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새해 벽두를 마라톤으로 열었다. 2014년, 2015년 내리 일출을 보면서 풀코스 출발을 준비했지만 올해는 구름이 잔뜩 끼어 63빌딩쪽에서 해가 뜨는 광경을 놓쳤다. 풀이 아닌 하프이다 보니 심적 부담도 많이 줄었다. 지난 일요일 하프와는 엄청나게 달랐다. 4시간밖에 자지 못했지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밤새 허덕이던 때에 비하면 컨디션이 좋아졌던 것이다. 대회장에 도착한 것은 아직 7시가 되기 전. 주변은 깜깜했다. 아직 야심한 밤같은 분위기 속에서 배번과 기념품을 받았다. 2001번. 하프 주자 가운데 가장 빠른 배번이었다.
왕복 1.5킬로미터 떨어진 화장실에 다녀온 뒤 물품을 보관하고 출발선에 섰다. 상기님, 용구님과 인사를 나누었다. 1등을 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해 보이는 찬일님이 먼저 악수를 청하며 새해복많이 받으라고 했다. 1926년생 91세의 할머니가 출발선에 모습을 보였는데 아무리 봐도 60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아 너무 놀랐다.
출발할 때 알았다. 닷새 정도 공황 상태에 있었지만 그 정신적 스트레스마저도 시간이 지나니 둔감해진다는 사실을. 지금은 달리는 데 정신을 쏟을 때였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야 한다.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 자체를 잊자. 티셔츠 두 장 걸치고, 버프로 머리와 귀를 감싸고, 츄리닝으로 다리의 추위를 막았다. 츄리닝의 저항 때문에 점점 힘들어지리라. 어차피 기온이 올라가면 츄리닝을 벗고 달리면 좋겠다는 생각은 계속 하리라.
맨 앞줄에서 출발하였다. 10킬로미터 주자 한 명이 빛의 속도로 날아가고, 풀코스 1등 주자인 찬일님이 비호처럼 내달리고, 1시간 20분대 주자인 상기님도 쭉 치고 나갔다. 몇 백미터 가지 않아 내 앞으로 추월해 나가는 주자가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1킬로미터를 4분 50초에 통과했다. 이 무슨 일이지? 찬 바람이 살살 부는데 살갗이 시린 느낌이 이어졌다. 일출을 보러 나온 인파는 한강변으로 줄줄이 이어졌다. 해가 구름에 가렸는데 아쉽겠네. 킬로미터마다 기록을 체크하며 나아갔다. 지난 하프에 비하면 너무 달라진 모습으로 달리고 있었다. 바람이 숭숭 통하는 상의 때문에 춥기는 했지만 손이 시렵거나 하지는 않았다. 3킬로미터부터 6킬로미터까지, 즉, 양화대교에서 안양천을 만나는 지점까지는 다른 사람을 추월하는 레이스로 채워졌다. 5킬로미터를 23분대 후반에 통과하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안양천변을 달리면서 맞바람을 받으며 몇 명의 주자와 뒤섞였다. 형광색 티셔츠를 입은 풀코스 주자가 나를 제쳤다. 나보다 덩치가 큰 외국인 주자는 내가 제쳤는데 8킬로미터 지점 물을 마시는 사이 나를 제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10킬로미터를 46분대 초반에 통과하였다. 근래 보기 드문 스피드였다. 1시간 39분대가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10킬로미터 지점에 급수대는 없었다. 하프 반환점에 급수대가 있었다. 물을 마시고도 49분 초반에 반환한 후 외국인 주자 앞으로 나아갔다. 그 이후 누군가 내 앞으로 치고 나와 내 페이스메이커가 되어주길 바랬지만 아무도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골인할 때까지 풀코스 주자나 하프 주자와 마주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외롭게 달린다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새해 첫날 주로에서 혈혈단신. 보기 좋은 그림은 아니다. 도무지 페이스 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14킬로미터를 넘기기 전까지 시계를 보지 않았다. 7킬로미터 남았을 때 시계를 보니 1시간 5분이 넘고 있었다. 남은 거리를 킬로미터당 5분 페이스로 갔다가는 1시간 40분을 아슬아슬하게 넘는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왕이면 새해 첫날 마라톤을 1시간 30분대로 달릴 수 있다면 좋으리라. 조금 더 분발하자. 한강 주로로 들어서면 바람이 밀어줄 거야. 그리고 15킬로미터 지점부터는 질주하는 패턴이 있으니 어렵지 않을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한강을 만나 우회전하였다. 이런! 맞바람이다! 뒤에서 바람이 밀어주리라 기대했건만. 두 가지 적과 싸워야 했다. 맞바람과 츄리닝 긴 바지. 다행히 6킬로미터 남았을 때 킬로미터당 5분 페이스로 달려도 1시간 39분대가 가능해졌다. 페이스가 떨어지지 않는 한 1월 하프 최고 기록 경신은 무난하였다. 1월에는 하프를 1시간 30분대에 달려본 일이 한번도 없으니까. 지난 일주일 동안 깊은 시름에 빠지면서 야식을 끊었다. 밥도 배불리 먹은 적이 없었다. 회식은 두 차례나 있었지만 뱃속을 가득 채우지는 않았다. 최소한 2킬로그램 정도는 빠졌을 것이다. 역시 체중 감량은 스피드를 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 2킬로미터 남았을 때 달린 지 1시간 28분이 지났다. 6분 페이스로 속도를 늦추어도 1시간 39분이 가능해졌다. 새해 첫날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인정사정없이 달렸다.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골인 아치에서 주자를 기다리며 기록 체크도 하고 멘트를 해 주시는 해병대 정의님은 내가 풀코스 주자인 줄 알고 있었다. 최근에 주로에서 만나면 늘 나는 풀코스를 달리고 있었으니까.
바로 기록증을 받으러 갔다. 1시간 36분 43초였다. 이렇게까지 달리다니 나 자신도 놀랐다. 도대체 지난 주 1시간 48분대 주자가 이럴 수 있는가? 기록증 옆에 하프 3위 상장도 따라왔다. 도자기 달력 접시도 입상 선물로 왔다. 탈의실에 갔더니 하프 1등과 2등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상기님은 2등이었다. 상기님과 함께 떡국을 먹고 지하철을 함께 타고 왔다. 이틀 뒤 뚝섬에서 풀코스로 다시 만나리라. 상기님은 오늘 늦추어 달리신 만큼 빨리 달리실테고, 나는 빨리 달린 만큼 늦추어 달릴 것이다. SUB-4만 하리라. 77번째 SU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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