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연극배우이자 작가인 아이딘(할룩 빌기너)은 돌산 비탈에 세운 호텔 오셀로를 운영하며 아내 니할(멜리사 소젠), 이혼한 여동생 네즐라와 함께 살고 있다. 불안할 만큼 젊고 예쁜 아내, 매주 기고해야 하는 신문 칼럼, 집세를 안 내는 세입자들 말고는 근심이 없다. 어느 날 가난한 세입자의 아들이 아이딘의 차를 향해 돌을 던지고 유리창이 박살 나면서 이 부유한 중년 남자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린다. 안온한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내 왕국이 작을지라도 내가 왕이잖아"라는 대사처럼 그는 거만하고 냉소적이다. 돌을 던진 아이와 그의 주정뱅이 아버지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도 대수롭지 않게 행동한다. 뒤로는 사람을 써 빚을 갚으라고 독촉한다. 나쁜 행동을 묵인하면 악인도 양심이 동요돼 선해진다는 '레 미제라블' 속 질문을 놓고 진지한 찬반 논쟁도 벌어진다. 인생의 절정을 낭비하고 있다고 여기는 니할은 아이딘을 증오하면서 몰래 불우이웃을 돕는다.
호텔 오셀로는 대자연의 일부인 동굴을 닮아 있다. 셰익스피어 비극 '오셀로'에서 차돌 같은 주인공이 질투와 의심으로 무너지듯이, '윈터 슬립'의 아이딘도 점점 믿음을 잃고 헝클어진다. 남녀 주인공은 배역을 살듯이 연기했다. 감정의 크기가 충분히 커서 종종 큰 몸짓을 할 때도 믿음직스러웠다.
"젊고 자신감 넘쳤던 여자가 공허함과 권태로 시들어가는데 가책도 느끼지 않나요?"(니할)
"있는 그대로 안 보고 신처럼 떠받들다가 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화를 내는 게 타당한가?"(아이딘)
니할과 아이딘이 정면 충돌하는 이 대목은 따분함과 탈출, 정직과 위선, 자존심과 모멸감 사이로 관객을 데려간다. 터키 거장 제일란 감독은 질문의 무게를 견뎌내며 인간의 양면성과 마음속 폭풍우 같은 정경을 롱테이크에 담아냈다. '세자매' '갈매기'의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를 존경한다는 그의 말마따나 침묵과 느림의 미학이 살아 있다.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0번이 절묘하게 들어오고 나가며 아이딘을 무너뜨리는 마음의 격동을 포착했다.
느려서 사뭇 연극적인 이 영화는 빙하의 균열 앞에 던져진 느낌을 준다. 거칠게 폭발하며 나아가지만 낭만적 화해란 없다. 얼굴을 때리는 눈발 같은 논쟁 속을 걸어가야 한다. 90분짜리 영화가 진을 빼는 경우도 있는데 '윈터 슬립'의 196분은 허리가 좀 아플 뿐 빨리 흘러간다. 물에 빠진 야생마를 끌어내는 장면, 쏟아지는 눈발, 토끼 사냥을 비롯해 심리를 영상으로 뭉치는 힘도 돋보인다. 니할이 돌을 던진 세입자의 집을 찾아간 대목이 가장 충격적이다. 자존심이 얼마나 사나운 감정인지 목격하게 된다. 지난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5월 7일 개봉. 15세 관람가. 기고자:박돈규 본문자수:1562 표/그림/사진 유무:있음
(조선일보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