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단 오르막을 넘어갔다 와야 한다. 겨울비를 맞아야 한다. 집안에 닥친 불행을 잊어야 한다.
긍정적인 요소라곤 오후 2시에 출발한다는 것 하나.
잠실청소년광장에서 구리암사대교 방향으로 달려갔다 오다 보면 마스터즈들이 꺼리는 속칭 아이유 3단 고개를 넘어야 한다. 힘든 만큼 기록을 깍아먹는 구간이다. 12월 첫날 대회 출발 전부터 한강변이 겨울비로 젖고 있었다. 먹구름 덮인 오후 2시는 이미 선셋(SUNSET)된 것처럼 어두웠다. 대회 출전을 접을까 몇 번이고 갈등했다. 물품이 현장 수령이라 나온 것은 아니었다. 참가비 2만 5천원이야 적선했다 치면 그만이었다. 의욕과 희망을 접어 버리고 형제들과 함께 병실 앞에 죽치고 앉아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나 자신을 도전에 내몰 필요가 있었다. 햄스트링 부상을 입은 지 만 1년이 되었다. 여기서 물러서면 그 누군가처럼 목숨을 내려놓기밖에 더하겠는가?
풀코스 종목이 없어서 아는 사람이 전혀 없을 줄 알았다. 딸을 데리고 대회장에 나온 여자분이 나를 불렀다. 앞에 가는 아저씨! 달해아름다워님이었다. 아직 내 이름을 외우지 못했나 보다. 늘 버프를 쓰고 달리는 아저씨로 기억하고 있을 뿐. 그리고 풀코스 100회 기록 가운데 해외 마라톤의 비중이 50%를 상회하는 효준님. 반환한 후 만난 안산광희님. 1시간 40분 페이스메이커 윤도경님. 그런대로 인사를 나눌 분이 있었다.
청소년광장에서 잠실종합운동장으로 이어지는 횡단보도를 수도 없이 건넜다. 물품을 받기 전, 물품을 받은 후 스트레칭하기 전, 물품보관봉투를 받아 옷을 갈아입기 전, 물품을 담아 물품보관소에 짐을 맡기기 직전, 화장실에 들르기 직전...... 어찌 보면 비를 피하기 위하여 지붕 있는 곳으로 끈질기게 찾아 들어갔던 것이다.
출발 5분 전 아치 앞에 섰는데도 참가 인원이 적어 거의 기다리지 않고 바로 출발하게 되었다. 효준님과 보조를 맞추었다. 비옷 입고 달리는 것은 생전 처음이라는 것이 둘다 똑같았다. 2시간 페메도 옆에 있었다. 첫 1킬로미터 5분 30초가 나왔다. 2시간 이내로만 뛴다면 만족하겠다고 했다. 암울한 표정을 바이저버프의 창이 가리고, 마스크처럼 끌어올린 버프가 가리고, 차가운 겨울비가 가렸다. 지난 겨울 이후 처음으로 긴팔 티셔츠를 입고 장갑을 꼈다. 아랫도리는 반바지였다. 효준님이 내 시계를 보고 랩타임이 되는 것이냐고 물었다. 자신과 같은 가민 시계냐고. 내 시계는 다이소에서 판매하는 최고가 5천원짜리 시계일 뿐이었다. 구간마다 페이스는 그냥 외운다고 했다. 다음 1킬로미터는 5분 20초에 달렸다. 2시간 페이스메이커가 속도를 늦추는 사이 2.5킬로미터 급수대에서 비옷을 벗어 던지고 물을 마셨다. 그리고 나 혼자 달렸다. 빨리 달리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그저 견디어내겠다는 각오만 하고 있었다. 이따금 지난 10월 9일 1시간 42분 36초 기록을 깨뜨려 올 시즌 개인 최고 기록을 경신하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겼지만 그 욕심도 이내 접었다. 코스도 쉽지 않은데......그까짓 기록. 완주만 해도 되는 것 아닌가?
