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 동안 코 푼 휴지만 백여 장이 쌓였다. 일주일 내내 감기와 수면 부족으로 허덕였고, 주변의 상황이 원정 마라톤을 용인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4월의 첫날 경주 보문호, 분황사, 첨성대, 포석정, 오릉, 형산강, 알천축구장 일대를 달릴 수 있으리라곤 불과 하루 전날까지만 해도 꿈도 꾸지 못했다.
아세탈님이 경주벚꽃마라톤대회에 차를 갖고 가신다고 하여 동승할 계획을 세웠다. 금요일 밤에는 경주 찜질방에 들어가 있기로 했다. 찜질방 1박이 추가되니 1박 3일이었던 내 여정이 2박 3일이 될 수 있었다. 주중 피곤한 일정을 소화하다가 수요일 밤 문화의 날이라 영화를 보았다. 전화가 빗발쳤다. 영화를 30분 정도 보다 말고 병원 응급실로 달려가야 했다. 거의 잠을 자지 못하는 일정이 시작되었고, 잠을 자더라도 깊이 잘 수 없었다. 누군가 귓속말로 속삭여도 벌떡 일어날 것같은 초긴장 상태로 자고 있으니 잠을 자도 잔 것같지 않았다. 감기는 더 악화되었다. 마라톤 대회 전날 저녁 6시 30분 오산역에서 아세탈님과 만나기로 한 일정은 조정될 수밖에 없었다. 아예 경주행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제가 집 안에 일이 생겨서 같이 내려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려가더라도 밤늦게 따로 내려가거나 경우에 따라 경주 일정을 접을 수도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모든 게 미지수네요.
아세탈님은 기다릴테니 늦게라도 함께 가자고 하셨다. 새벽에 운전을 하고 풀코스를 달리는 어이없는(?) 고행이라도 받아들이겠다고 하신 것이었다. 출발 직전 퇴근하자마자 일단 주무시라고 말씀드린 뒤 일정을 짜내어 대회 당일 새벽 0시 40분경 병점역에서 아세탈님 승용차에 올라탔다. 동승자가 한 분 더 있어서 나는 뒷좌석에서 이런 자세 저런 자세로 누워 잠을 청했는데 쉽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자지 않으면 낭패인데..... 2년 전 아예 잠을 자지 않고 경주벚꽃마라톤을 3시간 52분에 완주한 적이 있었지만 그 때는 그래도 아프거나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다.
동승자를 경주시외버스터미널 앞에 내려 드리고 돼지국밥집에 앉은 것이 새벽 4시 20분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 주차장에 도착하여 잠깐 잤다. 빗줄기가 굵어져 차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한 시간 남짓 잤다. 풀코스를 달리기 직전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생명 보존 행위였다. 중간에 몇 번 깨긴 했으나 그래도 잤다는 느낌으로 6시 50분쯤 차에서 나가 우산쓰고 500미터 이상 걸었다. 먼 화장실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었다. 여유있게 볼 일을 보고 돌아오다가 스트레칭하고 배번달고 물품보관소로 가서 짐을 맡겼다.
8시 출발 직전 허수아비님, 정명진님과 만나 함께 사진을 찍었다. 아세탈님과도 다시 만났다. 허수아비님은 내 얼굴을 보고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인다고 했다. 나아진 것이라곤 일주일 전보다 2킬로그램쯤 빠진 것. 풀코스 맨 후미에 모여 있다가 출발하면서 처음에는 아주 느린 속도로 달리게 되었다. 최근의 풀코스 페이스로 봤을 때 유래없이 느린 발놀림이었다. 3시간 27분의 기록을 깨뜨리겠다고 공언한 정명진님이 치고 나가고 2킬로미터까지는 허수아비님과 함께 달렸다. 비는 조금씩 가늘어지더니 이내 그쳤다. 보문호를 바라보며 여유를 가졌다. 비는 그치고 있지만 여전히 구름은 끼어 있고 싸늘하여 달리기에는 참 좋은 날씨였다. 계속 SUB-4 페이스로 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일단은 빨리 달려 보기로 했다. 벚꽃이 아직 덜 피었구나. 만개하려면 일주일쯤 더 기다려야겠구나. 올해는 경주벚꽃마라톤이라고 이름붙일 수는 없겠구나. 운동하면서 벚꽃 감상하는 기회가 되길 바랬는데. 일본인들을 비롯한 외국 참가자들과 달리며 신라 천년 수도의 유적을 보는 데 만족해야겠구나.
