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오토코(あめおとこ: 雨男).
비를 몰고 다니는 사나이, 그 사람이 무언가 하는 날에는 반드시 비가 내린다는 소리를 듣는 남성.
그게 나였다. 불과 사흘 전 비를 진탕 맞고 비 때문에 결국 풀코스를 완주하지 못했는데 오늘도 비가 내렸다. 9시부터 내린다던 비가 2시간을 앞당겨 내가 출발선을 박차고 나갔을 때부터 내려서 완주를 마칠 때까지도 내렸다. 전날 일기예보만 해도 햇볕이 뜨거운 고온의 하루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날씨가 이렇게 돌변했다. 일요일처럼 굵은 비는 아니지만 도림천은 어느 하천보다 빨리 범람하니 대비했다. 상류의 주로가 끊길 경우를 대비하여 구간마다 꼼꼼하게 거리를 파악했다. 거리를 제대로 알지 못해 31킬로미터나 달리고 레이스를 접어버린 일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수요일은 참가 인원이 적은 만큼 달리기를 도와줄 급수 요원을 추가로 고용할 수 없어 주최측은 4회전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5.274킬로미터 지점에서 네 차례 반환하여 10.55킬로미터를 네 번 달리는 방식이었다. 10.55킬로미터를 1시간씩 달리다 어느 구간이라도 1초만 빨리 달리면 서브 4가 가능하기 때문에 시간 계산은 편했다. 4회전이면 늘 하던대로 계획을 세웠다. 1회전은 점검주로 당일 컨디션과 페이스를 파악하고, 2회전은 지속주로 1회전의 페이스를 유지한다. 3회전은 후반을 위하여 에너지를 비축하는 회복주로 삼는다. 마지막 4회전은 무슨 말이 필요한가. 질주, 질주다. 앞에 3회전 하는 동안 구간 기록이 1시간을 살짝 넘더라도 마지막 4회전에서 만회하면 된다. 늘 내가 해오던 방식이었다. 4회전을 할 경우 2회전하는 것보다 노천 구간이 두 배로 늘어나 비도 그만큼 많이 맞기 마련인데 7월 19일보다는 빗줄기가 강하지 않다는 이유로 꿋꿋이 4회전을 밀고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 말고는-주로에 나 말고 10명 밖에 되지 않았지만-모두들 2회전을 하고 있었다. 징검다리 데크를 건너 도림천을 감아돌아 오는 하프 코스를 2회 반복하는. 궁금한 점이 있었다. 그들은 급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10킬로미터 이상을 두 차례 갈증을 참으며 뛰는 것인가? 이 여름에? 혹시 조그만 생수통을 들고 뛰거나 반환점에 미리 물을 감추어 놓고 출발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 급수 문제를 해결하는지 3회전 때에야 알게 되었다.
오늘은 두 마리 토끼를 노렸다. 7월 풀코스 완주와 서브 4.
10.55킬로미터를 1회전할 때마다 1시간 이내로만 돌고, 좀더 세분하여 출발점과 반환점 사이를 30분 이내로만 달린다면 3시간 59분대로 골인하게 된다. 7월에 서브 4를 해 본 지도 어느새 2년이 흘러 버렸기에 이 7월에 서브 4면 더 바랄 것도 없었다. 1회전 때는 1분의 여유가 생겼다. 생각보다 시원한 날씨가 속도를 올려준 것이었다. 하지만 2회전은 1시간 1분이 걸렸다. 사흘 전 장거리를 달린 탓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도 나쁠 것은 없었다. 하프까지 딱 2시간이면 서브 4를 예상해 볼 수 있었다. 일요일 완주를 하지 못해 수요일에도 출전한 것이지만 햄스트링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잘 추스린 후에도 수요일 새벽 상태가 좋지 않으면 일요일로 도전을 미룰 생각이었다. 테이핑으로 견딜만 해서 출전했다. 아스피린도 먹어 두었다.
비는 제법 맞고 있었지만 뙤약볕에서 달려야 한다는 각오를 하고 있던 나로서는 운이 좋다고 여겼다. 그런데 달린 거리가 누적될수록 피로감이 느껴졌다. 풀코스를 달린 지 한 달이 넘어 있었다. 게다가 사흘 전 30킬로미터를, 그것도 비를 맞으며 물살을 헤치고 달려 지친 몸이 회복이 되지 않았다. 지난 해 여름 그랬던 것처럼 도무지 속도를 낼 수 없다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서브 4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마라톤의 최대 미덕인 완주에만 몰입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한 달, 아니 1년만에 풀코스를 달려도 꾸준히 운동만 하고 있다면 문제될 것은 없었다. 운동 능력이라는 게 곳간의 재물과는 달라서 자주 확인하지 않으면 어느새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한 순간도 소홀히 하면 안되는 게 운동이었다. 2013년 7월 한번도 걷지 않았는데도 4시간 59분으로 골인했던 것은 모두 훈련 부족 탓이었다.
