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 마라톤!

동아일보 2017 경주국제마라톤(2017/10/15)-FULL 152

HoonzK 2017. 10. 16. 13:13

<안나 카레니나> 스타일로 시작해 보자. 잘 달린 러너는 특별한 이유를 대지 않아도 행복해 보인다, 잘못 달린 러너는 못 달린 이유를 이것저것 대기 바쁘니 더 불행해 보인다. 잘못 달린 러너는 못 달린 이유가 너무 많다. 컨디션이 나빠서 못 달렸고, 또는 컨디션이 너무 좋아서 오버페이스를 하는 바람에 레이스를 망쳤다. 살이 쪄서 처음부터 굼뜨게 달릴 수밖에 없었고, 또는 살이 빠져서 후반에 기력이 달려 도무지 발이 나가지 않았다. 잠을 못 자다 보니 너무 졸려서 속도를 낼 수 없었고, 또는 잠을 너무 많이 자다 보니 잠이 깨지 않아서 형편없이 달렸다. 날씨가 너무 나빠서 달리는 데 지장을 받았고, 또는 날씨가 너무 좋아서 날씨의 혜택을 만끽하느라 빨리 달릴 수 없었다. 달리는 곳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또는 달리는 곳이 너무 마음에 들어 주변을 돌아보느라 달리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빨리 뛰고 싶어서, 또는 빨리 뛸 수 없어서 힘들었다. 불행한 주자로 이런저런 이유를 찾아 헤매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 2017 경주국제마라톤.

 

  2년 전 세운 경주국제마라톤 최고 기록을 21분 21초 단축하여 3시간 35분 51초로 달렸다. 불과 열흘 전 더운 날씨에 3시간 26분 51초로 달린 것보다 정확히 9분 늦어졌다. 어차피 예고된 것 아닌가? 블로그 벗들은 내가 3시간 25분 이내로 달릴 수 있으리라고 예상했지만 날밤을 새고 달리는 경주에서 무슨 수로 그렇게 달릴 수 있겠는가? 추석 연휴 막바지에 문서 작업에 박차를 가하면서 늦게 자고 야식에 콜라, 커피를 먹어 몸이 망가질 수밖에 없었다.

 

  2017년 10월 15일 00시 00분 경주, 포항행 심야버스를 타고 출발하여 휴게소에서 20분을 보내었는데도 3시간 30분만에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잠을 자려고 애썼다는 기억밖에 남지 않은 경주행이었다. 내리자마자 경주시민운동장 방향으로 걸었다. 걷다가 편의점에 들어가 도시락을 먹었고, PC방에 들어가 1시간 반 동안 있었다. PC방에서 휴식을 취한 것이 아니라 자판을 두들겼다. 마라톤대회장까지 이동하는 셔틀버스를 6시 30분까지 기다릴까 하다가 조금이라도 대회장에 빨리 도착하기 위하여 그냥 대회장까지 걸었다. 시외버스터미널부터는 3킬로미터를 이동해야 했다. 달리기도 전에 잠도 자지 않고 많이 걸어 미리 지치기에 충분히 성공했다. 수면 부족에 피로 더하기. 대회장 근처 벤치에 노숙자처럼 누워 있었다. 잠을 잘 수는 없었지만 길게 누우면 조금이라도 컨디션이 올라올까 기대하면서. 10월 중순 새벽인데도 모기가 물어뜯었다.

 

 어차피 휴식이 되지 않으니 허수아비님과 만난 후 달릴 준비를 했다. 허수아비님은 나를 보자마자 잠을 못 잔 티가 너무 난다며 걱정하였다. 짐부터 맡기고 경주시민운동장 2층 화장실을 이용했다. 달리기 전 바깥술님, 달물영희님, 찬일님, 허수아비님, 법규(정명진)님, 로운리맨님을 만났다. 이런저런 걱정에 잠을 한 시간도 못 잤다는 로운리맨님은 천천히 완주만 하겠다고 했다. 나야말로 천천히 완주해야 할 사람인데...... 때마침 날씨도 흐리고 서늘하여 마라톤 하기에 천혜의 조건이었다. 이런 조건을 부여받았는데도 내 상태가 극한의 노숙 모드를 따르고 있었으니 좋은 기록을 낼 수는 없었다. (극한의 노숙 모드는 로운리맨님 표현)


 허수아비님과 2킬로미터 지점까지 동반주했다. 첫 1킬로미터는 6분이나 걸렸고, 다음 1킬로미터는 5분 25초가 걸렸다. 4시간 페이스메이커보다 뒤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2킬로미터 지점부터 조금 속도를 올려 4시간 페메를 제치고, 저 멀리 초록색 풍선을 달고 달리는 3시간 40분 페메를 보면서 달렸다. 첨성대를 바라보며 황남초등학교를 지나 서라벌 네거리 6킬로미터 지점에 가서야 3시간 40분 페이스메이커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바깥술님이 내 앞에 있었다. 바깥술님보다는 앞에서 달린다고 생각했는데. 로운리맨님은 더 앞쪽에서 달리고 있다고 했다. 잠을 못 자서 피곤한 분 맞나? 사실 나는 로운리맨님이 나보다 뒤에서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로운리맨님이 마라톤 대회 직전에 하는 말은 거의 사실과 다르다. (호호호. 빈말을 결코 하지 않는 사람인데 마라톤 때만은 그렇지 않다.) 마라톤이라는 것이 달려 보기 전에는 결과를 알 수 없는 운동이라 그럴까? 몹시 힘들어 보였는데 원정 첫 3시간 20분대를 노리는 것이 틀림없었다.


