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너가 꿈꾸는 마라톤.
10도 전후의 서늘한 날씨, 낮은 습도와 적당한 바람, 가벼운 체중과 잘 훈련된 몸, 충분한 수면과 끈질긴 승부욕.
이 모든 조건을 빼앗기고 나는 주로에 선다. 내가 선택한 대회 당일은 최고 기온이 30도가 넘는다는 6월 하순의 세번째 일요일. 훈련 부족으로 퉁퉁 부운 몸, 새벽 1시부터 3시 49분까지의 노루잠, 부담스러운 식사량과 부족한 배변. 무엇보다도 사라진 자신감.
오늘 뛰지 않으면 2020년 6월에는 풀코스 마라톤 대회 완주 기록이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속에 문래동으로 갔다. 새벽 6시가 살짝 넘어 마라톤 힐링카페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참가 접수담당 여사님이 내게 부탁부터 했다.
이 분 처음 오셔서 출발 장소도 코스도 모른다고 하시니 함께 나가서 도와주세요.
내 바로 앞 배번인 진환님은 낯익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작년 JTBC 마라톤을 뛰신 모양이네요.
대회장까지 안내하면서 진환님이 10킬로미터 참가자임을 알았다. 공원사랑마라톤대회는 참가자 가운데 90% 이상이 풀코스를 뛰는데...... 풀코스가 힘들다면 하프라도 달리시는 게 어때요? 10킬로미터만 뛰고 가는 건 아쉬워 보이는데요. 이렇게 말해도 10킬로미터 이상 달릴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지난 해 JTBC 마라톤도 10킬로미터 종목에 참가했던 것이다. 킬로미터당 6분 페이스로 달릴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30분 언저리가 되면 구로디지털단지역 부근 10킬로미터 반환 표지판을 잘 보고 돌아오세요. 웬만하면 좀더 나아가 하프 뛰시고요. 10킬로미터 참가자라면 80%를 노천 뙤약볕 구간을 달려야 한다는 의미이니 이 분은 공원사랑마라톤 코스가 선사하는 그늘의 혜택을 거의 알지 못할 것이었다.
출발점에서 바로 보이는 10.55킬로미터 및 31.6킬로미터 반환점 급수대가 보이지 않아 사장님에게 코스가 바뀌었느냐고 물었다. 날씨가 더워 그늘 구간이 조금 더 많은 옛날 코스로 운용한다고 했다. 매우 고마운 결정이었다. 덕분에 거리 파악도 수월해졌다.
칠마범재님과 진환님이 먼저 출발하고 난 뒤 1분 쯤 지나 나도 출발했다. 내내 마스크를 쓰고 있다가 바로 벗었다. 진환님을 신정교 아래 1킬로미터 지점에서 따라잡으며 방향을 알려주었다. 한달 전까지만 해도 공사중이었던 산책로는 녹색 우레탄으로 깔끔하게 깔려 있었다. 눈이 아주 시원했다. 거기서 진환님과 아주 잠깐 동반주했다. 2킬로미터 지점에서는 나 혼자 달리게 되었다. 이후 완주할 때까지 내 옆에서 달리는 사람은 없었다. 2킬로미터는 10분 40초. 킬로미터당 5분 20초. 의외로 빠른 스피드였다. 한달만에 풀코스를 달리고, 지난 한 달 동안 단 한번도 인터벌 훈련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페이스를 잃어버리고 초반부터 오버페이스를 한 것 같았다. 아직 잠이 덜 깬 탓도 있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페이스는 바로 떨어졌다. 5분 45초까지. 서브 4의 기준 페이스인 5분 40초보다 느려졌다.
노천 구간이 끝나면서 그늘 구간으로 들어섰고, 아직 7시도 되지 않았지만 상의는 흠뻑 젖었다. 산책나온 사람들의 눈이 의식되었다.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라도 마스크를 쓰라고 강요하면 허리춤에 끼운 마스크를 다시 써야겠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어 오롯이 달리기에만 집중할 수는 없었다. 몸도 꽤 뜨거워지고 있어 속도를 올린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몸을 앞으로만 옮기고 있었다. 6킬로미터 직전 급수대에서 콜라를 직접 따라마시는데 도림천 건너편 간이 급수대에서 반갑다고 외치는 분이 있었다. 성하형이었다. 오늘도 달물영희님과 동반주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징검다리 데크를 건넌 후 7킬로미터, 8킬로미터 표지를 보며 페이스를 점검했다. 8킬로미터 45분 00초. 여유가 있는 듯, 없는 듯 했다. 분명한 것은 화장실에 갈만한 여유는 없었다. 수면 부족으로 이따금 머리도 아픈데 완주는 가능할까 하는 두려움도 생겼다. 뒷골까지 당기는 일은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간신히 1회전(하프)을 마친다고 하더라도 2회전은 어떻게 감당할지 암담하기만 했다. 기온은 더 오를 것이고, 피로는 더 쌓일 것이었다. 여러번 경험했던 여름의 달리기처럼 후반에 들어서면 기록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그저 완주만 해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자족하며 지지부진한 발놀림으로 골인 지점을 향하여 움직이게 될 것은 뻔했다. 마라톤은 완주만 해도 승자 아닌가, 풀코스를 달린 덕분에 살은 제법 빠졌네라고 흡족해 하며.....