5킬로미터 급수대는 10킬로미터 반환 주자와 충돌할 위험이 있었다. 주자의 왼편에 있었다. 부딪힐까봐 그냥 지나쳤다. 7.5킬로미터 급수대에서 게토레이로 갈증을 해소했다. 5킬로미터는 25분 21초에 통과했다. 이 페이스라면 10킬로미터 50분 42초, 20킬로미터 101분 24초, 하프는 1시간 45분이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감지덕지한 기록이었다.
그저 달리고 있을 뿐인데 앞의 주자들이 속속 내 뒤로 물러났다. 달해아름다워님마저 내 뒤로 왔다. 내가 추월한 사람이 달해아름다워님이 정말 맞는가 싶어 뒤를 돌아보기까지 했다. 반환하기 전 나를 추월하여 나간 하프 주자는 삼성전자의 태현님이 유일했다. 이 분은 1시간 33분대로 골인했고 4분 늦게 출발했다고 했다. 비를 맞으며 조경하는 분들이 있었고, 우산쓰고 산책하는 분들이 있었다. 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전거를 모는 분들도 있었다. 각자의 길을 가고 있었다. 나는 빗길을 달리고 있었다. 1킬로미터 구간 기록이 4분 50초 이내로 들어와 깜짝 놀랐다. 햄스트링 통증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하고 옆구리에 달린 살이 속도를 제어한다는 느낌을 지울 길이 없는데 어떻게 이런 스피드를 견딜 수 있는지 믿을 수 없었다. 7킬로미터 지점을 지날 때 이미 평균 5분 이내 페이스로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5킬로미터 이후 속도를 얼마나 끌어올린 것인가? 정말 기대하지 않았는데..... 3단 고개를 넘으면서 크게 힘든 것은 없었다. 오르막에서 자주 발생하던 햄스트링 통증은 매우 약하게 느껴졌다. 내 걱정은 온통 내리막이었다. 내리막 빗길에서 미끄러져 다치지는 말아야 했다. 나까지 다쳐서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면..... 절대 안되었다. 가속도가 붙기 마련인 내리막길에서 한사코 속도를 늦추었다.
반환하기 직전 윤도경 1시간 40분 페메와 인사했다. 51분 13초로 돌았다. 온 속도를 갈 때도 유지한다면 1시간 42분 26초. 10초 차이로 올해 최고 기록을 세우게 된다. 앞에 있는 1시간 40분 페메를 따라잡는다면 올해 처음으로 1시간 30분대의 기록에 들어가게 된다. 상상으로는 무슨 일인들 못할까? 10.55킬로미터를 51분 13초에 뛴다는 것은 킬로미터당 4분 51초 페이스를 뜻했다. 근래 보기 드문 스피드로 초반 레이스를 꾸렸는데 그 스피드를 후반에도 이어갈 수 있을까? 그런데 더 빨라지고 있었다. 특별히 애쓰는 것도 아닌데 믿어지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분명히 울고 있었다. 하늘이 대신 울어주고 있어서, 몸이 한없이 젖어서,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4분 30초 페이스가 꾸준히 나왔다. 12.195킬로미터를 1시간만에 통과했다. 남은 9킬로미터를 40분 이내로 달려야 1시간 39분대가 가능했다. 계산이 되지 않았다. 굳이 빨리 달릴 필요가 없다고 되뇌였다.
옷이 비와 땀으로 젖어가면 젖어갈수록 아득하게 멀었던 1시간 40분 페메가 점점 가까워졌다. 15킬로미터를 지나기 직전 젊은 주자 한 명이 내 앞으로 치고 나왔다. 저도 늦게 달리는 것은 아닌데 정말 대단하시네요. 내 말에 살짝 반응하고 앞으로 나가는데 1시간 40분 페메를 바로 뒤로 보내어 버렸다. 나중에 이름이라도 꼭 알고 싶은 청년이었지만 이후에도 만나지 못했다. (전체 참가자 기록을 보면 나보다 늦게 반환하고 먼저 골인한 사람은 없는 것으로 나와 있다. 출발 자체가 10분 늦은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1시간 26분대 완주자였다. 이 사람이 아닐까 싶다.)