 속도를 내어 달려왔지만 바깥술님 앞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바깥술님과 보조를 맞추면서 페이스를 체크해 드렸다. 5분 5초 페이스다, 5분 10초 페이스다, 이번에는 5분 이내의 페이스다. 이런 식으로. 바깥술님은 후반에 속도를 올리는 게 중요하다고 하였다. 내가 바깥술님과 보조를 맞춘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일 수 있었다. 휴식을 매우 갈구하는 몸을 3시간 30분 전후로 맞추다 후반에 스퍼트하여 3시간 29분대로 골인하자고 마음먹은 것은 어이없는 행동이었다. 10킬로미터 기록이 50분 30초이내였던 것은 잘 달린 것이었다. 이 사이 허수아비님, 제비한스님 등과 인사했다. 첨성대와 황룡사지 사이를 지난 후 바깥술님이 16킬로미터 표지판을 보며 15킬로미터 아니었느냐고 물었다. 16킬로미터가 맞아요라고 답했다. 1킬로미터 벌었네. 그만큼 바깥술님의 컨디션이 좋다는 의미였다. 주유소 화장실에 들렀다 나오면서 바깥술님과 거리가 벌어졌고 끝내 따라잡지 못했다. 20킬로미터를 넘었을 때 하프 주자를 따라 골인하고 싶었다. 지방까지 와서 하프만 달릴 수는 없었다. 참고 앞으로 나아갔다. 형산강을 왼편에 끼고 달리는 것은 지난 경주벚꽃 때와 같았다. 25킬로미터 지점까지는 5킬로미터 구간 기록이 늦어져도 25분대는 사수했다. 하지만 지쳐가는 몸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초반에 잘 달리다 걸어오는 찬일님에게 박수를 치며 응원했는데 찬일님은 답만 했을 뿐 다시 뛸 것같지는 않아 보였다. 50대 중반을 넘은 나이에도 1등을 자주 하여 나이먹은 마스터즈에게 큰 힘을 주시는 분이 무슨 일이람? 25-30킬로미터 구간에서 페이스가 26분 43초까지 떨어졌다. 27-28킬로미터 구간 사이에서 3시간 40분 페이스메이커 두 분이 순차적으로 나를 추월했다.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깥술님은 멀어졌고, 로운리맨님은 더 멀어졌다. 로운리맨님은 지친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잠을 못 자도 잘 달리게 훈련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주 연속 풀코스를 달리는 로운리맨님......


 3시간 20분 페이스메이커에게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거리를 두고 질주하는 특전사님과 법규님이 있었다. 은근슬쩍 오르막을 평탄한 것처럼 가장하여 내미는 주로가 한 둘이 아니었다. 알천축구장쪽까지 와서 보니 30-35킬로미터 구간 기록은 27분 12초까지 바닥친 상태였다. 불과 나흘 전 배낭을 메고 무거운 복장으로 훈련할 때에도 23분 20초로 달렸던 내가 어찌 이 지경이 되었나? 횡성사랑님이 먼저 인사를 해오는데 알아보지도 못하고 지나치기까지 했다. 오늘 상태가 좋지 않아 혼수상태를 헤매고 있지만 그래도 3시간 44분대로는 들어가야지라는 마음을 먹었다. 멀리 보면 좀 나을까 싶어 상체를 펴고 달려 보지만 부정적이 되어 버린 마음을 돌리기란 너무 힘들었다. 이제부터 스퍼트해야지 하는 마음을 먹었다가도 그러다간 쓰러져 큰 일 나지 하면서 마음을 다독였다. 제대로 된 화장실이 나오면 화장실에 들러야지 하는 마음밖에 없었다. 돼지국밥을 먹지 않았는데도 배탈 기미가 있으니 경주는 늘 사람을 힘들게 만든다. 특전사님은 12일 연속 풀코스를 달린 지 얼마나 되었다고 3시간 15분에 근접하는 페이스로 질주하고 있었고, 법규님은 발바닥이 아프다고 하면서도 3시간 20분대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4차 반환을 하고 돌아오는 주자 가운데 바깥술님이 있었다. 질주하고 있었다. 로운리맨님 앞으로 나선 것이었다. 오늘 로운리맨님 페이스가 좋아 후반에도 따라잡기 힘들다는 말을 했었는데..... 로운리맨님은 매우 지친 모습을 하고 손가락으로 X자 표시를 해 보였다. 반환하기 전에는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줄 알았다. 36.3킬로미터 반환점은 지나치게 멀었다. 35킬로미터가 넘었기 때문에 바깥술님이나 로운리맨님이 걷지 않는 이상 내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결코 따라갈 수 없는 거리였다. 반환하기 직전 뒤에서 매서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달물영희님이었다. 아이구 놀래라. 왜 이렇게 늦게 달려? 나를 꾸짖듯 물었다. 잠을 못 잔 티가 나는 거지요. 나보다 1초 쯤 빨리 달물영희님이 반환점을 돌았는데 그 순간 꽉 막혀 있던 내 스피드가 살아났다. 킬로미터당 5분 이내의 페이스로 돌아왔다. 30킬로미터 전후를 달렸을 때 이제 내 평생 다시는 풀코스에서 킬로미터 당 5분 이내로는 달릴 수 없을 거야라는 좌절감에 사로잡혔던 내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킬로미터마다 설치된 거리 표지판이 눈에 띄게 빨리 나타났다. 조금 달렸다 싶으면 38킬로미터, 39킬로미터 표지판이 나왔다. 주자들이 뒷걸음질쳐서 내 뒤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35-40킬로미터는 24분 28초로 달려 이전 5킬로미터 구간 기록보다 3분 가까이 빨라졌다. 마지막 2.195킬로미터는 10분 8초에 달렸다. 생애 최고 기록을 세웠던 동아마라톤의 10분 30초보다 빨랐다. 42킬로미터를 넘게 달린 후에야 3시간 40분 페이스메이커 두 분을 연달아 제쳤다. 이 모습은 2년 전의 데자뷰였는데 그때는 골인 직전 4시간 페이스메이커 두 분을 연달아 제쳤었다.

