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쯤은 다른 이의 배번을 달고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는 날이 있으리라 상상했다. 2018년 4월의 첫날 마라톤 풀코스를 달렸지만 내 기록은 될 수 없었다. 기록증에도 다른 분의 이름이 찍혔다. 그 분도 자신이 달린 것이 아니니 그 기록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냥 나 자신이 훈련한 대회가 되어 버렸다. 풀코스를 훈련으로 삼기에는 좀 지나쳤지만. 만우절에 이 글을 올렸다면 거짓말로 오인받을 뻔 했다.
다른 이의 배번을 달고 뛰니 기록엔 신경쓰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3시간 40분대, 50분대.... 4시간을 넘겨 천천히 달려도 부담될 것이 없었다.
영주소백산마라톤대회를 참가신청하신 분이 건강상 문제가 발생하여 풀코스 출전을 자제해야 한다며 혹시 대신 뛸 마음은 없느냐고 물었다. 서울역에서 대회장을 오가는 셔틀버스까지 예약되어 있다고 했다. 이 분의 배번을 받은 것이 대회 이틀 전. 전혀 준비되지 않은 풀코스, 그것도 지방 원정, 게다가 오르막이 적지 않은 코스..... 5년 전 쌀쌀한 날씨에 3시간 53분대로 달린 그 대회에 다시 가기로 마음 먹는 순간 여러가지 문제가 걸렸다. 풀코스를 앞두고 해야 하는 사전 훈련, 식단 및 체중 조절 등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더구나 휴식 주(週)에 해당되어 있어서 몸은 가라앉아 있었다. 수면은 더 큰 문제였다. 대회 당일 자정이 넘어 잠깐 눈을 붙였다가 새벽 2시 29분에 일어나 PC방에 들렀다가 심야 버스를 타고 서울역으로 갔다. 도무지 잤다는 안도감이 없이 오전 8시가 조금 넘어 영주시민운동장에 도착했다. 불안감만 증폭되었다. 내가 어떻게 영주까지 오게 되었나? 48시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이 대회에 출전한 로운리맨님에게 '잠이 안 오네요. 영주에서 만나요. 호호호.... 오늘은 만우절.'이라는 카톡 문자를 보내었을 때 로운리맨님은 만우절이라 믿지 않았을 것이다. 대회 참가자 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고, 현장접수도 되지 않으니. 영주시민운동장 트랙에서 로운리맨님을 만나는 순간 만우절 농담이 아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3시간 45분 페이스메이커를 따라 달리다 3시간 39분대로 골인하는 계획을 잡았다. 로운리맨님은 내게 서브 320, 못해도 서브 325 기록이 보인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출발하기 전에도 몹시 고단해서 괜히 먼 곳까지 와서 생고생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발바닥이 완전히 나은 것도 아니어서 주기적으로 통증이 있었다. 날씨는 살짝 더위가 느껴졌다.
출발했다. 인천고마라톤의 춘효님과 만나 반갑게 인사했다. 함께 달리는 길석님은 지난 주 인천에서 나를 보았다고 했다. 춘효님은 동아마라톤에서 생애 최고 기록을 세웠다고 했다. 지금 페이스가 너무 빠르다며 먼저 가라고 했다. 영주역만 찾다가 1킬로미터 페이스를 체크하지 못했다. 2킬로미터에서 시간을 보니 10분 20초가 걸렸다. 5분 10초 페이스. 3시간 39분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3시간 45분 페이스메이커를 잡지 못했다. 4킬로미터 쯤 지나서야 페메 앞으로 나갔다. 오르막이 몇 차례 나온 덕분인데 원래 처음부터 이렇게 오르막이 많았던 대회였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앞쪽으로 3시간 30분 페이스메이커를 따라 달리는 로운리맨님의 분홍색 모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따라갈 능력이 되지 않았다. 2주 전 동아마라톤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몸이었다. 땀이 많이 났다. 바람 소리를 내는 하프 주자들이 비껴 갈 때는 내 지지부진한 스피드가 더 두드러져 보였다.