용구형님, 홍근형님, 정표형님, 100회 동호님, 기록님, 문연님, 무언님, 준식님 등과 마주볼 때마다 손을 들고 파이팅을 외치면서 전투 의지를 끌어올리는데 주말에 달리는 것보다 너무 심한 사회적 거리 두기라 혈혈단신으로 주로에 나와 있는 것 같았다. 내 앞 뒤로 수킬로미터 이상 주자가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30분 쯤 달린 후에야 참가자를 만날 때도 있었다. 대회에 혼자 나와 달리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혼자서 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5분 40초로 달려야 가능한 서브 4가 위협을 받고 있었다. 5분 45초에서 50초까지 떨어져 4시간을 살짝 넘겨 골인한 후 내내 아쉬워하고 있는 내 모습이 예상되었다. 빗줄기는 어느새 거세져 비를 맞는 것도 부담되었다. 3회전 급수대에서, 즉 26킬로미터를 조금 넘게 달렸을 때 결단을 내렸다. 반환하지 않고 더 나아가기로 했다. 마지막은 오롯이 하프를 달리기로 했다. 4회전을 그대로 할 경우 방향 전환을 40번 쯤 해야 하는데 방향 전환 횟수도 줄이고 비도 피하기로 한 것이었다. 문제는 급수였다. 급수대에서 생수를 얻어 들고 달리는 게 낫겠다 싶었다. 평소 연습할 때는 물통과 스마트폰을 들고 배낭도 메고 달리는 데 부담스러울 것은 없었다. 풀코스를 달리는 내내 스마트폰을 들고 움직이는 希洙형님도 있지 않는가. 급수대 담당자에게 마지막은 길게 달리려는데 생수를 하나 얻을 수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도림천 건너편 기둥을 가리켰다. 거기엔 2리터 물통이 놓여 있었다. 그 지점이 8킬로미터, 29킬로미터 언저리, 또한 13킬로미터, 34킬로미터 언저리였다. 29킬로미터 지점과 34킬로미터 지점에서 저 물을 이용하면 견딜만 하겠다 싶었다. 일요일 2회전 때 물길에 막혀 아예 가 보지 못했던 신대방역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급수대 요원에게 문의하고, 그에 앞서 화장실에 들르고 하면서 26킬로미터를 달리기 전 벌어 놓았던 시간을 죄다 까먹었다. 골인 예상 기록이 4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선전해 봐야 4시간 00분 20초. 불과 몇 십 초 차이로 시간대가 3에서 4로 바뀌는 기록은 사람을 오래 침울하게 만들고도 남을 것이었다.
후반에 독기를 발휘하여 조금씩 페이스를 끌어 올리겠다고 각오는 하는데 자체 급수를 두 번 해야 한다는 사실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손이 닿기 편한 위치에 물이 따라져 있는 종이컵은 얼마나 고마운 것이었던가. 시간을 더 잃어버릴 수밖에 없겠지만 혹시나 비에 젖는 시간이 줄어들면 다시 속도를 붙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나 자신을 위로했다. 몸이 가볍지 않은 것이 피로가 누적되어서인지, 체중이 불어서인지, 아니면 둘 다 원인일 수도 있지만 일요일 31킬로미터를 달리고 오늘도 달리고 있으니 분명히 살이 빠져서 몸을 움직이기가 한결 수월할 것이라고 믿었다.
2리터 물통을 들어올려 물을 마신 29킬로미터 지점에서 보면 두 마리 토끼를 잡기가 어려워 보였다. 31.6킬로미터 지점에서 반환한 후 몹시 힘들다는 느낌에 진저리를 쳤다. 10킬로미터를 남기고 단 몇 초씩이라도 구간 기록을 줄여 보려고 애썼다. 발가락 찰과상이 일요일보다는 낫다. 다시 도진 줄 알았던 햄스트링 통증은 잠잠하다. 새벽에 알람을 한번 놓친 만큼 평소보다 조금 더 자서 고단하지는 않다. 출발하기 전 화장실에서 일을 보지 못했지만 다행히 신호는 오지 않는다. 좋은 일만 생각하려고 애쓰며 몸이 안된다고 아우성치는 것을 막았다. 마라톤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분들이 떠올랐다. 달리다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 그 분들은 뛰고 싶어도 뛸 육신이 없다. 몹시 고통스럽지만 이렇게라도 도전할 수 있는 나는 행복했다. 서서히 5분 40초 이내의 페이스로 들어오면서 중후반 때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5분 30초 이내로는 달려야 가능해 보였던 서브 4가 38킬로미터를 지나 노천 구간에 들어설 때는 어느새 6분으로 달려도 서브 4가 무난해졌다. 빗줄기도 약해져 있었다. 비맞고 달리기에 기분 좋은 날씨였다. 4시간 가까이 내린 비로 하류의 징검다리는 징검다리라는 느낌만 남기고 잠기기 직전이었지만 비 때문에 주로가 끊겨 달릴 수 없었던 날과는 달랐다. 6분 페이스로 달려도 되지만 좀더 치열해졌다.
39.2~40.2: 5분 30초
40.2~41.2: 5분 30초
41.2~42.2: 5분 00초
3:57:59
10명의 완주자 가운데에서는 가장 기록이 좋았다. 7월의 서브 4를 2년만에 달성하게 되었다. 불가피하게 31킬로미터만 달리고 돌아설 때 느꼈던 분노와 불쾌감은 씻어졌다. 한여름, 비가 내리지 않을 때에도 이렇게 달려서 성취감을 얻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도 도전했던 나 자신을 칭찬하며 완주기를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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