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 마라톤!

공원사랑 마라톤(2017/03/12)-HALF 151

HoonzK 2017. 3. 13. 17:52

                        저 순진한 잠.
엉클어진 근심의 실타래를 풀어주며,
나날의 삶을 소멸시키고, 우리의 쓰라린 노고를 씻어주며,
상처입은 마음의 진정제요 대자연의 정찬이며,
삶의 향연에서 최고 영양식인 잠
 <맥베스> 2막 2장


                                the innocent sleep,
 Sleep that knits up the ravell'd sleave of care,
 The death of each day's life, sore labour's bath,
 Balm of hurt minds, great nature's second course,
 Chief nourisher in life's feast.



 셰익스피어는 잠에 대하여 어찌 이리도 잘 알았을까? 마라톤 대회를 앞두고 나처럼 잠을 못 자고 시달리며 잠의 소중함을 한없이 곱씹어 보기라도 했단 말인가? 동아마라톤 일주일 전 하프 대회에 참가했다. 현장 접수이기 때문에 꼭 가야 한다는 부담감은 없었다. 나 혼자 하프 정도를 달리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래서는 아무래도 훈련이 부족해 보였다. 평일 2시나 3시가 넘어 자는 습관을 주말에만 고치어 일찍 잘 수는 없었다. 결국 잠이 사무치게 부족한 상태로 집을 나서야 했다. 도림천을 따라 열리는 공원사랑 마라톤대회는 풀코스 주자는 7시에 출발하지만 하프 주자는 8시에 출발해도 되니 그래도 낫다고 생각했다. 지난 1월 1일 입상 상품으로 받은 초대권을 내밀었던 게 7시 20분경. 10킬로미터 종목에 참가하는 주자 한 분이 그런 것도 있구나 했다. 그는 37분대를 노린다고 했다. SUB-3는 이번 동아마라톤 때까지만 할 생각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마스터즈들에게는 꿈의 기록인 SUB-3를 그렇게 쉽게 말하시다니. 내 기록을 밝히는 것부터 창피했다. 다음 주가 메이저 대회 풀코스인데 오늘 풀코스 달리시는 분도 많아요라고 했더니 그 분들이야 SUB-3로 달리지는 않을테니까라는 답이 돌아왔다.


 혹시나 로운리맨님이 오지 않을까 했으나 뵐 수 없었다. 양재천에서 개인 훈련한다고 했던 말을 기억했다. 아세탈님을 볼 수 있을까? 아세탈님은 제주도에서 100킬로미터 대회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생각까지 하다니 잠이 부족해서 정신이 없었다.


 8시 정각. 시간 계시기가 1:00:00이 되는 순간 출발했다. 하프 주자들 가운데에서는 가장 빠른 페이스로 나가는데 내가 평소 대회에서 하지 않던 짓을 하고 있었다. 너무 스피드를 올린 것이었다. 1킬로미터 지점까지 4분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숨이 찰 정도였다. 슬로우 스타터(slow starter)인 나로서는 초반부터 너무 무리했다. 잠결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빨리 달리긴 했어도 10킬로미터 주자와는 무려 200미터 이상 차이가 나 버렸다. 그 양반은 다른 세계에서 달리는 것같았다. 1킬로미터 지점을 지나서부터는 숨이 거칠어진 것을 추스리고 달렸다. 2킬로미터 지점까지 9분이 걸리지 않았다. 오버 페이스였다. 빨라야 10분 30초에 통과하던 지점을 너무 빨리 지나고 있었다. 미세 먼지가 있어서 그런지 하늘은 잔뜩 찌푸렸다. 비라도 내릴 것같았다. 이 공원사랑마라톤 코스는 고가 아래를 달리는 혜택을 받으니 비가 내려도 상관은 없었다. 기온은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지난 11월 이후 처음으로 장갑을 끼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긴팔을 입었지만 반팔을 입어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2.5킬로미터 지점에서 굳이 물을 마실 필요는 없었는데 주전자의 물을 따라 마셨다. 너무 빠르기 때문에 스피드 제어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었다. 먼저 출발한 풀코스 주자들 틈바구니 속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뛰어 오시는 분이 있었다. GOLD_1님이었다. 지난 해 12월 11일 로운리맨님, 헬스지노님과 함께 3시간 27분 10초로 골인했던 분. 1시간 31분대의 페이스였다. 빨리 달리면서도 나를 기억하는지 파이팅을 외쳐 주셨다. 한동안 건너편에서 오시는 분들과 파이팅을 나누며 달렸다. 4킬로미터 지점을 통과하기가 무섭게 건너편에서 날아오시는 분이 있었다. 10킬로미터 주자. 고통스러운지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는데 내가 보내는 응원에는 살짝 손을 들어 답해 주었다. 5킬로미터 지점까지 22분 20초가 걸렸다. 너무 빨랐다. 이대로 가다간 쓰러질지도 모른다. 5.5킬로미터 지점 급수대에서 온수를 얻어 마시고 6킬로미터 지점을 향하여 달리고 있을 때 바깥술님을 만났다. 오늘도 달물영희님과 함께 달리고 있었다. 내가 달고 있는 배번이 풀코스 배번이라 풀코스를 늦게 출발했구나 생각하시는 것같았다. 힘나는 응원 문구를 한 뭉텅이씩 주고 받았다.