7킬로미터 쯤 달렸는데 다른 대회 37킬로미터 달린 기분. 이 비유는 틀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7킬로미터라면 내게는 질주를 시작해야 하는 지점이니.....
10킬로미터를 51분 30초에 통과했다. 동아마라톤에서는 48분 10초에 달렸었는데 내 몸 상태가 어느 지경인지 알 수 있었다. 삼척MS님을 만나 완주 횟수를 물었더니 오늘이 299번째라고 했다. 지난 주 대회도 299번째이고, 다음 주 경주벚꽃도 299번째라고 했다. 삼척마라톤에서 300회를 기념하는 자리이니 삼척 직전에 또 한번 풀코스를 달리게 되어도 그건 299번째일 것이라고 했다.
눈으로 파고 드는 땀을 닦아내며 전진했다. 가끔 옆구리를 만져 보면 살집이 있었다. 이번 주는 마라톤이 없는 주라고 생각하고 어지간히 많이 먹어 체중을 늘려 놓았던 것이다. 나를 제치고 나가는 주자들이 하프 주자만이 아니었다. 풀코스 주자도 있었다. 하프 주자들이 반환하면서 주로가 한산해졌다. 13킬로미터가 넘었을 때 군중의 요란한 발걸음 소리. 3시간 45분 페이스메이커 그룹이 나를 제쳤다. 헬스지노님만 선도하고 있었다. 박연익님은 보이지 않았다.
열심히 풀코스를 완주하고 난 후 곧바로 2차 풀코스 레이스에 나선 것처럼 힘들었다. 주로 통제하러 나온 경찰들과 급수대 자원봉사원들, 농악 풍물패, 동네 주민들의 응원을 받으며 악착같이 나아갔다. 이건 정말 할 짓이 아니었다. 계획되지 않은 풀코스, 내 생애 완주 기록에 들어가지 않는 풀코스, 훈련으로 소화하는 풀코스. 일단 출발했으니 끝까지 달리자는 마음으로 밀고 나가고는 있었다. 오늘 더워서 땀을 많이 흘리는데 42.195킬로미터를 달리고 나면 살을 꽤 뺄 수 있을 거야. 하하. 이 대회는 먹거리 마당이 풍성하기로 유명한데 완주 후 실컷 먹지 않을 수 없으니 도로 살이 찌겠군. 그건 나중 일이니 일단 달리기나 하자.
소수서원과 선비촌을 지나 16킬로미터 지점을 만나면서 가파른 오르막을 만났다. 이 대회는 오르막이 심심치 않게 자주 등장하는데 후반 22, 27, 31, 34, 37, 41킬로미터 지점에서의 오르막을 이겨내어야 완주가 가능하다. 후반에 들어서기 전 16킬로미터에서 만나는 오르막은 아주 강력한 클로스카운터이다. 이 오르막이 후반에 나온다면 여수마라톤처럼 걷는 사람이 속출할 것이다. 하지만 이 강력한 클로스카운터 덕분에 후반에 나오는 숱한 잽을 이겨낼 수도 있을 것이다. 점점 멀어져가는 345 페메 헬스지노님을 바라만 보며 달리다가 오르막에서 거리를 많이 줄였다. 추월당하기만 하다가 이 오르막에서 몇 사람을 제칠 수 있었다. 순흥면이 끝나고 단산면을 만나는 지점이 오르막의 정점이었다. 21킬로미터 지점에서 시계를 보니 1시간 48분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345 페메가 몇 십 미터 앞에 있다. 340 페메보다 빠르게 나가고 있다는 뜻. 이대로 달리면 최초 목표였던 3시간 39분대는 무난하지 않겠는가?
