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문학동네 2015. 10. 20 1판 3쇄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쓴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500쪽이 넘은 책을 완독하는 데 이틀이 걸리지 않았다. 여자들이 경험한 전쟁을 직접 듣고 울면서 글로 옮긴 다큐멘터리는 어떤 작품보다 강하게 다가왔다. 1978년부터 1985년까지 알렉시예비치는 전쟁을 경험한, 대부분 군인이었던 여성들을 찾아가 인터뷰하고 그 기록을 책으로 써낸다. 2차 대전에 참전한 소련 여성은 백 만 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그들 가운데 200명이 넘는 여성, 살아남은 여성들이 경험한 전쟁을 들려준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10대 중후반에 불과했던 여성들이 겪은 지옥이 시시각각 지면을 채워 놓는다. 남성들이 아닌 여성들의 경험을 통하여 전쟁이 다른 시각으로 조망되어 살아남은 자에게 경종으로 울릴 수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는 현재로부터 과거를 바라본다. 현재를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34
나는 이 책을 읽을 사람도 불쌍하고 읽지 않을 사람도 불쌍하고, 그냥 모두 다 불쌍해. 42
나는 왜 살아 남았을까? 무엇을 위해? 생각해 보면.... 그건 아마 지금 이렇게 그 때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187
눈물부터 쏟아져. 하지만 반드시, 꼭 이야기해야 해. 우리가 겪은 일이 헛되이 사라지면 안 되니까.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니까. 552
그 일을 떠올리는 건 끔찍하지만 그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게 더 끔찍하거든. 225
나? 말하고 싶지 않아... 말하고 싶어도... 한 마디로 그건 말해선 안되는 일이거든. 368
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전쟁 이후 사물을 보는 시각도 바뀌어 버렸다. 들꽃을 본다. 아름다운가? 하지만 전쟁을 겪은 자는 들꽃을 바라볼 때 전쟁을 떠올린다. 들꽃을 보면 누군가의 장례를 치뤄주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신발이 줄지어 서 있다. 그 신발 안에는 발이 들어 있다. 발목이 잘려나간 몸은 어디로 사라지고 없는 것일까? 신발을 볼 때마다 그 끔찍한 순간이 잊혀지질 않는다. 12살밖에 안 된 소녀들을 본다. 머리 속에서는 군인들이 그 어린 소녀를 끌고 와 윤간하고 비명을 지르면 사정없이 때리고 입을 틀어막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이 다큐멘터리 산문은 1983년 집필이 완료되었지만 2년 동안 출간될 수 없었다고 한다. 영웅적인 소비에트 여성들에게 찬사를 돌리지 않고 그들의 아픔과 고뇌에 주목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1985년 러시아와 벨라루스에서 동시 출간되자마자 전세계적으로 200만부 이상이 판매되었다. 책의 내용이 너무 리얼하고 파격적이라 재판까지 가야 했다. '나는 목소리를 읽는다(23)'는 언급처럼 이 글은 목소리 소설(Novels of Voices)이라고 불린다. 이 작가의 또 다른 책 <체르노빌의 목소리>도 읽어야 한다.
전쟁이 끝나면 하고 싶은 일 세 가지가 있었어. 첫째, 배로 기지 않고 두 다리로 서서 전차 타기, 둘째, 흰 빵을 사서 통째로 먹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빳빳하게 풀을 먹인 하얀 침대보 위에서 실컷 자기, 하얀 침대보가 깔린 침대 위에서..... 116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꾸미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해 이들은 신문이나 책 따위에서 이야기를 끌어오지 않는다. 타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삶에서 뽑아낸 진짜 고통과 아픔을 들려준다. 많이 배운 사람들의 감정과 언어는,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 시간에 의해 다듬어지기 쉽다. 흔히들 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본질이 아닌 부차적인 것들에 쉽게 물든다. 영웅심 따위에, 어떻게 퇴각했는지, 어떻게 공격을 감행했는지,어느 전선에서 싸웠는지는 '남자'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그것이 아니라 '여자'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그래서 오랜 시간을 들여 삶의 영역이 다른, 많은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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