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 마라톤!

2023 시즌마감 42195 레이스(2023/12/02)-FULL 235

HoonzK 2023. 12. 6. 18:11

  오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2주 전 4시간 이내로 풀코스를 완주한 뒤 태도가 바뀌었다. 슬슬 뛰어도 이제는 SUB-4 따위 쯤이야, 이러고 있었다. 첫 1킬로미터는 5분 50초가 넘었지만 2킬로미터를 넘기 전에 함께 출발했던 4시간 페이스메이커를 추월했다. 근래 보기 드문 풀코스 페이스였다. 5킬로미터 쯤 달리고 나니 서브 4에서 1분 정도 여유가 생겼다. 곱하기  8! 40킬로미터를 뛰고 나면 8분 여유를 벌겠네. 쌀쌀하지만 이런 날씨는 오히려 달리기가 수월하니 후반에 역주하면 3시간 40분대도 들어가겠거니, 싶었다. 살집이 아직 많았기 때문에 명백히 오만한 오판이었다. 15킬로미터 이후 안양천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주자들이 왜 내 앞으로 치고 나올까, 그 이유를 진지하게 따져보지 못했다. 25킬로미터 급수대에서 바나나와 초코파이를 먹느라 속도를 늦추기가 무섭게 4시간 페메가 동반 주자들을 이끌고 앞으로 나가 버렸다. 5분 30초 안쪽의 페이스를 지키고 있다고 믿었던 내가 5분 40초 페이스 주자들에게 추월당한다고? 믿을 수 없었다. 25킬로미터 지점에서 추월당했다 하면 이미 끝난 것 아닌가? 점점 멀어지는 4시간 이내 완주의 가능성. 70미터까지 벌어진 거리를 좁힐 수 있을까? 어떻게든 따라가 보려고 애썼다. 주변의 경치는 잊었다. 앞쪽의 분홍색 풍선만 보고 있었다. '4:00'이라고 적힌 페메의 풍선.

26킬로미터 직전 반환해 돌아오는 인천고 마라톤 동호회의 기옥형님, 반환한 후에는 길석님, 춘효형님과 파이팅을 주고 받았다. 반환이 어디냐고 묻는 길석님에게는 25.6킬로미터일 거라고 알려주었다.

27킬로미터 지점. 내내 앞에서 달리던 인천고 기옥형님이 벤치에 앉아 파스를 바르고 있었다. 통증에 대비하여 미리 젤을 챙긴 것 같았다. 30킬로미터 지점은 손기정 평화마라톤 때보다 2분 가량 늦었다. 분발해야 했다. 분발하려고 한다고 해서 분발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지만 분발할 마음이라도 갖고 있어야 반전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치열한 내적인 분투가 실제로 외적인 실적으로 표출되기는 했다. 31킬로미터 지점에서 4시간 페메에게 30미터까지 따라붙었고, 32킬로미터 지점에서는 페메 무리에 뒤섞일 수 있었다. 이때부터 악착같은 페메 그림자 밟기가 시작되었다. 페메 그림자에서 떨어지면 서브 4는 물건너 가는 것이었다. 에너지 고갈 상태였지만 힘들 때 이겨내었던 기억을 한사코 끌어내었다. 초반에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댓가는 얼마나 호된 것인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면서. 
 
 겨울철이면 통과의례인 발뒤꿈치 갈라짐이 심해져 있었다.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였다. 조금 두꺼운 양말에 춘마 에디션 마라톤화를 신었다. 그만 신어야지 해 놓고 2년이 넘었다. 출발할 때 체감온도는 영하 4도 쯤. 그래도 반바지를 입었다. 출발할 때는 춥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반바지가 달리기에 수월할 것이었다. 백 명의 한명 꼴로 반바지가 보였다. 웃도리는 긴팔 티셔츠, 장갑 착용. 버프로 머리와 귀를 감싸고, 시린 입은 마스크로 감당하고. 마스크를 벗어 팔뚝에 걸었다가 입이 시려워 다시 쓰기도 했다. 목에 두른 버프를 끌어올려도 되겠지만 보온으로 마스크만한 게 없었다. 추울 때는 마스크가 방역용이라기 보다는 보온용으로 딱이었다. 덮어쓴 비닐은 4킬로미터 이상 달린 후에야 벗었는데 올해 들어 가장 오래 입고 있었던 것이라 춥긴 추웠던 모양이다.


