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숨의 장편소설 <바느질하는 여자>(문학과 지성사 초판 2쇄 2016. 1. 26)
바느질하는 여자에게 삶은 바느질하는 소재가 되고 대상이 된다. 바느질하는 여자의 시선으로 그려낸 삶, 그 기록이 김숨의 <바느질하는 여자>이다.
소재의 선택, 주제의 깊은 천착, 그저 느슨하고 나른한, 이해하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만큼 오래 남지도 않는 스토리가 아니다. 여자들의 삶이 오롯이 담겨 있으되, 바느질에만 매여 살다 바느질을 못하는 몸이 되고 마는 인생이 이 소설의 소재이다.
의식주조차 바느질을 통해 인식되는 바느질하는 여자의 세계.
저녁 밥상에 올라온 국과 반찬들은 어머니가 누비옷을 짓는 데 쓰는 천들과 묘하게 닮았다. 들기름에 볶다가 쌀뜨물을 붓고 끓인 무국은 명주를, 된장에 무친 무청시래기 나물은 광목을, 데쳐 조선간장에 무친 배추는 무명을 닮았다. 갓 지은 쌀밥에 미리 삶아 식혀 둔 보리를 섞은 밥은 광목을. 21
우물집 기와 지붕은 서너해 묵은 조선간장색 명주 조각이었고, 마당은 누렁이똥색 광목 조각이었다. 들기름 먹인 마루는 손목이 헐렁거리도록 다듬이질을 해 명주처럼 윤기가 도는 칡우린 물색 무명 조각이었다. 돌담은 밤껍데기색 광목 조각, 돌담 그늘은 도토리우린 물색 아사 조각이었다. 이끼가 드문드문 번진 우물가는 모란 문양과 구름 문양이 어우러진 메주색 양단 조각이었다. 함석 대문은 까치 똥색 양단 조각, 항아리들은 번데기색 명주 조각, 함석 대문 앞으로 뻗은 마을 길은 황기나무색 광목 조각이었다. 부추밭은 운문초록색 양단 조각이었다. 127
방금 일었다 흩어진 흙먼지는 툭툭한 광목이라고. 뒤이어 이는 흙먼지는 빳빳하고 깔깔한 생명주라고, 50미터쯤 앞에서 일었다 흩어진 흙먼지는 짜임이 성기고 부드러운 갑사라고, 광목 흙먼지, 생명주 흙먼지, 갑사 흙먼지..... 흙먼지 옷감은 한복 옷감만큼 그 종류가 다양했다. 238-9
소설을 읽다 보면 누군가에게는 그저 흙먼지일 뿐인 것이 옷감으로 해석되는 순간을 함께 하게 된다.
갑자기 알고 싶어졌다. 바느질 기법을. 시침질, 감침질, 박음질, 공그릭, 휘갑치기, 두땀상침, 세땀상침, 새발뜨기, 사뜨기, 홈질.
바느질하는 세계와 바느질하는 여자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그저 묻혀 있을 수도 있었던 소재를 발굴하고 혼신의 필체로 소중한 기록을 남긴 것이 김숨의 장편소설 <바느질하는 여자>이다.
바늘이 똑바로 서야 나무가 똑바로 서고, 인간이 똑바로 서고, 하늘이 똑바로 서고, 땅이 똑바로 서고, 탑이 똑바로 선다고 생각해. 364
바느질에 대한 자부심이자 책임감이다. 이런 의식 속에 행하는 바느질은 그저 삶에 필요한 일부로서의 바느질이 아니다. 바느질 자체가 삶이다.
이 소설에는 누비 바느질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거의 신의 경지,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수준에 다다를 것같은 세계이다. 군위네 남수덕(서금택, 박화순 자매의 어머니)씨의 누비옷 짓기는 미싱으로 뚝딱 옷을 양산해내는 수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경지에 올라 있다. 옥사모님은 남수덕씨의 누비옷을 두고 말한다.
쓸데없이 거드럭거리지 않고 도도하지 않단 말이야. 그렇다고 경박하지도 않고 비굴하지도 않으니..... 고상하고 의젓하니 겸손하고, 합다한 게 뭔가 깨우쳐 준단 말이야. 217
이 말은 사람을 두고 한 말처럼 느껴질 정도인데 금택의 어머니는 바로 누비옷과 일체의 경지에 다다랐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잔누비 쓰개장옷을 복원해 내고도 그녀의 공은 인정되지 않는다. 그것을 이용한 서재숙이란 이름만 세상에 알려질 뿐이다. 부귀공명을 멀리하고 유령처럼 뒷자리에서 바느질만 하다 손을 망치고 만 여인의 삶. 언젠가 읽은 단편소설이 있었다. 바로 김숨의 소설이었을 것이다. 후처로 들어가 새 남편의 자식들을 잘 키워내었으나 서류상으로 혼인 신고가 되어 있지 않기에 법적으로 아무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서글픈 존재의 이야기. 이 <바느질하는 여자> 역시 그런 주제가 담겨져 있다. 일생을 바느질하는 데 바쳐 장인의 경지에 올랐으나 다른 사람이 그 공을 가로채는 이야기. 김숨은 그런 존재를 발굴해 내고 깊이 조명함으로써 그 존재의 가치를 한없이 드높이고 싶은, 절실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슴을 울컥하게 만드는 순간이 책을 읽는 내내 이어지고 있었으니 작가의 노고는 헛되지 않았다. <바느질하는 여자>는 소장하고 싶은 책이다.
※ 2016년 3월 하순에 읽었으나 이제서야 블로그에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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