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을 때에는 나이든 분이 좀처럼 낫지 않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다. 나도 그분만큼 늙을 줄 몰랐다. 아파도 이렇게 회복이 더딜 줄은 더더욱 몰랐다.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달린다. 기온은 영상과 영하의 접점을 오가는데 바람도 잦아들어 겨울이라도 반바지를 입고 달려도 좋을 날씨다. 하지만 훈련용 트레이닝복 긴 바지를 입는다. 다리 놀림이 제한되겠지만 어차피 빨리 달리지도 못할 몸이다. 웃도리도 기어이 두 장을 걸친다. 땀을 많이 흘릴 수도 있지만 그만큼 살은 뺄 수 있으리라.
풀코스로 벌써 다섯번째 출전하는 한강시민 마라톤대회이다. 올해는 무료 참가다. 지난 추석 당일 공원사랑 마라톤 참가자는 이 대회에 무료로 참가할 수 있다. 주최측에게 무료 참가로 처리해달라는 말을 도저히 할 수가 없다며 바깥술님이 내게 부탁해 왔다. 나는 어렵겠네. 그냥 참가비를 낼까 하는데 대신 말 좀 해 주려나? 아니, 왜 그 말을 못하세요. 사장님이 먼저 약속한 사실인데요. 10월 3일 참가자는 11월 25일 자원봉사사랑마라톤 참가 무료, 추석 대회 참가자는 12월 16일 한강시민마라톤 참가 무료라고 했는데. 바로 해결해 드리지요. 단 몇 분만에 해결했다. 추석에 마라톤 참가한 사람들은 한강시민 마라톤대회가 무료라고 해서 전화드렸어요. 건달과 바깥술... 두 사람 입금 처리해 주세요. 그리하여 우리 두 사람은 이 대회 참가비를 내지 않고 배번을 달게 된다. 공짜 참가인데다 힘든 달리기가 예상되니 뛰지 말까 하는 유혹도 생겼지만 결국 나는 주로에 있었다. 2015년부터 4년 내리.
오른쪽 다리 스트레칭을 해 보지만 몹시 당긴다. 이래서는 힘들다. 결국 오늘도 기를 쓰고 달려야 간섭포이다. (간섭포=간신히 서브 4: 3시간 50분대 완주) 왜 이렇게 속도가 나지 않느냐며 쉴새없이 자책하고, 다리가 잠시 마비된 틈을 타 멋모르고 속도를 냈다간 부상이 심해질 것이니 속도 내기를 자제하며, 굼뱅이같은 몸짓으로 눈이 쌓인 길을 달린다. 3주 전 같은 코스에서 3시간 24분대로 달렸던 인간은 내가 아닌 듯 싶다. 눈내리는 날 대회에서 함께 뛰고 싶다는 로운리맨님의 25개월 전 멘트는 마침내 실현된다. 하지만 로운리맨님은 하프를 달린다. 나를 추월해 가기에 1시간 29분대를 찍는 것이냐고 물으니 눈 때문에 어렵다고 한다. 천천히 달리는데도 여기저기서 아이쿠, 미끄러워. 빙판이야. 이런 말이 터져 나오는데 더 빨리 달리기는 어려우리라. 발놀림이 느린 대신 입놀림은 빠르다. 모처럼 고운인선님과 서브 4 잡담주를 했다. 고운인선님은 뇌경색으로 죽기 직전까지 갔었는데 마라톤으로 새 삶을 얻었다고 했다. 한편의 영화같은 사연을 듣고 내 일화도 꺼내놓으면서 함께 달렸다. 눈발은 운치있게 흩날리며 우리가 달릴 길을 열어주었다. 우리는 4시간 페이스메이커보다 조금 앞에 있었다. 5킬로미터를 27분대, 10킬로미터를 55분대에 통과하면서.
6킬로미터 이후에 만난 안양천변 주로에는 눈이 내리는대로 쌓이고 있었다. 기온이 오르고 있어 떨어지는 족족 녹아버릴 줄 알았는데 안양천은 한강보다 기온이 낮은 듯 했다. 하프 주자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상기님, 로운리맨님, 원희님. 상기님에게는 풀 아닌 하프를 뛰니 반칙이예요라며 농담을 했고, 원희님에게는 풀 아닌 하프를 뛰느냐고 진지하게 물었다. 로운리맨님에게는 파이팅을 외쳐 답은 받았는데 과연 나를 알아보았을까 싶었다. 안경에 서리가 끼여 앞이 보이지 않을텐데. 상황이 어렵다고 기록 경신 도전을 하지 않을 분은 아니니 오늘 드디어 1시간 29분대 들어갈 수도 있었다. 3년 전 이 대회에서 처음 인사를 나눈 것이 바로 이 대회인데.....