성산대교를 지나 마곡대교 방향으로 달려갔다가 반환하여 안양천 합수부까지  오면 직진하는 하프코스와 우회전하는 풀코스가 갈렸다. 15킬로미터 지점이었다. 하프 주자는 여의도이벤트광장까지 직진하면 끝이지만 풀코스 주자는 우회전하여 안양천 상류쪽으로 달려야 했다.  안양천변에서 하프 거리를 채우게 되어 있었다. 주로는 아주 평탄하여 13일 전 손기정 대회와 비교하면 난이도가 최하 수준이었다. 안양천에서는  공사 구간이 아니라면 산책로를 이용하게 되어 있었다. 자전거 진입 금지 장애물을 피해 달리는 어려움이 없게 주최측에서는 바리케이드를 모두 빼어 놓았다. 이걸 다? 일일이?

25.6킬로미터 쯤 달리고 반환해 돌아오면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말이 쉽지 몸은 쉽지 않았다. 도림천 합수부 하프 직전 20킬로미터 쯤 달리고 화장실에 갈 수밖에 없었는데 한강의 지류변에 설치된 화장실은 범람을 대비하여 모두 높은 둔덕에 있었다. 화장실에는 한번 다녀왔지만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두번 다녀온 만큼이나 시간이 걸렸다. 
 
 출발 전에는 짐을 맡기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내 뒤에 선 사람과 20분 이상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Oh훈성님은 풀코스에 데뷔한다고 했다. 그는 내게 물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요? 제가 풀코스 처음인데 민소매를 입고 있어요. 겨울에 민소매라니?  나는 여름에도 민소매는 안 입는데. 대리 출전까지 포함해서 237번의 풀코스에서 민소매를 입은 것은 딱 한번. 겨울에 민소매라니? 그것도 생애 첫 풀코스라면서요, 보온에 신경써야지 그러면 탈나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지만 아무리 추워도 민소매 복장을 입고 달리는 헬스지노님 생각이 나서 상관없다고 했다. 오늘은 기온이 오른다는 예보도 있으니. 달리다 보면 민소매 착용 주자들을 보게 될 것이라며 격려했다. 하프 참가 경험은 코로나 유행 전 2회. 30킬로미터는 훈련삼아 최근에 뛰어 보았다고 했다. 첫 풀코스는 서브 5가 목표라고 했다. 그럼 킬로미터당 7분 7초대로 꾸준히 뛰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30킬로미터 이후 새로운 달리기를 경험하겠지만 이번에 넘어서고 나면 다음번이 훨씬 수월해질 것이라고 귀띔했다. 내가 주로 달리는 곳이 어디인지, 또 내년 봄 출전할만한 대회가 어떤 게 있는 것까지 물었던 훈성님에게는 주로에서 두 차례 모두 내가 먼저 인사를 보냈지만 처음에는 쳐다보지도 않았고, 두번째는 보고도 반응하지 않았다. 저 사람이 왜 내게 인사하는걸까, 의아해 하는 반응을 보였다. 달리는 사이 내 얼굴을 잊어 버렸거나 주로에서 인사를 주고 받는 데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 분은 끝까지 페이스를 잘 유지해서 생애 첫 풀코스를 4시간 56분대로 완주했다.
 
 자신을 너무 믿어서 문제였지만 이제는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어떻게든 서브 4는 해보고 싶었다. 전날 아세탈님에게 올해 가장 빨리 달린 풀코스가 되면 좋겠다고 했지만 그것은 그저 바램이 되고 있었다. 서브 4만 해도 감지덕지한데 4시간 싱글을 해도 괜찮겠다는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서브 4 달성 여부를 4시간 페메를 끝까지 따라가느냐, 마느냐에 걸었다. 다 놓아 버리고 싶기도 했지만 그럴 경우 대회를 마친 후 감정 수습이 너무 힘들 것이었다. 어떻게든 서브 4 실패의 핑계거리를 찾아 헤멜 내 자신이 너무 비루해 보였다. 완주 후 힘든 것 보다는 완주 중 힘든 게 낫다고 몇번이고 나 자신을 설득했다. 요즘은 내 말을 잘 듣지 않는 몸이라고 해도 페메를  붙들고 떨어지지 않으면 될 것이라고 아우성쳤다. 손기정 평화마라톤 대회에서 성하형에게 등을 떠밀려 마침내 자기 기록을 깨뜨리고 완주한 Hyeri씨처럼 나도 페메에게 도움을 받고 있었다.
 