17킬로미터를 달렸을 때 드디어 윤도경 페메 옆에서 달릴 수 있었다. 4분 45초 페이스로 계속 달리면 1시간 39분대로 들어갈 수 있으며 지금 현재 그렇게 달리고 있어 여유가 있다는 페메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일부러 늦게 달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ROTC출신인 이 분과 군대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가 3킬로미터가 남았을 때는 치고 나갔다. 어떻게 신발을 세탁하지 않아도 될까 궁리하며 물웅덩이를 피하던 내가 더 이상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젖든 말든. 집안의 불행까지 깡그리 잊었다. 오로지 달리기만 했다. 2킬로미터 남았을 때 1시간 30분이라면 드디어 1시간 39분대 기록으로 되돌아가는 것인가? 앞 주자의 티셔츠에 새겨진 글귀는 'No Mercy'였다. 그래, 자비는 없어. 이를 악물었다. 그 주자도 제쳤다. 햄스트링 통증을 느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비를 맞아 축 늘어진 듯한 주로를 마름질하듯 밀고 나간 내게 주어진 것은 1시간 38분대의 기록이었다.
1:38:47.60
1시간 30분대 진입은 13개월만이었다. 하프 초반을 51분 13초, 킬로미터당 4분 51초 페이스로 달렸던 내가, 하프 후반을 47분 34초, 킬로미터당 4분 30초 페이스로 달려서 얻어낸 기록이었다. 자랑할 수 없었다. 오히려 숙연해졌다. 어쩌다 얻은 기록일 수 있었다. 늘 이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하프에서 1시간 38분 47초로 달릴 경우 피터 리겔은 풀코스에서 3시간 25분 57초로 달릴 수 있다고 했지만 다음 풀코스에서 그런 기록을 세울 수는 없으리라. 피터 리겔 공식은 내게 맞은 적이 거의 없으니까. 20킬로미터 넘어 생긴 햄스트링 통증은 몸을 어떻게 뒤틀어 놓을지 모르니까. 달리기는 끝났다. 이제 대회장을 서둘러 떠나야 했다. 집에 들어가 쉬지 못한다. 가봐야 할 데가 있으니까.
비옷을 여미고 버프를 끌어올리며 출발하고 있다. 바로 뒤쪽에서 효준님이 따라붙고 있다.
욕심없이 완주하겠다는 마음으로 우중주를 즐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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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암사대교 구간을 지나게 된다. 아이유 3단 고개를 피할 수 없다.
잠실종합운동장역 7번 출구로 나가 천천히 걸었다.
이정표가 있어서 대회장을 찾아가기 수월했다.
12월의 노숙자
잠실청소년광장에 대회장이 꾸려진 것이 보인다. 비는 끈질기게 내린다.
하프 전용 마라톤화를 신었다. 비옷도 한 장 받았다.
대회 파장 분위기.... 비는 그치지 않고 있었다.
간식 봉투를 받아 가방에 넣고 내내 다녔더니 바나나가 곤죽이 되어 버렸다.
현금으로 참가비를 송금했더니 영화무료관람권 두 장을 받았다.
공식 기념품은 여행용 폴딩가방.... 색은 연두색으로 선택했다. 지난번에는 하늘색이었으니......
토요일요마라톤에서 지급한 메달인데 하프가 스티커로 되어 있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는 기록을 받아들었다.
이 기록을 검색해 알게 된 성하형이 다음날 문자를 보내왔다.
어제 완전히 날았네요.
예전의 몸으로 서서히 진입하는 군요.
기분 좋아요.
제 기록을 검색해 보셨네요. 감사합니다. 1년 전의 기록으로 완전히 돌아간 건지 모르겠지만
첫 1킬로미터는 5분 30초였는데 어떻게 이렇게 뛰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축하합니다.
일시적으로 잘 뛴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이제 몸 만들기에 성공한 것 같습니다.
부상도 완쾌한 것 같구요.
넘 무리만 안 하면 될 듯 합니다.
조심스러운 마음입니다.
대회를 마치고 돌아갈 무렵 잠실실내체육관쪽으로 비슷한 연배 또는 그 이상의 남녀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오후 5시에 내일은 미스트롯 공연이 있다고 했다.
정미애 플래카드는 보이는데 송가인, 홍자의 플래카드는 보이지 않았다.
지하철 역사 안에는 송가인을 응원하는 깜박이 머리띠를 파는 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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