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출발할 때는 참가자가 없었다. 입상을 노리는 1시간 30분 이내 주자는 9시 30분에 출발하고, 순차적으로 1시간 40분 이내는 9시 35분, 1시간 50분 이내는 9시 40분, 2시간 이내는 9시 45분이라는 지침이 있었는데 겨울 찬 바람에 기다리고 있을 수 없던 주자들이 서둘러 출발하면서 스타트 라인은 텅텅 비어 있었다. 2시간 이내를 목표로 했던 나로서는 9시 45분 출발 시간을 잘 맞추었는데 졸지에 꼴찌가 되고 말았다. 지난번과 다른 점이 있다면 늦었다고 앞에서 달리는 220여 명의 주자들 가운데 몇 명이라도 따라잡겠다고 애를 쓰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여러사람이 함께 달리는 마라톤 대회 분위기를 느껴 보려고 했는데 언택트 마라톤을 하고 있다는 것만이 아쉬웠다.
영상 5도의 날씨였지만 체감온도는 낮아 춥게 느껴졌다. 마라톤 대회에서 올 겨울 들어 처음으로 장갑을 끼고, 긴팔 티셔츠를 입었다. 바이저 버프를 썼을 때 나타나는 갈기머리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미용사가 실수로 거의 삭발 수준으로 머리를 밀어 버리는 바람에 한 달이 넘어도 귀가 드러나 있었다. 버프를 목에 두르고 KF AD 마스크를 착용했다. 맨살을 드러낸 반바지. 그런 복장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대회 직전 사흘간 밤마다 닭강정에 라면에 과자를 먹어대어 살이 찐 모양이었다. 복부쪽의 살이 덜렁거리는 느낌이 이어졌다. 대회가 없어 몸을 방치하고 있다가 백신 접종 완료자에 한해 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는 정보를 파악하고 급하게 참가한 티를 내고 있었다. 전날 밤 11시까지 파지를 모았고, 자정까지 파지를 정리했다. 새벽 1시 쯤 자다 3시 40분쯤 시계의 잘못된 알람 때문에 잠을 깼다. 잠들어 있을 시간에 이동하면서 고단하기 짝이 없었다.
2019년 10월 9일 제4회 광진구청장배 마라톤대회에서 달렸으니 이 코스는 2년여 만이었다. 햄스트링 부상이 여전할 때 감당했던 대회. 그게 벌써 2년 전이라니. 내 배번은 0154라 오랜만에 만난 로운리맨님에게 1시간 54분으로 골인할 것이라 떠들었고, 그렇게만 달릴 수만 있으면 만족하겠다 싶었는데 달리는 거리가 늘어날수록 내 기록은 1시간 45분에서 50분 사이가 될 것 같았다. 일부러 늦게 달릴 필요가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4킬로미터 쯤 달린 후에야 꼴찌 그룹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코로나 백신 접종을 완료한 2백 여명의 참가자들이 주로에 흩어지면서 거의 다 산책로에서 달리고 있었다. 자전거도로쪽은 될 수 있는대로 피했다. 올림픽대교, 천호대교를 지나 구리시에 들어선 뒤 암사대교를 지나기도 전에 태권브이님이 오고 있었다. 파이팅을 외쳤는데 1시간 14분대로 달리면서도 팔을 들어올려 내게 답해 주었다. 무시무시한 스피드로 달리는데 선두 주자의 경우 뒷 주자가 바짝 따라붙고 있으면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 답하지 않고 달리기에만 매진하는데 의외였다. 간만에 만난 설아님도 맹렬한 스피드를 유지하면서도 내 외침에 답해주었다. 내가 하프 1등을 할 일은 전혀 없겠지만 만에 하나 1등으로 달리는 경우가 발생하면-그날따라 나보다 빠른 주자가 단 한 명도 참가하지 않는 이례적인 일이 일어나면-응원해주는 분에게 일일이 답해 드리리라. (그런데 그럴 일은 결코 없을거야)
9킬로미터 쯤 달렸을 때 건너편에서 로운리맨님이 나타났다. 먼저 출발하기는 했지만 나보다 무려 3킬로미터 이상 앞서 있는 것이었다. 거의 2년만에 하프를 달리면서 1시간 30분대로 달리고 있었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로운리맨님이 다시 흡연자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후 대회장을 빠져나갈 때와 식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 담배를 피고 있었다. 17개월만에 만나자마자 꺼낸 이야기가 다시 담배를 핀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 말을 들고 16킬로미터 쯤 달렸을 때 주로에 떨어진 담배갑을 줍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딱 봐도 수북하게 담겨있는 담배갑이었는데 마지막 스퍼트한답시고 줍지 못했다는 것.
