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에 한파가 몰려왔다. 영하 10도까지 떨어진 새벽에 풀코스 마라톤을 달리는 도전을 감행했다. 추위가 버거운 듯 안양천변의 수풀은 무채색으로 일제히 몸을 바꾼 뒤 숨을 멈추어 버린 것 같았다. 몸을 감싼 비닐이 구겨졌다 펴지는 소음이 얼어붙은 천변에서 유일한 생명의 박동처럼 울리고 있었다. 3킬로미터를 채 달리기도 전에 날은 새어 버렸다. 도림천에서는 밤이었지만 안양천에서는 낮이었다. 건너편에서 발맞추어 달려오는 커플 가운데 남자가 나를 보자마자 익살맞은 몸짓으로 주로에서 도망가는 시늉을 했다. 성하형이었다. 그 옆의 여자는 달물영희님이었다. 대회 참가를 예고한 바가 없기 때문에 서로 깜짝쇼가 되었다. 나는 고작 3킬로미터를 달렸을 뿐인데 이분들은 벌써 18킬로미터 이상을 달리고 있었다. 훨씬 어둡고 더 추운 새벽에 출발했다는 뜻이었다. 299명까지 백신 접종완료자만이 참여할 수 있는 대회. 그러고도 6시부터 8시까지 개별 자율 출발을 하는 대회. 이날 참가 완주자는 129명밖에 되지 않았다.
풀 48명, 하프 15명, 10킬로미터 44명, 5킬로미터 22명
달리면 달릴수록 만날 주자가 없어지는 대회 참가자 규모였다. 츄리닝 바지에 긴팔 티셔츠 두 장을 걸쳤다. 사흘 전보다 조금 두꺼운 티셔츠를 안쪽에 입었다. 버프와 장갑 착용은 똑같았지만 보온을 위해 5킬로미터까지는 비닐을 걸쳤다. 사흘 전과 똑같은 시간 계획에 따라 움직였다. 4시 49분 기상, 5시 36분 화계역 첫차 탑승, 6시 50분 신도림역 도착, 삼각김밥 1개 취식. 날씨는 잔인하리만치 추워졌다. 몸은 굼떠서 7시 30분이나 되어서야 스타트 라인을 치고 나갈 수 있었다. 물품 보관용 비닐 봉투 한 장을 구해 구멍 세 개를 뚫어 머리와 양팔을 끼워 넣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꽤 썼다.
2021년에는 363일째 되는 날이 되어서야 첫 풀코스를 달렸는데 2022년에는 만 하루가 되지 않아 첫 풀코스에 나서고 있었다. 다리에 아직도 남아 있는 묵직한 피로감과 머리를 내리누르는 고단함을 생각한다면 출전을 재고해야 하는 대회였다. 미리 대회 신청을 하지 않았다면, 새해 첫날이 아니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은 2015년 1월 1일 날씨를 빼다 박았다. 하루만에 영하 10도까지 곤두박질친 날씨. 참가자들이 대회장에 나왔다가 너무 추워 돌아가 버렸던 그날도 대회가 있었다. 1월 1일이면 일출 행사 보다는 마라톤에 참가했던 이력. 2020년과 2021년에는 마라톤 대회에 나오지 않았다. 코로나19나 집안사정 등 핑곗거리가 충분했지만 1월 1일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지 않고 시작하는 새해는 좋았던 기억이 없었다.
