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람에게는 과거가 없고 불행한 사람에게는 과거만 있다. 부디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를. 너무 생생한 기억으로 사람을 옥죄고 있었다. 나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3시간 28분대로 골인하여 사뭇 고무된 바깥술님이 지난 여름 수술 이후 첫 서브 330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요. 지난 10월 14일 제가 3시간 27분대로 달릴 때 3시간 29분대로 골인하셨잖아요? 마라톤 TV 홈페이지 기록 게시판을 열어 확인시켜 드렸다. 바깥술님은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그건 329였으니 서브 330이 아니었다고 봐야 한다는 전혀 근거없는 논리를 폈다.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었구나라는 반응을 기대했는데..... 꾸준히 3시간 30분 페이스메이커를 뒤쫓던 바깥술님은 마지막 역주로 3시간 28분 20초로 골인했다. 그 역주가 참으로 오랜만이었기에 살짝 끼어 있는 가을의 기록은 무시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한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초반 5킬로미터까지 함께 달렸던 나는 스피드를 감당하지 못했다. 330 페메를 따라가는 바깥술님, 원희님 바로 뒤에 있었던 나는 덩달아 3시간 20분대에 들어갈지 모른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자신의 몸상태를 전혀 모르고.... 나같은 체구는 1킬로그램이 늘어날 때마다 풀코스 10분이 늦어진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쌀 3킬로그램 한 푸대를 지고 이전처럼 달리겠다고 믿은 주자는 꾸준히 시계를 의심한다. 빨리 달린 것같은데 이상하네. 5천원 짜리 시계라 고장 났나? 무거워진 몸을 옮긴다는 것은 전보다 훨씬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출발 전 달물영희님이 다리 괜찮으냐고 물었을 때 내가 답하기도 전에 연형님은 다시 선수로 돌아왔대라고 했던 말을 실현시키고 싶었을까?
영상 10도가 넘는 날씨 속에서는 반팔 티셔츠 한 장만 걸쳐도 되었을 것인데 미련하게 긴팔 티셔츠 두 장에 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반바지를 뺀다면 영하 10도에 입었던 복장 그대로였다. 장갑을 벗고 소매를 걷어 올리고 기를 써본들 바뀌는 것은 없었다. 바닥 곳곳에 버프와 장갑이 버려져 있었다. 그만큼 더운 날씨였다.
4분 30초로 달리는 것같다는 느낌이 들어도 실제로는 5분 10초가 걸렸다. 속도감을 잃은 지 오래였다. 거기에 풀코스 거리는 600미터 이상 길었다고 했다. 10킬로미터 지점 한강대교, 15킬로미터 지점 서강대교, 20킬로미터 성산대교, 25킬로미터 지점 마곡대교. 대교와 대교 사이를 누비며 달렸다. 날씨가 풀린 만큼 자전거가 많아져 사고에 대비하며 신경을 곤두세우기도 했지만 일산(一山)에서 일산(日傘)을 받으며 갈대밭 사이를 뚫고 달리는 운치있는 대회일 수도 있었다. 풀코스 중반은 시골을 누비는 느낌이었다. 눈을 들어 멀리 살피면 우뚝 솟은 행주산성이 평지의 단조로움을 지워주기도 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주로 아래쪽으로 시선을 내리면 주자들의 몸은 옷으로 덮여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맨살이 보였다. 중무장에서 해방된 복장. 누가 보아도 봄날의 마라톤 풍경이었다. 겨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뚱보는 야트막한 오르막도 힘들었다. 미세 먼지로 희뿌연 공기도 신경쓰였다. 하프까지는 나름대로 5분 20초 페이스를 지켰다. 하지만 중후반은 5분 40초가 넘는 페이스였다. 5킬로미터 구간 기록이 제공되는 대회라 현저하게 떨어지는 중반 페이스를 확인할 수 있었다.
-5킬로미터: 25분 36초, 5-10킬로미터: 26분 06초, 10-15킬로미터: 26분 30초, 15-20킬로미터: 26분 20초.
하프 이후 페이스는 현저하게 떨어진다. 버티기 레이스가 되었다.
20-25킬로미터: 27분 00초, 25-30킬로미터: 28분 37초, 30-35킬로미터: 28분 36초.
25킬로미터를 넘기 전에 3시간 45분 페이스메이커 무리들에게 추월당했다. 하프를 달려도 3시간 40분 페메에게 추월당하지 않아서 선전하고 있다고 자부했다가 낙담했다. 3시간 40분 페메는 없고 3시간 45분 페메가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고운인선님이 아직 아프다면 자기를 추월하지는 말라고 충고했다. 추월하고 싶어도 추월하지 못했다. 26킬로미터 지점에서는 오른쪽 다리에 붙이고 있던 테이핑을 떼어내었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긴급 소환했다. 햄스트링 부상을 대비하여 붙인 테이핑이 오히려 스피드를 제어할 수도 있었을 거야. 이제는 그냥 달리면 다리가 잘 나아갈거야. 그리고 옷 때문에 땀을 많이 흘리면 살은 제법 뺄 수 있겠다. 다음 대회를 위한 준비 과정. 이 대회 마감은 2월 18일 오후 5시였다. 2월 17일 풀코스를 마치고 다리 상태를 보고 조금 나은 것같아 물품을 현장에서 받기로 하고 마감 직전 참가 신청했다. 체중 감량을 위하여 출전한 대회라는 것을 기억해야 했다. 30킬로미터 지점 통과 기록이 일주일 전 30.1킬로미터 지점을 통과할 때보다 2분 늦었다. 그나마 35킬로미터부터 40킬로미터까지는 26분 33초로 직전보다 페이스를 끌어올렸다. 35킬로미터부터 40킬로미터까지는 어쨌든 빨라져야 했다. 그게 내가 할 도리였다.