비교적 흐린 날씨였지만 햇빛이 내려쪼일 때도 있었다. 삼척MS님, 인천다모아 연형님을 추월했다. 옥대리 회전교차로를 돌면서 단산중학교 부근까지 올라갔다 빠져나오며 헬스지노님에게 매우 가까워졌다. 5년 전 대전3대하천마라톤대회할 때의 기억이 났다. 그 때도 헬스지노님이 345 페메를 했었다. 22킬로미터 지점. 헬스지노님이 함께 달리는 주자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5분 10초 페이스로 계속 가겠습니다. 30킬로미터까지는요. 그 이후 스퍼트가 가능하면 3시간 38분까지 뽑도록 하지요. 339가 목표인 내게는 아주 고맙긴 한데 솔직히 그래도 되나 싶었다. 3시간 45분 페메가 그렇게 빨리 달려 버리면 안 되지 않을까. 함께 달리던 또다른 페메 박연익님의 소재를 물으니 헬스지노님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집에 갔어요.
거름 냄새가 앞쪽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맞바람이 있었다. 인삼 밭, 사과 밭이 있어서 시골에서 달린다는 느낌이 강했다. 지방 대회는 이런 맛이지. 그 지방의 풍광을 만끽하며 달리는 것.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도 보고. 바람을 피해 덩치가 큰 헬스지노님 뒤에 숨기도 했지만 이내 옆에서 달리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앞으로 나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속도를 늦추어 헬스지노님과 보조를 맞추었다. 버거운 느낌이 별로 없었다. 초반 10킬로미터를 달릴 때보다 한결 편해졌다.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이렇게 함께라면 3시간 39분의 완주도 가능할 것같았다. 생애 최고 기록보다 20분이나 늦게 골인하는 게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오늘은 이게 최선이었다.
페메 그룹에서 함께 달리던 주자들 가운데 몇 명이 치고 나갔다. 아무래도 속도가 느려진 것같았다. 지금 5분 10초 페이스가 맞을까 의심스러웠다. 26킬로미터를 지나 살짝 앞으로 나왔다. 이제부터 골인할 때까지 외롭게 달릴 수도 있겠지만 3시간 39분대로 골인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27킬로미터부터 28킬로미터까지 시간을 체크했다. 만약 5분 10초라면 다시 페메 그룹에 섞이기로 마음먹었지만 5분 20초가 걸렸다. 헬스지노님의 페이스가 느려진 것이라 이제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다. 단산로를 따라 쭉 나아가는 게 아니라 구구교로 좌회전하여 구구리 마을까지 900미터를 진행했다가 단산로로 돌아오는 코스가 있었다. 그 과정을 이미 마치고 단산로에 들어선 로운리맨님이 나를 부르며 응원했다. 3시간 30분 페이스메이커를 따라 꾸준히 달리고 있었다.
2차 반환점을 향하여 나아가다 딸기를 먹을 기회가 있었다. 평소 같으면 지나쳤을텐데 오늘은 먹을 것이 나오면 빠뜨리지 않고 있었다. 바나나, 초코파이도 잘 챙겨먹었다.
2차 반환하면서 칩 인식기에서 삐 소리를 확인했다. 기록이 누락되어도 전혀 상관없는데...... 곧 29킬로미터 표지판이 나왔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32킬로미터 지점이 나오면 그때 정말 339가 가능한지 계산해 보기로 했다. 30킬로미터가 넘고 나서 보니 평탄한 길이 거의 없었다. 파도가 치듯 오르막 내리막이 교차해서 나왔다. 오르막이 나오면 나는 오르막을 좋아한다고 암시했고, 내리막이 나오면 별로 힘들일 필요 없으니 참 편하구나 중얼거렸다. 32킬로미터 지점. 2시간 47분 30초가 지나고 있었다. 남은 10.195킬로미터를 52분 30초에 달리면 3시간 39분대 골인이었다. 10킬로미터라도 55분을 넘겨서 달린 일도 자주 있었는데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았다. 더구나 오늘같이 가라앉은 컨디션에 잦은 오르막이라면..... 10킬로미터가 아니라 10.195킬로미터이니 그것도 부담되었다. 킬로미터마다 5분 페이스로만 나아갈 수 있어도 목표는 무난하게 달성할텐데. 화장실을 가야 하나? 가도 되고, 가지 않아도 되고..... 땀도 많이 흘렸는데 좀더 참아보기로 했다. 화장실에 들렀다 와도 3시간 39분대는 가능해 보이기는 해도 일단 참아 보기로.