2킬로미터부터 어지간히 스피드를 올려 주자들을 숱하게 제쳤다. 5킬로미터까지 25분이 걸리지 않아 3시간 29분대로 골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10킬로미터 기록은 47분 45초. 지난 일요일 하프를 달릴 때 초반 10킬로미터가 48분 15초였는데 요새는 하프고 풀이고 페이스 조절이 제멋대로이다. 동아마라톤 때 10킬로미터 기록은 48분 59초였다. 오늘따라 정신이 없어서 이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첨성대, 오릉을 지나 12킬로미터 지점에서 시계를 보니 58분이 넘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간다면 풀코스 기록을 다시 한번 갈아치울 것같았다.
하지만 형산강을 따라 달리면서 새벽에 돼지국밥을 먹은 댓가를 치르게 된다. 먹자마자 잠을 자는 바람에 제대로 소화가 되지 않은 음식물이 몸밖으로 나오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초반 페이스가 좋으니 화장실에 다녀온 뒤 달려도 상관없으리라. 그런데 화장실이 나오지 않았다. 뱃속의 요동을 참고 달리려니 스피드는 자꾸만 떨어졌다. 휴지라도 있으면 길가로 나가 볼 일을 보고 싶을 정도였다. 참고 또 참고. 선두 주자들이 오고, 3시간 페이스메이커가 오고, 3시간 20분 페이스메이커가 왔다. 3시간 20분 페메 앞에서 아는 체 하는 분이 있었다. 정명진님이었다. 3시간 10분대로 치달리다니 놀라운 페이스였다. 자기 구역이라 확실히 다르긴 하다. 정명진님은 오히려 내게 왜 이리 빨리 달리느냐고 묻고 지나갔다. (기침도 심하고 입술도 부르트고 잠도 못 자는 등 몹시 좋아 보이지 않아 정말 천천히 달릴 줄 알았다고)
화장실, 화장실.
머릿 속에는 오직 화장실 밖에 없는데 19.332킬로미터 지점에서 반환하고 하프 지점을 1시간 44분대에 지났다. 2년 전 경주 동아마라톤 때에도 새벽에 돼지국밥을 먹고 배탈에 시달리며 화장실을 찾다가 완주한 후 화장실로 직행했던 기억이 났다. 4년 전 경주 동아 때에도 마찬가지. 2년 전 경주벚꽃마라톤 때에는 돼지국밥을 먹고도 배탈이 나지 않았는데 그때는 아예 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시는 마라톤 직전 돼지국밥을 먹지 말아야지.
국제 대회 위주로만 달리시는 효준님과 만났고, 제비한스님과도 인사했다. 4시간 페이스메이커보다 빨리 달리시는 허수아비님과 다시 만났다. '정과장님이 날아가요'라는 말도 하고.(사실 이 보다 심한 말을 했는데 표현을 중화시킴)
모철님이 먼저 인사해 오시고, 여유있게 달리시는 아세탈님과도 반갑게 인사했다. 인사를 마치고 나면 화장실의 근심이 찾아왔다. 10킬로미터 이상을 참고 달리고 있으니 못할 짓이었다. 코도 수차례 풀고 가래침도 뱉고 기침도 해대며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배탈난 몸을 괴롭히고 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화장실이 도계장 삼거리쪽으로 꺽기 직전 나왔다. 25킬로미터 직전이었다. 화장실에 뛰어들어가 볼 일을 보는데 문 잠그는 방식이 어려워 시간을 더 쓰고 변기에 앉았다.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는 시간으로 5분을 썼다. 이 순간 그나마 가능성이 있었던 3시간 29분의 희망은 사라졌다. 후반 하프를 사실 1시간 40분에 달려야 SUB 330이 가능한데 내 몸 상태로 보아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는 속도였다. 지금부터 조금씩 스피드를 올려 30킬로미터 지점을 2시간 30분에 통과한다고 하더라도-SUB 330하려면 30킬로미터를 2시간 29분에 달려야 함-나머지 12.195킬로미터를 1시간 이내에 달려내기는 어려웠다. 경주벚꽃마라톤대회는 37킬로미터 이후 오르막이 나와 달리기를 힘들게 하는 코스 아니던가? 5분 손실은 결국 족쇄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시간 29분대로 골인하여 올해 달린 풀코스 8번을 모두 3시간 20분대로 골인했다고 떠들어댈 수 있으면 좋겠으나 그건 동화 세상 이야기이다.