6킬로미터 남짓 달려 한강을 만나고 안양천 하류를 가로질러 다시 안양천 상류를 향하여 달리고 있다는 사실에 여러번 놀랐다. 어떻게 내가 풀코스를 완주한 지 단 사흘만에 다시 풀코스를 달린단 말인가? 새해 첫날이니 버티고는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누적되는 피로감을 어떻게 감당해낼 수 있을까? 완주 비법으로 선택한 것은 두 가지였다. 속도 늦추기와 응원 주고 받기. 만난 지 1년이 넘은 주자들을 여러 명 만났다. 그때마다 그동안 너무 달리지 않아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무서운 스피드로 내달리는 인천연형님, 큰소리로 하이파이브를 나누면서 주변사람들이 다 돌아보게 한 춘효형님, 눈이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달리는 흥의님, 고운인선님 없이 달리는 고운장영님, 70대 고수 남수형님, 내 이름까지 불러주는 기옥형님, 변함없는 자세로 달리는 의계형님, 사흘 전에도 만났던 홍근형님과 Watson님. 2019년 수원마라톤에서 풀코스 500회를 하셨던 분인데 얼굴은 알았지만 이름은 잊은 분이 있었다. 1시간 쯤 더 달린 후에 상현님의 이름이 떠올랐다. 옛추억을 되살리는 달리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낯선 분인데 마주칠 때마다 내게 거수경례를 했다. 마치 나를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7033 배번을 기억하고 있다가 나중에 주최측을 통하여 래정님임을 확인했다. 입이 시려 견딜 수 없다고 했던 분, 다리에 쥐가 나서 수시로 걸었던 분은 명호님이었다. 몇 년 전 사진도 찍고, 인사도 자주 나누었는데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이름을 확인하고 나니 기억이 돌아왔다. 마라톤 대회가 만들어 주었던 인연을 되새기는 새해 마라톤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방역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은 않았다. 날씨가 추운 만큼 사람이 거의 없어 한동안 마스크를 내리고 있어도 상관없었다. 내렸다가도 바로 끌어올리게 되었다. 추워서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과거에는 버프가 추위를 막아주었지만 이제는 마스크가 막아주고 있었다. 입이 시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고 했던 명호님의 말이 이해되었다. 콜라를 마시고 싶을 때는 내가 직접 뚜껑을 힘껏 열어야 했다. 급수대 운용요원이 뚜껑이 얼어붙어 열리지 않는다고 했다. 만약 내가 시간에 쫓겼다면 짜증이 났을 테지만 시간에 대한 집착을 버린 마당이라 여유가 넘쳤다. 차분하게 뚜껑을 따서 콜라를 컵에 천천히 따라 마셨다. 콜라를 마시고 난 후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꼭 소변을 보고 싶었다. 결국 풀코스를 달리는 동안 화장실에 네 차례나 갔다. 시간을 까먹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서브4에 대한 집착을 놓아 버렸기 때문에 마음은 편했다. 2회전하는 코스이니 반환을 세 번하게 되는데 그때보다 늦어지는 구간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1차 반환, 10.55킬로미터를 달렸을 때 1시간이 넘어가면서 서브4 기록은 힘들어 보였다. 이왕 달리는 것, 서브4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램은 수차례 가졌지만 그때마다 그러면 안된다고 자제했다. 오로지 완주에만 전념하자고 다짐했다. 2차 반환, 하프를 달렸을 때 기록은 2시간 6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페이스가 현저하게 떨어진 것이었다. 추위와 피로. 하프를 1등으로 마친 상기님에게는 아무래도 4시간 10분이 넘을 것 같다고 했다.
도림천을 오가는 동안 이색적인 광경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꽁꽁 얼어붙은 도림천 위에서 아이스하키 훈련하는 젊은이가 있었다. 아이스하키 스틱으로 균형을 잡아가며 8자 무늬를 여러개 이어붙여 얼음 위에 새겨 놓고 있었다. 영하 10도의 한파가 꽁꽁 얼려버린 도림천이 멋진 훈련장이 된 것이었다.
달리는 거리가 늘어날수록 받게 되는 느낌은 이 대회가 아무래도 언택트 마라톤같다는 것이었다. 마라톤 대회 하면 떠오르는 풍경이 전혀 아니었다. 날씨가 추워 꽁꽁 싸매고 달린다고 하더라도 바로 옆에, 앞에, 뒤에 참가자가 있었던 것이 마라톤 대회였다. 달리면서 페이스를 맞춰보기도 하던 일은 여전히 불가능했다. 아직도 나 홀로 마라톤이었다. 일찍 출발한 주자들은 이미 완주를 마치면서 주로는 점점 비어갔다.