10.55킬로미터에서 반환한 후 돌아서니 아는 분들이 꽤 보였다. 시각장애인 마라토너 이흥의님과 도우미 갑열님, 샛별홍진님, 긴팔병준님, 칠마희석님, 시각장애인 마라토너 병석님과 도우미 서승우 박사, 고운인선님, 인천고기옥님, 인천고석도님, 희문19님, 의사동호님 부부, 홍근님, 격주재혁님, 의사종길님..... 샛별홍진님은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틀 연속 풀코스를 달리고 있었다. 샛별홍진님은 나를 '강고수'라고 부르며 반겼다. 주변을 살피지는 못하고 앞만 보고 달리는데 도림천 건너편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로운리맨님이었다. 5월 3일 이후 대회 참가가 늘 엇갈렸는데 드디어 같은 날 달리게 된 것이었다. 로운리맨님은 늦게 출발하여 아직 도림천 건너편에 있었지만 도림천을 사이에 두고 평행을 유지하며 함께 달렸다. 묘한 동반주의 느낌을 즐겼다. 사회적 거리두기 동반주라고 할까. 페이스가 좋은 로운리맨님이 앞쪽으로 나아가게 되었는데 내심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오늘 코스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한동안 달렸던 코스로 인식하고 중간에 행여 다리를 건너오는 것은 아닐까? 부지런히 달려가 좀더 진행하라고 알려주어야 할텐데 그러기엔 내가 너무 느리고..... 실제로 로운리맨님은 구름다리를 건너려고 했다. 그때 서승우 박사가 시각장애인도우미를 하는 바쁜 와중에도 로운리맨님에게 바뀐 코스를 알려주었다. 징검다리 데크를 먼저 건너온 로운리맨님은 완주한 후 내게 기다리라고 했다. 점심을 함께 먹자는 뜻임을 바로 알았다. 내가 점점 느려지면 로운리맨님이 나를 기다릴 수도 있는데......
17킬로미터를 넘긴 후 노천 구간에 다시 들어서면서 잊고 있던 여름의 기억이 선명해졌다. 지옥같았던 여름 풀코스의 악몽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1회전은 2시간이 다 되어 마쳤다. 1회전을 2시간에 하고, 2회전을 2시간 40분 넘게 뛴 것이 바로 지난 해 여름이었다. 급수대에 준비된 콜라가 없어 직접 콜라 뚜껑을 따서 컵에 부어 마셨다. 이것도 어마어마한 시간 손실이었다.
2회전은 새로운 마라톤이었다.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몸이 맞이하는 여름의 마라톤, 화장실에도 한번쯤 들러야 하고, 무인 급수대에서 직접 물도 따라마셔야 해서 시간 손실이 불가피한데다 점점 지쳐서 달리기가 매우 힘들어질 것이었다. 완주와 기록,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가 어려워 보였다. 서브 4로 골인하려면 1회전 만큼의 속도를 유지해야 하는데 그게 결코 쉬워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과 무인급수대에서 최소한 2분을 써야 하기 때문에 1회전 때 보다는 더 속도를 올려야 했다. 달리는 거리가 늘어날수록 부정적으로 변해 가는 마인드. 그래, 꼭 서브 4를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4시간을 조금 넘기면 어때? 포기하면 매우 편해질텐데.
그래도, 그래도 한사코 부정적인 나 자신을 뒤집어보려고 애썼다. 무한긍정.
이 코스, 지붕이 덮여 있는 회랑, 그 회랑이 선사하는 그늘이 주는 혜택, 그 혜택을 받고 달리는 코스가 대한민국 어디에 또 있겠는가? 42킬로미터 가운데 26킬로미터나 불같이 내리쬐는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어디인가? 두 달이 아니라 한 달만에 달리는 게 또 어디인가? 1년이 넘게 괴롭힌 햄스트링 통증도 없고, 발바닥 통증도 이제 없지 않는가? 나보다 늦게 출발하여 더 뜨거운 날씨 속에서 달려야 하는 주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간밤에 새벽 1시 직전 90분 동안 제대로 자지 않았던가?
30킬로미터 쯤 달렸을 때 돌아오는 성하형을 보았다. 너무 여유가 있어 보여서 하나도 안 힘들어요라고 물었더니 하나도 안 힘들다고 소리쳤다. 1.1킬로미터를 남기고 고온과 오버페이스로 쓰려져 있던 명호님을 살피다 자전거와 부딪쳐 팔에 상해를 입어 시간을 잃고도 성하형은 3시간 49분 59초로 골인했다.