 

 골인 지점에서 허수아비님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주시고 물도 주셨다. 3시간 28분대로 골인한 바깥술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면 부족으로 후반에 퍼졌다는 로운리맨님은 3시간 33분 23초로 골인했다고 했다. 가족들과 함께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얼마나 아쉬웠으면 카톡에 '제길'이라는 추임새를 달았다.(이런 표현도 쓰시네요.) 나 역시 차에서 조금이라도 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최소한 금요일 밤 푹 잤으면 좀 나았을텐데. 토요일 아침 일어났을 때 고단하기 짝이 없을 때부터 문제였다. 차에서는 정말 피로하면 잠이 오지 않을 것같냐, 견딜만 하니까 잠이 오지 않는 것이야라고 나 자신을 달래기도 수 차례. 지방 마라톤의 경우 참가비 말고도 왕복 교통비를 더 투자하는데 거기에 덧붙여 숙박비까지 감당하지 않는 한 기록 도전은 요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끊임없이 든다.

 

 지금부터 내게 던지는 징계는 야식금지다. 사람들은 내게 살이 많이 빠졌다고 하지만 그런 게 아닐 수도 있다. 추석 연휴 말미에 문서 작업을 몰아치면서 야식 먹고 콜라와 커피를 마시는 습관이 생기면서 불과 몇 일 만에 옆구리살이 부풀었다. 흐리고 서늘한 날씨 속에서도 기록이 나빠진 것이 수면 부족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만은 아니라는 소리다.

 

 허수아비님은 아직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아 하프만 달렸다고 했다. 허수아비님과는 경주한식부페에서 식사하였다. 허수아비님은 신경주역까지 태워주시기까지 했다.(감사합니다.) 로운리맨님과는 신경주역에서 다시 만났는데 입에서 소주 냄새가 났다. 좌절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은퇴까지 거론했다. 아무래도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나인 것같은데 내가 위로하고 있었다. 내가 은퇴하면 몰라도 SUB-3가 유력해 보이는 분이 은퇴한다면 너무 아깝지 않은가?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회장까지 걸어가면서 만난 플래카드

 

몇 시간 뒤 이 지점을 지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7.9킬로미터 1차 반환 표지판

 

 

GS25 경주성건하나점에 들렀다. 아직 새벽 4시가 되지 않았을 때....

 

바싹고추장불고기도시락을 먹었다. 이것을 먹으나 돼지국밥을 먹으나 별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경주 지역 GS멤버십팝카드는 그림이 다르다.

 

컴짱PC방에 들어가 1시간 반 동안 있었다. 또 올지 모르니 회원가입까지 했다. 당초 계획은 의자에 앉아 두 시간 쯤 자는 것이었지만 블로그 포스팅만 열심히 했다.

 

이 코스는 세 번째. 2013년, 2015년에 이어......

 

하프코스는 풀코스의 전반부와 동일하기 때문에 힘든 풀코스 주자들이 하프코스만 달리기에 딱 좋았다.

 

 

간식 봉투에까지 대회 명칭이 찍혀 있었다.

 

날씨는 맑지 않았다.

 

바깥술님, 찬일님과 함께.....

 

내가 골인할 때까지 기다려준 바깥술님과 함께(허수아비님이 찍어주심)

 

허수아비님이 주신 물병을 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