다시 한강을 만나면서 27킬로미터가 넘어갔다. 풀코스를 달린 지 몇일만에 다시 27킬로미터를 넘게 달렸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3차 반환, 31.6킬로미터를 넘으면 또 얼마나 사람이 피폐해질 것인가 하는 걱정이 생겼다. 의지만으로 극복은 어렵다는 사실을 되새기면서 발을 옮길 것인가? 힘들지만 걸으면 더 추우니까 뛰는 게 나을 거야. 그동안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한 벌을 톡톡히 받는 거야. 그래도 오늘은 1월 1일이니까 끝까지 달리는 거야. 이러고 있었다. 마침내 3차 반환했다. 초코파이, 콜라, 온수. 세 가지를 모두 섭취했다. 이 섭취는 급수대마다 반복하고 있었다. 10.55킬로미터가 남았을 때 달린 지 3시간 9분이 되어 있었다. 10킬로미터를 1시간이 넘게 달리고 있으니 4시간 20분 정도로 골인할 것 같았다. 겨울에 서브 4 못하는 일은 거의 없는데. 서브 4를 하려면 10.55킬로미터를 51분 이내로 달리면 되는데. 절대 못하겠지. 아주 마음편하게 서브4를 포기할 수 있어 좋구나. 오목교, 목동교, 양평교를 순차적으로 지나면서 2시 방향에서 보이는 구조물이 있었다. 월드컵대교 주탑을 닮았는데 월드컵대교는 한강쪽에 있으니 그곳에서 보일리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월드컵대교가 맞았다. 달리다 보니 한강이 가까워진 것이었다. 안양천과 한강의 합수부를 가로질러 우회전, 안양천에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화장실에 들렀다. 계단을 밟고 오르내리는 지겨운 과정을 이겨내었다. 굳이 화장실에 들를 필요는 없었다. 이전 세 번의 화장실 방문만으로도 충분했다. 조금이라도 신경쓰이는 부분을 덜어내자는 의도가 컸다.
35킬로미터를 넘어서 안양천을 오른편에 끼고 달리게 되었다. 느낌이 이상했다. 몸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사흘 전에는 장거리 훈련한 적이 없어 몹시 힘들기만 했던 후반이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풀코스를 달렸던 것이 몸에 기억이 된 듯 장거리 훈련을 한 적이 있어 후반은 오히려 힘들지 않을 수도 있다는 확신 같은 느낌. 힘든 몸을 가누지 못해 다리를 질질 끌고 달릴 줄 알았는데 몸은 이상하리만치 가벼워졌고 머리는 맑아졌다. 아주 개운했다. 37킬로미터를 넘게 달리는 동안 옆구리 살이 다 빠져나가고 에너지가 재충전되었다고 믿었다. 장거리 훈련이 부족한 티가 철철 났던 사흘 전의 부담감이 전혀 없었다.
5킬로미터 남은 급수대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네 조각 낸 초코파이를 씹으며 콜라, 온수까지 마셨다. 현재 5킬로미터 페이스는 30분을 넘고 있기 때문에 4시간 15분 정도의 완주 기록이 예상되었다. 5킬로미터 남은 현재 3시간 44분 35초 경과. 그 때 다른 사람이 되었다. 37.2킬로미터부터 38.2킬로미터까지 5분 20초의 페이스, 3시간 45분 페이스로 올라갔다. 38.2킬로미터부터 39.2킬로미터까지는 5분, 이건 3시간 30분 페이스였다. 영원히 못할 것 같았던 후반 질주가 이어지고 있었다. 39.2킬로미터부터 40.2킬로미터까지는 3시간 25분 페이스가 되었고, 급기야 마지막 1킬로미터는 3시간 19분 페이스가 되었다. 첫 5킬로미터를 28분 걸려 달리고, 중반 5킬로미터는 30분을 넘기기까지 했는데 마지막 5킬로미터만은 24분 47초로 달렸다.
4:09:22.89
비록 오랜만에 서브4는 놓쳤지만 후반의 질주 덕분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새해 첫날 추위를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따뜻한 방에 웅크리고 있었다면 누리지 못할 부듯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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