제마라톤(2015/04/19)-FULL (0) | 2015.04.23 |
---|---|
남북어린이돕기 마라톤대회(2015/04/12)-FULL (0) | 2015.04.15 |
성우하이텍배 제13회 KNN환경마라톤(2015/03/22)-HALF (0) | 2015.03.25 |
서울챌린지10K(2015/03/15)-10KM (0) | 2015.03.18 |
제7회 섬진강 꽃길마라톤대회(2015/03/08)-FULL (0) | 2015.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