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은 코로나19 때문에 마라톤 대회가 줄줄이 취소되면서 14년 동안 내리 달렸던 춘천마라톤까지 뛸 수 없게 되었다. 개별 출발로 진행되고 있는 공원사랑마라톤대회도 8월부터 늘어난 수도권 확진자 때문에 나 스스로 참가를 자제했다. 서서히 마라톤 은퇴 수순을 밟고 있다고 해도 좋았다. 대회에 나갈 일이 없어 운동을 하지 않으니 체중은 꾸준히 늘었다. 고물상 저울에 슬쩍 몸을 올려 보았다가 기겁했다. 모니터에 무려 91킬로그램이 찍혔다. 옷, 가방, 휴대폰 모두 감안해도 80킬로그램 후반대! 이건 생애 최고 몸무게였다. 마라톤 대회에 나가지는 못하더라도 체중 감량이 필요했다. 몇 달만에 뒤뚱거리며 조금씩 달렸다. 그러다가 전마협으로부터 문자 하나를 받았다.
11/15 전마협 하남 무료초청마라톤 12k, 20k
기념품, 메달제공 칩사용! 기록증발급
대뜸 20킬로미터 종목을 신청했다. 대회 이틀 전 몸 상태를 점검해 보기 위하여 달리기에 나섰는데 불과 100미터를 못 가고 돌아오고 말았다. 발이 끌리는 느낌이 아무리 오래 뛰어도 걷기 수준을 넘지 못할 것 같았다. 줄넘기 2500개로 달리기를 대신하였다. 얼마나 줄에 자주 걸렸는지 참으로 지겨운 줄넘기였다. 이 지경으로 어떻게 대회에서 달릴지? 몸 상태는 좋지 않지만 대회라면 마음가짐이 달라져 좀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만 잔뜩 부풀렸다. 어쨌든 킬로미터당 6분 페이스, 최종 기록은 2시간을 넘지 말기로 마음먹었다. 4개월만에 꺼낸 대회참가용 배낭에는 여기저기 곰팡이가 피어 매캐한 냄새까지 배여 있었다. 반지하 후미진 곳에서 오랫동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급한대로 물티슈로 버짐처럼 피어오른 자죽을 지우고 햇볕을 쏘였다.
대회 당일. 잠을 설치다 몹시 노곤한 상태에서 집을 나섰다. 미사리경정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지하철 하남풍산역이 개통되었기 때문에 조금 여유를 부려도 되었는데 새벽 4시 39분에 일어나 움직였다. 출발은 8시 30분인데 역에 도착한 것은 6시 45분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상기님부터 볼 수 있었다. 간식을 먹으며 쉬고 있었다. 그동안 풀코스는 못 뛰었지만 하프는 가끔 뛰었다고 했다.
미사리경정장까지 혼자 걸었다. 걷는 거리가 늘어날수록 땅거미가 걷히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남들 잘 때 새벽을 여는 느낌, 부지런한 느낌. 7시가 넘었다. 대회장에 도착한 후 발열 체크부터 받았다. 체온 측정을 마쳤다는 증표로 팔목에 밴드를 둘렀다. 내 이름이 찍혀 있는 배번도 받았다. 이름이 찍혀 있는 배번은 올해 처음 달고 달리게 되었다. 출발까지는 1시간 20분이나 남아 화장실에 다녀오고 스트레칭하는 데 시간을 썼다. 소수의 인원만 선착순으로 참가 신청을 받았기 때문에 아는 사람을 거의 만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우리 동네 버스기사님과 샛별홍진님, 축구스타킹 강환님을 만났다. 샛별홍진님은 내게 공원사랑마라톤대회에 자주 나오라고 했다. 강고수가 나오지 않으니 대회장이 썰렁하기 짝이 없잖아. 운동을 하고 참가할 게 아니라 참가해서 운동하면 되지 않아. 그쪽에서는 나를 모르지만 내가 아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안철수 대표같은 분.