대형 태극기가 보이는 지점에 오면 통행량과 기온 표시판을 볼 수 있었는데 기온은 7도였다. 돌아올 때는 8도로 바뀌어 있었다. 기온이 조금씩 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반환점에서 간식을 기대했지만 물밖에 없었다. 에너지 고갈을 감수하면서 남은 10.55킬로미터를 달릴 수밖에 없었다. 반환하기까지는 54분이 걸리지 않았다. 현재의 페이스를 유지한다면 1시간 47분대 후반의 기록으로 골인할 수 있었다. 의외의 복병이 있었다. 맞바람이었다. 반환하기까지 앞쪽은 아니지만 옆쪽에서 바람이 불고 있어 돌아올 때는 바람을 등질 줄 알았는데 사실 바람을 안고 달려야 하는 것이었다. 그 바람 때문에 마스크를 거의 내리지 않았다. 젖은 마스크는 바람이 꾸준히 말리고 있었다. 구리에서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까지 5킬로미터 정도는 속도를 내지 못했다. 오후부터 바람이 세지면서 기온이 급강하하고 다음날은 영하로 떨어진다고 했는데 한파 예고를 미리 몸으로 감당하는 느낌이었다. 거기서 시간을 까먹으면서 1시간 50분이 넘어갈 것 같은 페이스가 되었다. 하지만 5킬로미터 남기고 급수대에서 생수를 마시고 심기일전해서 속도를 냈다. 앞에서 뛰던 젊은이가 급수대에서 갑자기 서 버려 충돌할 수도 있었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사고는 피했다. 저 사람은 물컵만 들고 앞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물을 마시기 위해 갑자기 서 버릴 수도 있어. 이런 생각 덕분에 부딪치지는 않았다. 급수대에서 갑자기 서면 안 됩니다. 이 말을 하긴 했는데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스피드를 올린 덕분에 오르막에서 몇몇 주자를 제쳤다. 무거운 몸으로 속도를 올린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풀코스가 아닌 하프라 참 다행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독이며 발걸음을 빨리 했다. 대회를 마치고 함께 식사하기로 한 로운리맨님이 기다린다고 했는데 지치시겠네. 대회가 아니라면 이렇게 속도를 올려 달릴 일도 없겠네.
마지막 5킬로미터는 어느 구간보다 빨리 달린 덕분에 까먹은 시간을 되찾고 덤같이 붙여 골인했다. 1시간 47분 34초. 큰 차이는 아니지만 후반이 전반보다 빨라졌다.
※ 구리시쪽에는 한강 보도 횡단교를 건설하고 있었는데 달리면서도 잠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중앙의 상판만 놓으면 금방 완공될 듯한데 언제 이렇게 짓고 있었을까? 2년 동안 못 본 사이 이런 일도 있었다. 완공되면 어떠한 모습일까 기대가 크다. 이 다리가 놓였다고 기념 마라톤 대회를 열지는 않겠지? 코로나 상황만 아니었다면 월드컵 대교가 개통되었을 때 기념 마라톤 대회가 열렸을지 모른다. 인천대교 개통 기념 마라톤 대회가 열렸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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