 징검다리 데크를 건넜다. 7킬로미터쯤 달렸나. 지축을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세 명 정도가 나를 제치고 나갔다. 보라매 마라톤클럽 회원들이 훈련을 하고 있었다. 세 명의 페이스는 4분 10초대 정도로 보였다. 8킬로미터 지점을 지날 때에도 몇 무리가 나를 제쳤는데 이들의 페이스는 4분 20초 정도. 흐린 날씨에 어두운 고가 아래를 지나가면 동굴 속을 달리는 것처럼 깜깜하기만 했다. 보라매 마라톤 클럽 회원들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내 페이스를 맞출 분이 없었다. 10킬로미터 지점에서 확인하니 출발한 지 45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초반 5킬로미터보다 후반 5킬로미터를 확실히 천천히 달린 것이다. 그리고 계산했다. 10킬로미터가 45분이면, 20킬로미터는 90분. 1.1킬로미터는 5분 정도로 달려낸다고 보면 1시간 35분에서 36분 골인이 예상된다. 참 순진무구한 계산이었다. 피곤한 것은 계산하지 않는가? 오늘 내 몸이 10킬로미터, 15킬로미터를 달리고도 그대로 페이스가 유지된다는 보장이 있는가? 슬로우 스타터(slow starter:SS)이고 패스트 피니셔(fast finisher:FF)인 나의 스타일이 변함없이 적용된다고  보는가?


 반환점을 돌 때 48분이 걸리지는 않았으니 어쩌면 2012년 세운 공원사랑마라톤 코스 하프 기록 1시간 35분 57초를 깨뜨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급수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콜라를 마시고 초코파이를 먹었다. 초코파이를 담은 그릇을 그릇을 뒤집어 뚜껑 대용으로 덮어 놓았기 때문에 그것을 들추고 다시 올려 놓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초코파이는 씹기만 하고 내용물을 뱉었다.


 보조를 맞출 수 없어 나 홀로 달리다 보니 나는 천애고아나 다름없었다. 결국 망자(亡者)를 소환해 내었다. 어차피 죽으면 썩어 없어질 몸둥아리를 갖고 왜 그리 발버둥치는가? 삶은 산처럼 무겁고 죽음은 새털처럼 가벼운데.... 자네를 기다리고 있네. 작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이 분은 '삶의 무거운 짐을 벗고 무(無)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홀가분하다'는 말을 유서에 남겼다. 살아 계실 때에도 뭘 그리 오래 산다고 담배도 안 피고 술도 안 마시고 그러나, 마라톤이 몸에 좋지 않다는 말도 있는데 그만 달리게. 반발했다. 그럴수는 없지요. 그냥 달리렵니다. 마치 영생(永生)을 얻은 것처럼.
 
 Wan-sik님, 용석님, 준한님, 은기님, 특전사님 등과 인사했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배번을 달고 있으면 빠짐없이 인사했다. 산 자들의 투혼에 응원을 보내었다. 징검다리 데크를 건너면서 7킬로미터가 남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들었던 하프 주자가 몇 킬로미터쯤 더 달리고 돌아오고 있었다.(속칭 알바를 한 셈.) 밝은 표정으로 조금 더 훈련했다고 생각하면 되지 하는데 그 여유있는 태도에 감명받았다.


 바깥술님을 이쯤에서 만나야 했는데 왜 이리 안 오실까? 오늘 하프만 달리고 돌아가신 걸까? 아! 맑아지지 않는 정신. 힘들구나. 시계를 보면 강박관념을 가지게 될 것같아 보기는 싫고. 내 페이스는 지금 어느 정도일까? 5킬로미터 지점 직전 급수대에서 급수요원이 물었다. 콜라? 온수? 양 손에 든 것이 각각 콜라요, 온수인데 어느 게 콜라이고 온수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잡았다. 콜라였다. 상관없었다.