출발선을 지날 때까지도 마스크를 쓰고 있다가 달리는 동안 주자들과 거리가 생기면 융통성 있게 마스크 착용을 하라는 지침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내 마스크를 쓰고 있기로 했다. 마스크가 흠뻑 젖을 것에 대비하여 여분의 마스크를 반바지 바깥 주머니에 넣어 두기까지 했다. 예전에는 파워젤이 들어갔던 공간이었다. 코를 드러내는 코스크, 쓰나마나한 턱스크. 모두 거부했다. 달리면 달릴수록 달림이들의 코스크와 턱스크는 늘어났지만 나는 끝까지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달릴 때 마스크를 벗지 않는 습관을 들여 놓은 덕분에 잘 견디었다.
복장은 긴팔 티셔츠를 입은 것을 빼고는 여름과 똑같았다. 타이즈를 입은 우리 동네 버스기사님은 내게 춥지 않으냐고 물었지만 달리면서 점점 더워져 팔소매까지 걷어야 했다. 출발할 때는 대열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천천히 나아갔다. 첫 1킬로미터는 6분이 걸렸다. 그 이후 조금씩 빨라지긴 했으나 조깅 수준을 넘지 못했다. 달리는 거리가 늘어날수록 몸무게 때문인지 오른쪽 종아리가 쑤셨다. 내 몸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았다. 코스는 지겨웠다. 미사리 코스 자체가 단조로운데 출발 아치를 기준으로 한쪽으로 1.5킬로미터 달렸다가 출발점이자 골인점으로 돌아오고, 다시 다른쪽으로 1.5킬로미터까지 달렸다가 되돌아오는 방식이니 더 지겨웠다. 1회전은 6킬로미터이니 12킬로미터 참가자는 2회전하면 되었고, 20킬로미터 참가자는 3회전한 후 한번 더 최초 달렸던 방향으로 1.5킬로미터 달렸다가 돌아오면 레이스가 끝났다. 달리다가 20킬로미터는 사실 21킬로미터, 하프였음을 알았다. 전마협측은 대회 공지사항에 하프 기록으로 올렸다. 마라톤 완주메달에는 20킬로미터라고 찍혀 있었는데 코스가 상황에 따라 자꾸 바뀐데다가 반환점 운용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랜만의 하프는 과거의 풀코스보다 더 지겹게 느껴졌다. 지겨움을 이기는 방법은 인사하기였다. 샛별홍진님과 만날 때마다 거수 경례를 하며 밝은 미소를 주고 받았다. 안철수 대표를 만났을 때는 '대표님, 파이팅'을 외쳤다. 처음부터 끝까지 질주하는 느낌을 주는 상기님과 우리 동네 기사님에게도 꼭 손을 흔들었다. 영수마라톤의 영수님과 훈련삼아 선두그룹과 달리는 전마협 장영기회장도 응원했다.
출발점이자 골인점을 지날 때마다 카메라에 반응하는 것도 지겨움을 잊는 방법이었다. 급수는 최대한 자제했다. 꼭 필요할 때만 물컵을 받아들고 그 자리를 빠져나와 주위에 사람이 없을 때 마스크를 살짝 내리고 물을 마셨다. 직접 손에 닿는 간식인 바나나와 초코파이는 건드리지 않았다. 멍하니 달리고 있다가 12킬로미터를 달리고 나자 내가 달릴 거리가 아무래도 20킬로미터가 아니라 21킬로미터이겠다 싶었다. 20킬로미터 대회에 나왔을 뿐인데 달리다가 하프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레이스가 되었다. 또한 오늘이 생애 처음으로 하프를 2시간 넘기는 날이 되겠구나 싶었다. 2시간을 넘기면 하프가 아니었다고 하면 되는 것이지 하는 생각도 했는데 그래도 킬로미터당 5분 40초, 풀코스로는 서브 4의 페이스를 지키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도전이었다.