36킬로미터 지점. 한강을 만났다. 이제는 치고 나갔으면 좋겠지만 치고 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림자처럼 페메에게 따라붙기만 했다. 한강에 들어서자마자 불어닥치는 맞바람이 차갑게 느껴졌다. 이 맞바람을 등지고 달렸으니 초반에 빠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강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페메 그룹 구성원이 확 줄었다. 따라가는 사람은 나를 포함하여 세 사람밖에 없었다. 37킬로미터 지점. 페메 한 분이 이제 5킬로미터 남았다. 5킬로미터는 조깅 나왔다고 생각하면 편하게 달릴 수 있다고 힘을 주었다. 따라 붙기가 몹시 힘들었지만 주법 바꾸기, 마음 달래기, 멀리 보기, 딴 생각하기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버티고 있었다. 이렇게 힘든 것이 일주일 동안 세 번 날새고, 한밤중에 자꾸 먹게 되니 살이 빠지지 않아 그런 것 같았다. 치고 나가야 하는데 38킬로미터 지점에서도, 39킬로미터 지점에서도 페메와 함께 있었다. 그러다 40킬로미터를 눈 앞에 두고 튕겨져 나갔다. 이건 정말 못할 노릇이었다. 힘들지만 인상을 쓰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앞의 몇 명을 제쳤다. 40킬로미터 지점을 통과했다면 더 이상 거칠 게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서강대교, 마포대교. 아득히 멀었던 다리가 이내 내 뒤로 사라져 버렸다. 1킬로미터 남았을 때 주최측에서 마련한 응원 문구가 눈에 확 들어왔다. 표준어가 아닌 '퐈이팅'이었다. 다른 대회보다 월등히 큰 거리 표지판 덕분에 페이스 파악이 용이했는데 응원 문구까지 주최측의 배려가 남달랐다.  올해 달린 다섯 번의 풀코스 중 최고 기록이 아니라는 게 아쉬웠지만  카메라를 보면 V자도 날리고 엄지척도 했다.
 
3:58:20.29

2주 전보다 1분 쯤 늦었지만 서브 4는 달성했다. 킬로미터당 5분 37초 페이스가  5분 38초 페이스가 된 것이었다. 5년 전 안될 것 같았는데 3시간 49분대로 달리고, 4년 전 안될 것 같았는데 3시간 29분대로 달렸던 것과 너무 비슷한 패턴이었다. 이번에도 4시간 페메에게 추월당할 때까지는 3시간 58분대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4년만에 똑같은 전화번호로 기록을 통보받았는데 29분이 늦어졌다. 4년만에 열린 대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무슨 일은? 코로나 대유행!

 
 

 

 
 

 
 

63빌딩 방향으로 한컷
구름 사이로 맑은 하늘이 보이니 맑았다 흐렸다 할 날씨를 예상할 수 있었다
RUNNERS라고 써야 할 것을 RUNNES라고 잘못 썼다. 어떻게 이런 실수를 저질렀을까?

 

비싼 비빔면 번들을 두 개씩이나 제공했다

긴팔 티셔츠

 
 

기념품인 후드티를 입어 보았다. 좀 무겁긴 하지만 착용감과 보온성이 뛰어났다

 
 

힘들다면서 V자를 날리고 있다.

 

엄지척하고 있는 것. 맞다.

 

악착같이 여유를 부려보는 골인 직전의 모습. 골인한 후 허리춤에 끼웠던 장갑 한짝을 떨어뜨리는 일이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알려주어서 되찾을 수 있었다. 허수아비님의 선물을 잃어버릴 뻔 했다.

※ 배번을 수평으로 달지 못했다는 사실을 달리는 도중 화장실 거울로 보고 알았다. 다시 달만한 여유가 없어 그냥 두었다. 찍힌 사진을 보니 심하게 비뚤어져 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앞으로는 좀더 신경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