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새벽에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잤다.
얼마나 쌓였을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열광하지 않다니 이건 무슨 심사인가?
나름대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도.
무감한 태도로
마당과 대문 앞을 쓸고 나서 짐을 챙겨 신도림역으로 갔다.
지금까지 마라톤 대회의 사례로 보면 나는 눈 위에서 제법 강한 편이었다.
어릴 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달렸던 경험때문일까?
영하 7도라고 했다. 전날엔 영하 14도였는데 오늘이 더 추웠다. 바람 때문이었다.
요즘 자살 충동을 느낀다.
내년이 아주 힘들 것같다는 예상이 되는데 어떻게 버티어낼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해 놓은 것 없이 자꾸 늙어만 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점점 우울해진다.
마라톤 대회를 나가면서 건강관리마저 하지 않으면 나는 아주 황폐해질 것이다.
경제적 압박감은 상상초월 수준이다.
지금 현재 상태로 가면 I'm broke라고 말할 날이 코 앞에 닥친다.
역시 사람은 돈 때문에 좌절하나 보다.
돈 때문에 못하는 일이 너무 많으니 돈은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존재인 모양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가는 경로만 따른 것같다.
그렇게 친했던 친구와도 몇 년째 연락을 끊고 살다니....
바지는 츄리닝, 웃도리는 티셔츠 두 장 걸치고 달렸다.
크리스마스에도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이라면 골수가 아닐 수 없다.
오늘 만난 젊은이는 크리스마스 이브 전 날 여자친구와 헤어졌다고 했다.
크리스마스 이벤트로 생애 첫 하프를 함께 뛰자고 약속했다고 했다.
이들은 오늘 남남의 길을 뛰었다.
둘 중 한 사람은 대회장에 나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둘 다 나와서 각자 하프를 달리고 있었다.
젊은 친구들 요새 참 쿨하다.
잠깐이나마 서로 보지 않는 유예 기간을 두기 마련이었던 우리 세대와는 다르다.
어차피 남남이니까 의식하지 않았다.
자기보다 늦게 골인한 옛 여자친구에게 서슴지 않고 수고했어라는 말을 건네는 남친.
이 젊은이는 처음에 나보다 100여 미터쯤 앞서서 달리고 있었다.
그를 제친 것은 8킬로미터 가기 직전.
그 이후에는 내가 앞섰다.
눈밭이 나오면 나는 물만난 고기처럼 달렸다.
한 명씩 제쳐 나갔다.
내가 느끼기에도 전반이 슬금슬금이었으면 후반은 훨훨이었다.
15킬로미터를 지났을 때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기가 무섭게 호리호리한 체형의 달림이는 나를 제치고 나갔다.
15킬로미터를 지나서 나를 제친다면 내가 따라가기 힘들다는 계산이 나왔다.
결국 그가 후반부에 지치거나 속도를 줄이거나 하지 않으면 결코 잡을 수 없다는 계산이 나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프 우승을 눈 앞에 두고 있었는데 잠시 좌절감에 사로잡혔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 양반은 내 페이스메이커가 될 수 있겠다.
참가 인원이 적어서 나 홀로 대회 참가한 듯한 느낌을 이겨내기 힘들었는데 오늘은 동반자가 생겼네.
16.1킬로미터 팻말이 나오고 난 다음 잔여 5킬로미터는 거의 미친 듯이 달렸다.
맞바람이 만만치 않고 눈길은 미끄러웠지만 그건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나를 제친 사람보다 50미터 쯤 떨어져 골인하였다.
주최측은 내가 3위라고 했다. 이상하다. 1위가 언제 골인했담?
달리는 동안 풀코스 주자와 뒤엉켜 달렸지만 하프 주자 배번을 보지 못했는데......
도림천을 중간에 가로지르는 주자를 보았는데 그 사람이 양심을 속인 것일까?
완주가 중요하지 순위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렇게 중얼거리며 넘어갔다.
내 앞에 들어온 사람이 나보다 훨씬 억울하겠다. 그 사람은 후반에 엄청 역주했는데 1등을 놓쳤잖아.
어이없게도 내 기록은 동계 최고 성적이었다.
올해 29번 하프 마라톤을 완주했는데 두번째로 좋은 기록이었다.
한국마라톤 여행기획이 주최하는 대회에서는 하프를 총 네 번 달렸는데
8월, 9월, 10월, 12월. 달릴 때마다 기록을 경신하였다.
기록증과 완주메달을 주면서
스태프는 내 머리에 주렁주렁 달린 고드름을 신기하다며 한 마디 하였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육개장 사발면을 먹었다.
그저께 여친과 헤어진 생애 첫 하프 완주자가 들어왔다.
1시간 53분대로 들어온 이 젊은이는 내게 사진 촬영을 부탁하였다.
사진을 연출해 주었다.
출발 아치로 이동하여 출발 아치를 뒷배경으로 놓고
완주메달을 걸고 완주기록증을 든 포즈를 취하게 했다.
기억에 남을 사진이 되었다며 매우 즐거워하였다.
또 한 사람의 달림이를 알게 된 것이다.
12월 29일 하프 마라톤을 한 차례 더 뛰어주면 올해 하프 30회 완주의 기록을 세우게 된다.
Oh! My Goodness!
2004년에는 하프를 1년에 네 번 뛰어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해에는 13번 하프를 달리고도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했는데.....
집에 돌아오면서 급격히 우울해진다.
또다시 죽음을 떠 올리는 것이다.
모자: Salewa 바이저 버프
겉옷: 2008년 스포츠서울 마라톤 리복 기념 티셔츠
속옷: 나이키 티셔츠
신발: 아식스 젤라이튼 마라톤화(훈련용 경량화)
장갑: 지하철에서 구입한 코리아 장갑(천원짜리)
바지: 아디다스 츄리닝 바지(안에 아식스 반바지)
양말: JAKO 중목
목도리: 시장표 버프
테이핑: 오른쪽 무릎 두 줄 (선물받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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