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명이 탈 수 있는 동방명주호.
Oriental Pearl 6호.
2013년 5월 24일 금요일 오후 4시 30분에는 배에 올라 6인 1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운좋게 104호 3번 침상이 걸렸다. 안쪽이며 아래쪽이니 가장 편한 곳이다.
커텐을 치고 전등을 켜면 밤새도록 책을 읽고 글을 써도 방해를 받지 않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만약 2층 침대가 걸렸다면 오르내리는 데 애를 먹고 신경도 쓰였을 것이다.
같은 방에 들어온 6명 모두 압록강국제마라톤에 참가하는 사람들이라 이야기가 잘 통했다.
두 분만 코스가 다르고 네 명은 풀코스였다.
나와 연배가 비슷한 두 명은 모두 2009년 10월에 인천대교 개통기념 마라톤에 참가한 경험이 있었다. 나까지 모두 풀코스를 뛰었던 것.
나머지 분들과도 풀코스에 참가하지 않더라도 이 대회 저 대회 참가 경험으로 얽혔다.
81세의 어르신은 지난 5월 18일 숭례문 달리기 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고, 또 한 분은 대구국제마라톤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100킬로미터 울트라 마라톤 대회 경험을 이야기할 때는 나도 빠지지 않았다. 올해에만 벌써 풀코스 6주 연속 포함하여 10번, 하프코스 10번을 완주했다고 하니 내게 급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1시간 반쯤 줄기차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절친이 되어 버린 듯.
2013년 5월 24일 오후 6시 출항했다.
인천대교 아래로 지나간다고 하여 부랴부랴 갑판으로 나갔다.
선실 열쇠는 잘 챙겼다. 잃어버리면 5만원을 변상해야 하니......
선상에 오르니 나 혼자만 카메라가 없었다.
6시 14분에 인천대교 주탑 아래로 배가 지나갔다.
멀어지기 시작한 인천대교를 보며 1천 일 전 어떻게 달려낼 수 있었을까 감회에 사로잡혔다.
돌아오는 길에 주탑 아래 지점에서 진저리를 쳤던 경험은 세 사람이 똑같았다.
저녁을 먹고 난 뒤 자기만의 공간인 침대에 들어가 자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몇 가지만 메모한 뒤 The English Patient를 부지런히 읽었다.
자다 깨어 읽고, 새벽에는 갑판에 나가 읽고...... 담배 냄새에 쫓겨 선실로 돌아와 또 읽고.....
16시간 배를 탔다.
돌아올 때도 1박 2일 배를 타고 돌아온다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돌아올 때는 비행기로 올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돌아올 때는 105호 5번 침상이 걸렸다. 역시 아래층이라 좋았지만 문제는 화장실과 출입문 바로 앞에 자리 잡고 있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새벽에 다섯 명이 화장실을 한 번씩만 가도 나는 다섯 차례 깨어야 했다. 눈을 붙였다 싶으면 깨기를 반복하며 이리 누웠다 저리 누웠다 하였다. 10번 이상 잠을 깨면서 지독한 1박 2일 마의 16시간을 보내었다. 아무리 커텐을 치고 귀마개를 끼고 있어도 수면 방해를 이겨낼 수 없었다. 돌아올 때의 선실 구성원은 반이 마라톤을 뛰지 않은, 그야 말로 관광만 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3명이 있어 새벽에는 TV를 켜고 스포츠 녹화 중계를 보기도 했다. K리그 클래식 13라운드 제주와 서울의 경기. 볼륨을 작게 틀어 놓았지만 다 들렸다. 새벽 3시....으이구. 인천유나이티드의 경기라면 아예 잠을 반납하고 함께 시청이라도 하겠지만......
