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 미디어관 4층 KU 시네마트랩에서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를 다시 보았다.
1999년 국내 개봉 당시 140만 동원. 당시 일본 영화 최고 기록이었다.
영화관에서 보지는 못했다.
첫사랑 영화를 혼자 가서 본다는 것을 생각도 못했으니까.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서 보았던 게 2000년.
반납하기 직전까지 밤새어 계속 돌려 보았던 것을 기억한다.
2001년에는 일본어 자막 비디오 테이프까지 샀다.
(그 덕분인지 이번에 영화 볼 때 거의 한국어 자막이 필요없을 정도로 일본어가 귀에 잘 들어왔다)
2003년 1월에는 영화의 배경이었던 홋카이도의 오타루(小樽)까지 찾아갔었다.(가족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른다. 아직까지도)
마르셀 푸르스트의 그 난해한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까지 읽었고, 모교 평생교육원을 찾아가 일본어 강좌까지 들었다.
소피 마르소 때문에 프랑스어 공부 열심히 했던 것과 같은 것이겠지.
홋카이도 삿포로시 외곽의 소도시 오타루.
어마어마한 눈이 쌓인 동네를 헤집고 다니며 <러브레터>의 흔적을 찾았던 일은 아직도 생생하다.
자전거 페달을 돌려 자전거 전조등으로 영어 시험지를 맞추어 보는 장면이나 대출하지 않는 책을 찾아 도서카드 맨 위 칸에 이름을 적는 장면, 빙판을 썰매타듯 신발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소녀의 모습과 '오겡끼데스카?'를 외치는 여배우의 모습.
감기와 눈, 책과 편지. 추억을 구성하는 강력한 이미지.
마지막 장면의 여운은 강렬하고 또 강렬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도서카드를 뒤집는 순간 나타난 여주인공의 학생 시절 모습.
'후지이 이츠키(藤井 樹)'라는 같은 이름의 남학생이 내내 도서카드에 적은 것은 자신의 이름이 아니었다.
자신과 같은 이름의 여학생을 내내 연모하며 적은 이름이었고, 그녀의 얼굴까지 그려 놓았던 것.
남학생이 전학가기 전 대신 반납해 달라고 내밀었던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여학생은 도서카드 앞면만 보고 뒷면은 보지 않았다.
무지 쿨한 스타일의 남학생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서카드 뒤에 여학생의 얼굴을 그려 최대의 고백을 한 것이었다.
여주인공이 도서카드의 뒷면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는 것은 어른이 된 이후, 남학생은 죽은 지 몇 년이 지나서이다.
하지만 그림을 발견한 순간 자신이 편지를 통하여 더듬었던 남학생과의 추억이 첫사랑이었음을 알게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은 것이다.
과거는 과거로 묻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꿈틀대며 현재를 움직인다.
경이적인 순간이 찾아오는 순간 엔딩크래딧이 올라간다.
KU 시네마트랩은 자막이 끝날 때까지 불을 켜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여운은 더욱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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