고도의 변화 없이 주로가 쭉 이어져 있으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눈에 띄는 오르막이 너무 자주 나오니 점점 지쳐가는 것같았다. 어쨌든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 했다. 비록 내가 단 배번이 내 배번이 아니고, 내가 달린 기록을 나 스스로도 인정할 수 없는 레이스를 펼치고 있지만 끝까지 도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달림이들의 몸놀림이 굼뜨거나, 굼뜨다 못해 거의 걷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32킬로미터 지점에서 속도를 많이 올린 것도 아닌데 주자들을 제치고 있었다. 땀이 많이 흘러 한쪽 눈을 감고 달려야 했지만 서서히 영주 시내가 보이면서 시골 풍경이 사라지고 있었다. 35킬로미터 지점에서 집어든 컵에 물이 너무 적어서 갈증 해소가 되지 않았지만 35킬로미터 지점부터는 작정하고 달렸다. 오르막이 나와도 신경쓰지 않았다. 몹시 피곤해서 졸음이 쏟아졌지만 킬로미터마다 5분 페이스는 지켜 내었다. 이 후반 레이스를 위하여 이 대회에 다른 이의 배번을 달고 출전한 것이었다. 35킬로미터 이후야 말로 진정한 운동이었다. 수분 부족은 37.5킬로미터 급수대에서 해결하였다. 2.5킬로미터마다 급수대를 설치해 준 주최측의 배려가 고마웠다. 나올 것같지 않았던 36킬로미터, 37킬로미터 표지판이 나왔다. 5.2킬로미터 남았을 때 3시간 12분 30초. 직전 5킬로미터를 정확히 25분에 달렸고, 앞으로도 5분 페이스로 달리면 3시간 38분대가 보였다. 영주시립도서관 앞 팔각정을 바라보며 40킬로미터 지점을 지났다. 3시간 27분 30초. 동호회에서 응원하며 콜라 드릴까요 물었지만 괜찮다고 말했다. 41킬로미터 지점에도 오르막이 있었고, 운동장 들어서기 직전에도 오르막이 있었지만 잘 이겨내었다. 마지막 2.195킬로미터는 딱 10분에 달렸다.
3:37:30.20
마지막 10.195킬로미터를 정확히 50분에 달린 것인데 그렇다면 킬로미터당 5분 이내의 페이스, 적어도 후반만은 서브 330의 페이스로 달려낸 것이었다. 이따금 찾아온 발바닥 통증은 그냥 무시했다.
3시간 33분대로 먼저 골인한 로운리맨님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응원해 주었다.
167번째 풀코스를 완주했지만.... 이것은 완주 횟수에 들어가지 않는다. 다음 주 서산 마라톤이 167번째 풀코스 대회이며 77개월 연속 풀코스가 될 것이다.
다른 분의 배번을 달고 풀코스를 달리다.
내 기록이 맞지만 내 완주 기록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8시 10분경 대회장으로 이동하는 중.....
영주시민운동장... 대회 파장 직전
먹거리가 가장 풍성한 대회....
사과, 고구마빵, 계란 등을 주는데.... 풀코스 주자가 먹을 것도 남아 있어서 고마웠다.
국수에 소고기를.....
소고기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로운리맨님이 주신 홍삼캔디.....
전날 김밥을 쌌다.
셔틀버스에서 커피와 함께 김밥을 먹었다.
내게는 기념품이 없어서..... 같은 대회에서 제공하는 귀품윤기쌀을 구입했다.
기념품 보다는 좀 큰 10킬로그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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