조금 빨라졌다 싶어도 킬로미터당 5분 페이스였다. 어깨치기도 해 보고 밤새 운전하느라 더 힘들게 달리고 있을 아세탈님도 떠올려보고, 이번에도 329를 달성해서 SUB 330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장담했던 로운리맨님의 응원도 기억하고, 이번보다 더 힘들었던 풀코스도 기억했지만 몸은 스퍼트를 허락하지 않았다. 오늘따라 발이 부었는지 타사 재팬 마라톤화는 작게만 느껴졌다. 지난 동아마라톤 때 신었던 양말에 그 신발인데 왜 그럴까? 엄지발가락이 꽉 끼어 아팠다. 너무 앞축을 많이 이용해서 달리고 있는 것일까? 피곤하니 내 달리기 동작이 무너진 것일까? 황남초등학교 앞을 지나 30킬로미터 지점이 나왔다. 악전고투했지만 2시간 30분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페이스가 자꾸 떨어지니 한명씩 나를 제치고 나갔다.
분황사를 지나 경주소방서 앞을 감아돌아 북천을 건넜다. 이쪽에는 벚꽃이 그래도 만발하였다. 사진사가 거기 있었다. 알천4구장부터 알천 1구장까지 구경하면서 달렸다. 매년 8월이면 전국의 200개가 넘는 유소년 축구 팀이 경기를 하는 곳이었다. 걷는 주자들이 몇 명씩 보였다. 초반에 오버페이스를 했던 주자들이었다. 그들에게 힘내세요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나 자신을 달래기도 힘들어 죽을 지경이었으니. 35킬로미터 지점까지 가까스로 나를 데려갔다. 35킬로미터 지점에 들어서서 힘이 난다고 암시하며 속도를 올리려 애썼지만 골인할 때까지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 한번도 추월되지 않은 구간이 되었을 따름이었다. 37킬로미터 지점 보문교 삼거리에서 오르막이 나왔다. 2년 전 불쑥 튀어나온 오르막의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오늘은 그렇게까지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38킬로미터 지점에서 3시간 20분대의 꿈은 완전히 접었다.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해. 컨디션 관리를 못한 것이나 무리한 레이스에 나선 것도 내 잘못이니.....
속주하듯이 씽씽 달리던 풀코스 후반은 영영 잊혀진 듯했다. 마지막 3킬로미터는 1킬로미터당 정확히 5분 페이스로 달렸다. 2주 전 3시간 23분대로 달린 게 정말 나였을까 하는 의심을 하면서. 경주 월드 앞을 감아돌아 경주세계엑스포문화공원 출발 아치로 나아가는 길이 참 멀었다. 그래도 지난 해 3시간 35분 26초로 달렸던 춘천마라톤보다는 잘 달려야지. 어쨌든 최근 12번의 풀코스 기록이 내 생애 상위 12위까지의 기록이기를 바랬다. 136번째 풀코스. 그동안 이런 경험, 저런 경험을 다한 덕분에 어쨌든 완주를 하기는 했지만 이번 대회의 경우 달리지 않는 게 낫겠다고 주변 상황이나 내 몸 상태가 충분히 신호를 보내었는데.....