눈길을 달리고 있지만 다시 안양천으로 돌아왔을 때는 두 시간 후일테니 눈이 다 녹아서 달리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었다. 하프 반환점에서 고운인선님을 단단히 챙겼다. 절대 여기서 반환하시면 안됩니다. 3주 전 자원봉사 사랑마라톤에서 하프 주자와 함께 반환하는 바람에 나 홀로 하프를 2회 왕복하면서 애를 먹었던 분이라......
도림천은 허옇게 얼어 있었다. 고운인선님은 물에 젖은 자전거도로로 가고 나는 얼어붙은 산책로로 갔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눈길이라 자꾸 미끄러졌다. 12.5킬로미터 급수대에서 콜라 한 잔을 마시고 화장실에 들렀다. 그 이후 고운인선님에게서 떨어졌다. 인천고 길석님이 제치고 나가며 화장실 갔다 왔느냐며 물었다. 10킬로미터를 전후하여 제쳤던 뚱뚱 반바지 주자에게도 추월당했다. 도림천 고가 아래를 달리면서 바닥이 미끄러울 일은 없어졌지만 내 속도는 떨어지고 있었다. 오른쪽 다리 햄스트링 쪽에 세로로 테이핑을 했지만 과연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었다. 오히려 움직임을 제한하는 것은 아닌지.... 부상 때문에 운동량이 줄어든 만큼 체중이 늘어 몸을 앞으로 운반하기가 힘든 것같았다. 쌀포대 몇 개를 몸 주위에 붙이고 달리는 느낌이었다. 체중 때문에 몹시 고생하는 분 가운데 아세탈님이 있었다. 아세탈님은 10킬로미터 종목에 이틀 연속 참가했는데 잘 뛰셨나? 어제 선물을 주셨는데 오늘까지 선물을 주실 줄은 몰랐다. 일부러 이마트 쇼핑까지 하신 듯. 오늘 기습 선물을 받은 로운리맨님은 나보다 충격이 클 것같은데...... 아, 10킬로미터 종목에 참가한 박원순 서울시장님은 잘 달리셨나?
16킬로미터 가까이 달려가 도림천 건너편을 보니 한데 모여 달리는 분들이 있었다. 3시간 45분 페이스메이커 그룹이었다. 박연익님과 류성룡님이 이끌고 있었다. 바깥술님이 나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때 함께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할 것도 없잖아. 후반에 맹렬하게 따라붙어 놀라게 해주어야지. 그렇게 각오하고 16.5킬로미터 징검다리 데크를 건넜는데 현실은 4시간 페이스메이커 그룹에 바짝 쫓기고 있었다. 불과 몇 십 미터가 떨어져 있지 않았다. 4주 연속 4시간 페메를 맡고 있는 한필희님을 비롯하여 내가 아는 분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상현님, 윤동님, 태현님, 한구님, 希洙형님..... 당장 4시간 페메에게 따라잡히게 생겼는데 3시간 45분 페메를 따라가겠다고? 20킬로미터를 넘기 전에 이분들은 모두 나를 추월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늦게 달리느냐고 물으며. '왜 이렇게 늦느냐?'는 물음은 나를 추월할 때 꼭 내어야 하는 통행료같이 느껴졌다. 이 통행료를 3시간 45분 페메 그룹에게 나도 지불하고 싶었지만 달리면 달릴수록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윤동님은 함께 달릴 때도 있네 하며 나를 제쳤다. 한구님은 추월해 가면서도 후반에 잘 뛰니까 다시 추월당하겠지라고 했다. 希洙형님이 나를 제친 것은 1천여 일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풀코스 반환을 1시간 57분 16초에 해서 내 페이스가 서브 4보다 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 또 화장실에 들러야 했지만 4시간 페메를 50미터 이내에서 따라갔다. 希洙형님은 속도를 점점 내어 400미터 쯤 거리를 벌렸다. 2주 전 몇 년만에 서브 4를 하시더니 예전의 기량을 회복하시는 듯. 슬로우비디오로 달리는 내 움직임이 의아했는지 우리나라 풀코스 1천회 7번째 완주자 용구님은 도대체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몇 년만에 이렇게 늦게 달리는 내 모습은 매우 생소해 보인다고.....