단동으로 갈 때는 선실에서 제법 잤다. 하지만 중국 동북 지방에서 3박하는 동안 총수면 시간은 14시간이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마라톤 풀코스도 달리고, 백두산에 올라갔다 오기도 하고, 혼강구대교에서 비를 맞으며 요령성과 길림성을 걸쳐 흐르는 압록강 지류 하로하(下露河)를 내려다 보기도 하고, 수풍댐도 보고...... 말이 되지 않는다. 나는 아예 잠을 포기했었다. 통화(通化)에서는 통화역 부근에서 머물다 보니 요란한 열차 소리와 자동차 클락숀 소리에 잠을 자지 못하고 전전반측하다가 새벽 4시에 일어나 The English Patient를 읽고 있지 않았던가?
그래, 어디까지 사람이 버틸 수 있는가 보자. 오기가 생겼다. 처음에는 못 자면 짜증이 엄청나게 쏟아졌는데 아예 잠에 대한 미련을 버리니 마음은 홀가분해졌다. 인천으로 돌아오는 배에서도 잠을 포기하니 견딜 수 있었다.
2013년 5월 24일 인천대교를 지나기 직전.....
2013년 5월 28일 오후 단동을 떠날 무렵.
부두에서는 물이 빠져 배가 진창에 걸렸다. 귀국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여 어르신들은 노심초사하며 배의 흘수선 아래만 내려다 보며 한숨을 쉬곤 했다. 결국 출발이 한 시간쯤 지연되었는데 승무원들이 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해상보안팀들이 예인선으로 동방명주호를 물이 많은 곳으로 끌어내는 수고를 해 주었다. 오후 4시 30분 출발이 오후 5시 30분 출발로 바뀌었지만 출발하기는 출발했다.
어르신들, 편안하게 누워 계신다. 안쪽이니 가장 아늑하고 방해받지 않는다. 갈 때는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편했겠는가?
아래쪽이 내 자리였다. 출입문과 화장실이 지척에 있다. 누군가 들어가 볼 일을 보면 생리현상을 치르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위의 침대를 사용한 휴학생의 카메라를 빌려서 찍은 사진이다. 이 분의 사진기를 빌려서 사진을 일일이 확인하고 추억을 되새길만한 사진을 체크하여 노트에 파일명을 적었다. 인천항에 도착한 지 몇 시간 되지 않아 사진을 보내 주었다. 이 블로그에 사진이 올라올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이 분 덕분이다. 사실 내 얼굴이 담긴 사진은 여든이 넘은 어르신께서 수 십 여장 찍어주셨는데 언제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중국의 관광지마다 내 사진이 담겼다. 사진 파일 전송을 손자들에게 부탁하겠다고 하며 내 이메일 주소를 적어 가셨는데 내가 그 사진을 확인하는 것은 언제일까?
내 명찰과 수첩, 그리고 The English Patient.
5월 29일 아침. 동방명주호는 비에 젖고 있었다.
인천대교를 지난다. 이번에는 늑장을 부리다 직접 볼 기회를 놓쳤다. 다른 분이 찍어준 사진으로 감상했다. 선실에 있다가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아니, 저게 뭐야? 인천대교 아니야? 어느새 인천에 다 왔네. 인천대교를 지나면 15분 내로 인천항에 도착한단 말씀.
배를 타고 오고 가는 데 걸린 시간이 32시간..... 이것은 좀 아니다.
한번의 경험으로는 괜찮지만 권장하고 싶지는 않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심양으로 온 뒤 3시간 버스를 타고 단동으로 이동하는 편리한 방법이 있는데..... 30만원 쯤 돈을 더 내어야 할 거다.
'잊을 수 없는 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K리그 클래식 14라운드 인천-성남 (0) | 2013.06.28 |
---|---|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먹다 (0) | 2013.06.17 |
渾江口大橋(혼강구대교) 주변을 내다보고 또 내다보고 (0) | 2013.05.31 |
K리그 클래식 11라운드 인천-강원 (0) | 2013.05.20 |
K리그 클래식 10라운드 인천-제주 (0) | 2013.0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