내가 잰 기록보다는 넷타임 기록이 잘 나왔다. 늘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너무 잘 나왔다.
03:32:38 (잘못된 기록이다)
2년 전 경주벚꽃마라톤 기록을 20분 이상 앞당겼고, 4월 풀코스 개인 최고 기록도 세웠다. 솔직히 내 생애 4월에 3시간 30분대에 달려본 일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다. 2013년 군산새만금마라톤대회에서 3시간 41분대로 달렸을 뿐이다. (20분 이상 앞당겼다는 것은 잘못된 분석이 되었다. 18분 이상 앞당긴 것으로 봐야 한다. 완주하고 이틀 뒤 알았다. 4월 풀코스 개인 최고 기록은 맞고, 4월에 3시간 30분대로 달린 것이 처음인 것은 맞다.)
정명진님은 자신의 기록을 무려 7분이나 단축하여 3시간 20분 42초로 골인하였다. 3시간 20분 페이스메이커를 따라가려고 그렇게 스피드를 올렸는데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고 했다. 후반에 페이스가 떨어지고 있을 때 뒤에서 3시간 20분 페메가 자신을 제치고 나가더란다. 앞에 있는 줄 알았던 페메가 사실 내내 자신의 뒤에 있었다고. (이것도 5분 단축한 것으로 바꾸어야겠네. 아쉽지만)
아세탈님의 차에 짐을 넣어두고 나가 허수아비님과 아세탈님을 기다렸다. 허수아비님은 경주벚꽃마라톤 개인 최고 기록을 세웠고, 아세탈님은 갑자기 발생한 무릎 통증 때문에 아주 고생하면서 SUB-5에 맞추어 달렸다고 하였다. 골인 직전 허수아비님과도 함께 달리고, 아세탈님과도 함께 달렸다. 엄지발가락이 왜 이렇게 아플까 의심하면서.....
대구의 모텔에서 양말을 벗는 순간 새까맣게 변해 버린 양쪽 엄지발가락을 보고 기겁했다. 피가 고인 물집 때문에 발가락이 그렇게 아팠던 것이다. 배번의 옷핀을 빼어 여기저기 쑤셨다. 피가 사정없이 흘러나왔다. 아픈 부분이 있으면 쑤시고 또 쑤셨고 그때마다 피가 흘러나왔다. 농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풀코스 최고 기록을 연이어 경신할 때마다 신어서 정들었던 양말은 여기저기 찢어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 이틀 후 기록이 수정 게시되어 있었다. 내 기록은 3시간 34분 25초가 되었고, 정명진님의 기록도 3시간 22분 29초가 되어 있었다. 허수아비님의 기록도 조금 나빠졌다. 인정해야 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잰 기록과도 잘 맞는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장
황룡사 9층 목탑이 보이네. 마라톤 대회장은 풀코스 후미 주자만 기다리고 있다.
완주 후 기다리면서.....
경주월드.... 계속 걸어서 마중나가다 보니.....
새벽 4시 30분경에 돼지국밥집에 들르다. 아직도 5천원 하는 데가 있구나.
맛있게 먹긴 했지만......
구리에 사시는 분에게 선물하려고 일부러 100 사이즈를 선택했다.
허수아비님, 정명진님과 함께..... 출발 직전..... (일본인 주자가 찍어준 사진)
양말은 찢어지고.... 엄지발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는 휴지와 물티슈를 붉게 물들였다.
이렇게까지 발을 버리고 달린 적이 없었는데.....좀 어이없다. 100킬로미터를 달릴 때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
3시간 32분 38초였던 기록이 3시간 34분 25초로......
기록 오류를 인정한 공지문
대회 홈페이지 슬라이드쇼를 통하여 뜬 사진. 2015년 경주벚꽃마라톤 출발 장면에 내가 보인다. (빨간 화살표) 이번 대회와 비교하여 벚꽃의 풍성함이 다르다.
젖은 도로를 열심히 달리고 있었네. 카메라 의식도 못하고....
골인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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