31.6킬로미터 급수대에서 콜라 두 잔을 챙겨 바로 마시고 돌아서는데 급수대 담당을 하시던 분이 예고없이 내 등쪽으로 물을 뿌렸다. 더위를 식혀준다고 물을 뿌려준 것인데 스냅이 잘못 걸려 그 물이 바지 아래쪽으로 날아 들었고 다리를 타고 빠르게 내려와 양말과 신발을 적셨다. 짜증이 밀려 왔으나 여유가 없어 군말없이 돌아섰다. 너그러워지려고 애썼다. 내게 도움을 주고 싶어 그랬던 것이잖아.
3시간 37분대로 골인하게 되는 인천고석도님이 바로 내 뒤에 붙어 있었다. 곧 추월당하겠구나 싶었다. 실제로 추월당하지는 않았다. 34킬로미터 남짓 달렸을 때는 화장실에도 다녀왔다. 자꾸만 떠오르는 화장실을 머리 속에서 지우는 것만으로도 달리기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소중한 시간과 바꾼 화장실 이용. 후반에 페이스를 잃지만 않는다면 아직도 서브 4는 가능해 보였다. 마지막 유인 급수대에서는 콜라에 물까지 마셨다. '잘 가요'라는 격려를 '감사합니다'라고 답변하고 만난 37.2킬로미터 지점. 잘 버티고 도달한 마지막 5킬로미터 지점. 10킬로미터 반환점. 진환님은 10킬로미터를 잘 완주하셨나? (1시간 04분으로 골인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나도 이제 10킬로미터 가운데 마지막 5킬로미터를 달리는 것처럼 피치를 올리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속도를 올리지 못했다. 지칠대로 지친 주자에게 마지막 결정타를 먹이기 위하여 기다리는 노천 구간이 점점 가까워졌다. 갑자기 흐려질 날씨는 아니라 각오해야 했다. 뜨거운 햇빛이 내리찍는 마지막 난코스에 들어섰다. 나 자신을 잘 달래어 발을 옮겼더니 어느덧 3킬로미터가 남았다. 왼쪽 다리에 붙인 근육 테이프는 두 장 가운데 한 장만 붙어 덜렁거리고 있었다. 땀 때문에 접착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2킬로미터 직전 무인 급수대. 그냥 지나쳤어야 했는데 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갈증이 너무 심해져 물 한 방울이라도 입에 적셔야 했다. 스탠 물통을 아무리 기울여 봐도 물이 나오지 않았다. 스탠 물통 옆에 놓인 플라스틱 물통의 뚜껑을 열고 물을 마셔야 했다. 여름에 마시는 온수, 뜨거워진 몸에 들이붓는 온수였다. 무인 급수대에서 시간을 너무 쓰면서 서브 4 달성이 불투명해졌다. 잔뜩 인상을 쓰며 마지막 남은 2킬로미터를 향하여 달려나갔다. 어느 누구도 찌푸린 내 얼굴을 보지 않았으면 싶었다. 시간은 너무 빨리 흐르고 있었다. 1킬로미터를 남기고 시계를 보았다. 3시간 54분 10초. 5분 50초의 여유. 너무 여유가 없었다. 서브 4는 달성할 수 있을까?
애썼다. 몹시 애썼다. 아쉽게 몇 초 차이로 서브 4 달성 실패. 생각하기도 싫었다.
끝, 그 끝이라는 생각 덕분에 어떻게든 막판에 최고 속도를 끌어내었다. 마지막 1킬로미터 랩타임 5분. 평균 5분 40초의 페이스. 마지막 1킬로미터만 5분 00초의 페이스. 화장실에 가야겠다고 배가 신호를 보내왔지만 꾹 참고 발을 옮겼다. 새벽에 과식을 하면서 허기지는 일은 없었지만 소화된 음식물이 몸밖으로 나오겠다고 성화를 부리고 있었다. 기록의 앞 숫자가 4로 바뀌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간섭포를 했으면 좋겠다는 열망이 있었다. 그 열망이 고통을 이겼다. 마침내 골인 아치를 지났다. 내 배번의 칩 인식음이 울렸다. 기록 계시원에게 내 랩타임부터 물었다. 얼마예요?
3:59:08.56
정말 간섭포였다. 풀코스를 완주한 서른 명 가운데 서브 4 완주자는 총 6명이었다. 1등 인천고석도님, 2등 달물영희님, 3등 성하형, 4등 고운인선님, 5등 로운리맨님. 6등 강건달. 서브 4 완주자 가운데 꼴찌 주자라 더 짜릿한 서브 4 완주자가 되었다.
물이 급했다. 시원한 생수 500밀리 두 통을 단숨에 비웠다. 배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맞아, 참고 있었다. 계단을 잡고 올라가 화장실에 앉았다. 배탈 때문에 제법 오래 앉아 있어야 했다. 숨이 차서 밀폐된 공간에 들어갔으면서도 마스크를 쓰지 못했다. 목 부분에는 심한 찰과상이 있었다. 더위에 입은 상흔이었다. 여름 풀코스는 이렇게 어김없이 내게 돌아왔다. 7월과 8월 피크를 지나 9월까지는 참고 견디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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