 5킬로미터 지점. 드디어 시간을 확인했다. 1시간 13분 10초 경과. 남은 거리를 22분 45초에 달려도 공원사랑 마라톤 하프 최고 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그 전까지는 잠을 못 잤네, 그동안 많이 먹었네, 사는 재미가 없네, 다리가 안 나가네 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으로 달렸지만 이제부터는 오로지 골인 지점만 생각하고 달렸다. 징검다리를 가로지르면 여유있게 기록을 경신하겠지. 그리고는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겠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너무 심드렁한 태도이다. 좀더 치열하게. 정확히 21.0975킬로미터를 달려 내 기록을 받자. 바깥술님이 건너편에서 오면서 오늘도 SUB 330하려고 그렇게 빨리 달리느냐고 물었다. 하프임을 밝히면 맥이 풀리실 것같아 그냥 파이팅만 외치고 내달렸다. 응원하는 순간을 빼면 외로운 달리기를 거듭하였다. 급수대는 그냥 통과했다. 신정교 앞을 감아돌아 마지막 피치를 올렸다. 벌레가 눈쪽에서 날아다녔다. 기온이 오르니 벌레가 벌써 돌아다니는구나. 잠시 눈을 가리고 달렸다. 시간 손해를 볼 정도는 아니었다. 변함없는 진실 하나. 아무리 멀게 느껴져도 결국 골인 지점은 나오기 마련이라는 사실. 골인했다. 1시간 35분 57초였던 공원사랑 마라톤 코스의 기존 기록을 갈아치웠다.


 1:35:09


 2005년 11월 세운 1시간 35분 39초의 기록도 깨뜨렸다. 151번의 하프 완주 가운데 생애 두 번째로 빠른 기록을 세웠다. (최고 기록은 2010년 11월 1:33:43) 이건 뭘까 생각했다. 다음 주 동아마라톤에서 무슨 일을 저지르려고. 잠. 병고의 위협을 몰아내고 건강을 되찾아주는 잠.  묵은 피로를 씻어주고 새로운 활력을 심어주는 잠. 미리 잠만 잘 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사발면을 먹으며 나중에 들어온 하프 주자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몇 킬로미터를 더 달려야 했던 주자는 사발면 두 개를 뚝딱 먹어치웠다. 그러다 풀코스 926회를 완주하신 Wan-sik님에게 축하드리고, '인생은 마라톤'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노부부 마라토너들에게도 인사를 드렸다.


  시간에 맞추어 주로에 나가 풀코스 골인하는 바깥술님과 영희님 사진을 찍어드렸다. 이분들은 그제서야 내가 하프주자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난 1월 1일 15위 안에 들면서 획득한 무료 참가권. 소규모 대회에서 이런 티켓을 내민다는 게 조금 껄끄러웠다.




완주하고 난 후 좀처럼 먹지 않는 사발면이지만 이번에는 먹었다.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갔는지 젓가락을 부러뜨리고 말았다.


메달을 받겠느냐고 물어 보는데 공원사랑 2017년 첫 하프이니 달라고 했다.


배번에 2016 새해맞이 마라톤대회라고 적혀 있는 이유는 마라톤TV에서 대회를 치르고 남은 배번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하프 배번을 찾지 못하기에 그냥 아무것이나 달라고 했다.



공원사랑 마라톤 하프 기록을 깨뜨렸다.


주자들을 기다리면서 봉사활동을 했다.


내가 따라 놓은 보리차다.



 바깥술님과 영희님이 오고 있다.



이 풍선 구조물은 설치하기 편하겠다. 아치형은 양쪽과 상단에 바람이 들어가야 하니 시간이 더 걸렸겠지만.....



참으로 익숙한 출발점이자 반환점이자 골인점인 장소.




주로 앞쪽으로 쭈욱 나와서......


바깥술님과 영희님을 다시 만난다.


찍어드리고 천천히 골인 지점으로 가려고 했는데 바깥술님이 자신의 250회 완주 사진을 골인 지점에서 찍어 달라고 했다.

가방을 메고 달렸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쏜살같이 앞질러와 골인 지점에서 바깥술님을 기다렸다. 3시간 52분대로 골인하시는 중.



늘 동반주하시는 분들.

영희님은 동아마라톤대회 대회 책자에 실렸다. 연대별 50위 안에 들어.....



이 배번과 기록증은 2005년 11월 19일 달린 기록이다.

배번이 종이가 아닌 천이라 물품 보관 스티커 붙이기가 쉽지 않았다. 현수막 냄새가 많이 났다.

이번에 이 때 세운 1시간 35분 39초 기록을 깨뜨렸다.



이 때 가수 윤은혜씨가 왔었다. 이듬 해 와서 5킬로미터 대회 출전한다고 했는데 2006년 대회가 열리지 않았으니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되었다.



내 생애 가장 빨랐던 하프 기록.




 

조선일보에 실린 잠의 재발견 기사...... 게으름이 아닌 보약인 잠.....

 

※ 이 완주기는 밤잠을 반납하고 두 시간 동안 기록했는데 워드 파일이 깨어져 가져올 수가 없었다. 별 수 없이 기억을 더듬어 다시 썼다. 대회를 마치면 메모하는 습관이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