달린 거리가 늘어날수록 후반이 걱정되었다. 지난 7월 전마협 무료마라톤에 나왔다가 허벅지 통증 때문에 걸었던 일이 떠올랐다. 오늘은 종아리 통증 때문에 걷게 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들었다. 눈부시게 떨어지는 햇빛을 내리받으며 미사리 경정장 주변의 단풍도 보고, 요트릍 타고 훈련하는 사람들도 보면서 조심스럽게 다리를 놀렸다. 완주와 부상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옷에 땀자국이 커지면 커질수록 쾌감도 커졌다. 어떻게 이런 즐거움을 잊고 살았을까 싶었다. 이런 대회를 열어준 전마협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달리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준 최고의 순간을 만끽하며. 몇 달 전 내 뒤에서 달리던 지인들이 모두들 내 앞에 있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 상관없었다. 마라톤은 궁극적으로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화장실에 한번 들러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너무 시간을 잃을텐데 하는 고민을 하며 나아가다 보니 어느덧 3회전을 마치고 있었다. 18킬로미터를 달렸다는 뜻. 1시간 40분 후반대였다. 6분 이내의 페이스를 유지한 가운데 달리면 달릴수록 속도감이 생겨 시간을 번 것이었다. 이제 남은 거리를 6분 페이스로 달려도 2시간 이내 완주는 가능해졌다. 애를 태울 필요도 이를 악물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달리기의 마무리는 스퍼트였다. 3킬로미터 구간을 가장 늦게 달린 것이 3킬로미터부터 6킬로미터까지였고 그 기록이 17분 24초였지만, 마지막 3킬로미터 구간은 급피치를 올려 13분대로 뛰었다. 종아리 통증 때문에 브레이크가 걸리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나보다 13분 빨리 골인한 우리동네 버스기사님에게 6개 구간에서 모두 뒤졌는데 마지막 구간만은 내가 빨랐다.
1:54:15.78
이랬거나 저랬거나 내 생애 11월 최악의 기록이었다. 이전까지는 11월 최저 기록이 1시간 41분대였는데 최저 기록을 아주 넉넉하게 경신했다. 그만큼 그동안 운동이 부족했다는 뜻 아니겠는가.
0~3km> 17:13.24
3~6km> 17:24.23
6~9km> 16:42.47
9~12km> 16:55.26
12~15km> 16:06.97
15~18km> 15:56.36
18~21km> 13:57.25
12km 주자들이 완주를 마치고 주로에서 사라진 시점부터 스피드를 올리다가 마지막에는 인정사정볼것없이 급피치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달리는 동안 살이 빠져 이렇게 속도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도 들었다.
숨이 차다고 마스크를 벗진 않겠어. 아무리 힘들어도 인상을 쓰진 않겠어. 지인들을 마주하면 꼭 응원하겠어. 거기에 한가지 더. 2시간 이내로 달리고 말겠어. 비록 달리다가 20킬로미터가 아니라 하프를 달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지키기 쉽지 않은 결심이었지만 어쨌든 지켰다.
안녕하십니까? 2020 전마협 하남 훈련 마라톤대회에 참여하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로 인하여 참가자여러분께서도 예방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근 해외 방문 이력이 있으신 경우 대회 당일 발열, 기침 의심되는 경우 전날 무리하셨거나 과음하거나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경우 안전한 행사를 위해 우리 모두를 위해 참여를 하지 않습니다.
행사장 입장시 안전수칙~ 1. 행사장에 올때 반드시 마스크를 쓰고 참여합니다. 2. 행사장에서 배번호를 받기전에 발열체크하고 손소독제를 사용합니다. 3. 출발전까지 절대 마스크를 벗지 않습니다. (턱스크 안됩니다~) 4. 철저히 거리간격을 유지하며 행사를 함께합니다. (거리간격 줄서기~) 5. 출발 전 반드시 마스크를 끼고 거리간격을 유지하며 출발선으로 이동합니다. 6. 출발 신호에 맞춰 출발할때 반드시 마스크를 끼고 출발합니다. 7. 어느정도 거리 격차가 생길 시 마스크를 벗어 손목에 걸거나 턱스크를 합니다. 8. 사람이 많은 구간일 경우 마스크를 잠깐이라도 꼭 착용합니다. 9. 주로에서 침을 뱉지 않습니다. (꼭 뱉어야하는 상황이라면 사방을 살펴주세요) 10. 골인 시 골인점에 모여있지 않습니다. 11. 거리간격을 유지하여 숨을 고르고 충분한 수분섭취 후 안정이 취해지면 마스크를 씁니다. 뛰는 동안 젖었을 경우 새로운 마스크를 사용하고 없을 경우 주최측에서 새로 부여받습니다. 12. 언젠가 이마저도 소중한 추억이었다 여길 수 있도록 ~! 안전한 행사장 함께 만들어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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