로운리맨님은 햄스트링 부상을 잘 추스린 듯 초반에 매서운 스피드로 내달았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서브 320 정도만 하라고 말했는데 과소평가 발언을 했구나 싶었다. 날아가고 있었다. 페이스가 어마어마했다. 내가 늘 환영으로 보았던 서브 3 주자의 면모를 보였다. 두 번이나 마주쳤지만 단 한번도 반응하지 않았다. 꾸준히 손을 들며 말을 걸었던 나는 뻘쭘해졌다. 아는 사람과 인사를 나누며 달리는 내 레이스는 완주 지상주의 유유자적 달리기였다. 希洙형님, 안 나오신 줄 알았는데요. 춘효님, 왜 걸으세요? 원희님, 조금만 더 스퍼트해서 서브 330하세요. 상기님, 특전사님, 바깥술님, 연형님, 길석님, 장영님, 달물영희님, 윤동님, 태현님, 맹순여사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의외의 일이 있긴 했다. 레이스패트롤을 하는 헬스지노님이 반환해 오면서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33킬로미터 지점에서 헬스지노님을 추월했는데 바짝 따라붙기에 잠시 동반주를 하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100미터를 넘자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와 이름이 비슷한 강0식 주자와는 인사를 나누지 못해 아쉬웠다. 제 이름과 비슷한데 악수나 합시다. 그 정도는 했어야 하는데.
하프를 달릴 때까지는 3시간 39분을 목표로 했다. 30킬로미터에 가까워지면서 3시간 44분으로 목표를 하향조정했다. 공원으로 진입하는 레인이 가파른 오르막이라 다들 걷고 있었던 41킬로미터 지점에서는 일주일 전 기록보다 1초라도 빨리 들어가자고 목표를 다시 조정했다. 그 목표마저 달성이 어려웠다. 결과는 3시간 47분 00초. 2년 전 몹시 피곤한 가운데에서도 3시간 28분대로 달렸던 일을 믿을 수 없었다. 그건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2년 동안 무언가에 씌워 있었을 것이다. 저녁 때에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풀코스를 달린 사람의 옆구리가 달리기 전보다 더 부풀어 올라 있다는 사실에..... 이틀 전 쿠우쿠우에서 과식한 흔적이 풀코스를 달리고 나서야 드러난 듯..... 그래서 어쩔 것인가? 아직 햄스트링이 완전히 나은 것이 아니라서 인터벌 훈련도 못하고 훈련량도 늘리지 못하는데..... 체중에 짓눌렸는지 발바닥이 접혀서 피멍이 들어 있었다. 옷핀으로 찌르니 핏물이 쭈욱 빠져나왔다.
비공식적이지만 생애 200번째 풀코스를 완주하고 나니 동아마라톤 풀코스를 괜히 신청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애 10번째 동아마라톤. 다들 동아마라톤에서 자신의 기록에 도전하지만 나의 2019 동아마라톤은 다음 대회를 위한 훈련주로 삼아야 한다.
고운인선님이 찍어준 사진
여유는 매우 부린다.
3시간 47분 00초.... 이런 것은 어떻게 하지?
5킬로미터 25분 36초까지는 완연한 회복세였는데......
중반에 죽을 쑤었다.
2년 전에는 풀코스 1차 반환이 현재 2차 반환 지점쪽이었다.
바깥술님이 찍어서 만들어 준 사진...
매우 빨리 들어오신 덕분에 사진을 많이 찍어 주셨다.
마감 직전 신청하면서 조끼는 110 사이즈가 없었다.
여기 과자는 바깥술님이 별도로 주신 것.
화장실에 갔다가 짚으로 만든 돼지가 있어서....
완주 후 바깥술님과 마포농수산물시장에 들렀다.
어르신들이 많이 방문하는 곳이라 화장실에 지팡이 거치대가 다 있다.
이 식당에서 묵은지 고등어조림을 시켰다.
바깥술님과 즐겁게 나누어 먹었다.
커피는 지하철 플래폼 의자에 앉아서 마시고.....
간식을 받은 사진을 로운리맨님이 찍어주셨다.
로운리맨님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로운리맨님과의 마라톤 대회 뒷풀이는 추억이 되어 버렸다.
발바닥에 피멍이 들어 옷핀으로 찔렀더니 핏물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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