28킬로미터 지점에서 잠시 반전이 있었다. 4시간 페메 앞으로 나아갔다. 29킬로미터 지점에서 고운인선님을 제쳤다. 30킬로미터 지점에서 希洙형님, 의계님, 상현님, 건달 순으로 달리고 있었다. 상현님과 잠깐 함께 달렸다. 상현님은 내가 늦게 달리는 이유를 궁금해 했다. 의계님과도 곧 만났는데 이 분도 내게 늦게 달리는 이유를 물었다. 부상이라면 아예 달리지 않는 게 좋다고 했다. 남은 10킬로미터는 킬로미터당 6분 페이스로 달려도 3시간 59분이 가능했다. 다리의 느낌은 좋지 않았다. 통증이 있었다. 32킬로미터를 넘게 달리면 아픈지도 모르게 되길 기대했건만. 만약 달리지 못하게 되면 그동안 달린 게 아까워서 어쩌나 싶었다. 통증을 이겨내며 34킬로미터 지점에서 希洙형님 앞으로 나아갔다. 의계님은 일정한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몇 십 미터 뒤에서 따라갔다. 그 몇 십 미터 간격이 골인할 때까지 이어졌다. 36킬로미터를 달려 한강변을 만났을 때 복병을 만났다. 맞바람이 셌다. 뒤에서 밀어주어도 시원찮을 판국에 앞에서 밀다니. 날씨도 흐리고 바람도 없고 영상 5도 이하라 달리기 참 좋은 날씨였는데 적어도 후반 6킬로미터는 그렇지 않았다. 뒤에서는 발걸음 소리가 내내 따라왔다. 누군가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추월할 거면 추월하지 왜 추월을 하지 않는 거지. 내가 속도를 올리고 있지도 않은데 그냥 따라오고만 있어. 바닥을 쓰는 듯한 소리가 매우 거슬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내 발 아래 쓸리는 염화칼슘이 뒷주자의 발걸음을 위장하고 있었음을.
의계님을 따라가며 달리다가 주로에 나와 응원하는 은기님을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 풀코스 1천회 6번째 완주자.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부상 회복중이지만 곧 돌아오실 거라는 말은 확실히 들었다.
골인 지점이 가까워지면 스퍼트하기 마련이지만 스퍼트하고 있는 것같지 않았다. 내가 스퍼트한다면 의계님과의 거리가 줄어들어야 할텐데 도무지 줄어들지 않았다. 그저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의계님보다 7초 늦게 골인했다. 사회를 보는 해병대정의님이 하이파이브를 보내주어 답하느라 시계의 스톱 버튼은 몇 초 더 지나 눌렀다.
초반 하프와 후반 하프가 거의 비슷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속도를 낼 수 없이 일정한 속도의 마라톤이었다. 주자들을 몇 명 제친 것은 내가 빨리 달려서가 아니라 그 분들이 후반에 조금 늦어진 때문이었다. 반환점까지 나보다 2분 9초 빨리 달린 고운인선님보다 5분 7초 빨리, 1분 14초 빨리 달린 길석님보다 1분 10초 빨리. 20초 빨리 달린 希洙형님보다 2분 50초 빨리, , 13초 빨리 달린 한구님보다 2분 54초 빨리, 12초 빨리 달린 윤동님보다 3분 24초 빨리, 2초 빨리 달린 상현님보다 2분 33초 빨리 골인했다. 이분들은 모두 서브 4를 달성했다.
한강시민 마라톤대회 참가를 결심했을 때만 해도 이 대회 첫 3시간 20분대 진입을 꿈꾸던 주자가 이 대회 최악의 기록으로 골인했다. 21일 전 똑같은 코스를 달릴 때보다 30분이 늦어졌다. 부상당한 자의 말로다. 아예 달리지 못할 정도의 부상이었다면 덜 비참했을까? 아니, 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완주를 마치고 탈의실에서 쓸쓸하게 옷을 갈아 입었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방송을 들으니 여성 주자들 시상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달물영희님은 3시간 44분대로 풀코스 여자부 2위를 했다. 해병대정의님은 미녀 마라토너 영희님이라는 멘트를 꾸준히 하는데 1위도, 3위도 모두 미녀 마라토너라고 하니 늘 같은 레퍼토리일 수도 있었다. 옷을 갈아 입고 탈의실에서 나오니 시상식이 이미 끝나 있었다. 달물영희님 사진을 찍어주었을 바깥술님도 보이지 않았다. 希洙형님은 서울시청팀과 점심 식사 약속이 있다며 먼저 간다고 했다. 엄니식당에서 혼밥을 할까 하다가 여의나루역 근처 미니스톱 편의점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로운리맨님이 양재역에서 후배와 뒷풀이를 한다며 연락을 해왔지만 갈 수 없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나로서는 집에서 멀어지는 행보를 할 수 없었다. 외로워졌다. 우울해졌다. 2018년의 마라톤 여정은 끝났다.
뚱보가 골인한다.
마라톤 대회 복장이라고 할 수 없다. 이건 훈련 복장이다.
일주일 전보다 1분여 빨라졌지만 큰 의미는 없다. 부상중에도 서브 4를 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12월의 영어 표기가 눈에 거슬린다. December이지 Decesmber가 아니라고.....
현장 기록증도 받았다.
오전 8시 15분 대회장에 도착했을 때......
저녁으로 돈까스를 튀겨 먹었다.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먹고 싶었지만.....
군만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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