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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가즈오 이시구로 <남아있는 나날>

HoonzK 2017. 10. 10. 23:06

※ 2017 노벨문학상의 영예는 가즈오 이시구로에게 돌아갔다. 정말이지 이 사람이 받을 줄은 몰랐다. 그동안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나 내가 읽어보지 못한 작품의 작가에게 돌아갔던 전례를 깨뜨렸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은 여러 권 읽었던 터라 그 친숙함 때문에 노벨문학상 수상이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 <남아있는 나날>, <창백한 언덕 풍경>, <녹턴>, <나를 보내지마>,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등..... <남아있는 나날>과 <나를 보내지마>는 원서도 소장하고 있으니.....

 

 Prize motivation: "who, in novels of great emotional force, has uncovered the abyss beneath our illusory sense of connection with the world"
수상 동기: “위대한 정서적 힘을 가진 소설을 통해 세계와 닿아있다는 우리의 환상 밑의 심연을 드러냈다”

 

지난 5일 수상이 발표된 후부터 책 판매가 700배 가까이 급증했다. 10일 인터넷서점 예스24에 따르면 이시구로의 저서는 수상 이후 4130권 팔렸다. 이는 수상 전 일주일과 비교해 688배 증가한 수치다. 노벨문학상 특수는 이런 것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영국 켄트대학교 철학과 출신이다. 영국의 켄트 대학교 기숙사에 머문 적이 있었던 나로서는 좀더 가까운 느낌의 작가이다.

 

2013년 12월 18일에 쓴 독후감을 찾아서 올린다. <남아있는 나날>. 글을 써 놓은 노트가 지난 10년 간 1백 권이 넘다 보니 찾는다고 고생했다.

 

※ 스포일링이 많습니다. 독후감이나 서평은 그 작품을 읽고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가즈오 이시구로.
일본인이 쓴 소설인데 원제가 <The Remains of the Day>이다. 무슨 일일까? 영어로 썼기 때문이다.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났으나 1960년 영국으로 이주해 살았으니 영어로 쓰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아 있는 나날>은 1989년에 발표하여 부커상을 받았다. 1993년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영화로 제작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영어판으로만 100만 부 이상 팔린 소설이다. 정보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는 책 <남아 있는 나날>을 먼저 알고, 영화를 알았다. 그런데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었다. 매우 우연한 기회에 2013년 12월 7일 EBS에서 영화가 방영되어 영화부터 보았다. 앤소니 홉킨즈가 스티븐스 집사장 역할을, 엠마 톰슨이 캔턴 하녀장 역할을 했던 영화로 가슴을 훈훈하게 적시는 느낌이 있었다. 영국의 아름다운 풍광과 인상적인 저택, 감정 기복이 크지 않은 영국인의 삶을 은은하게 표현해낸 영화였다. 집사장과 하녀장은 서로 끌리지만 연애 행위로 나아가지 않는다. 하녀장이 신호를 보내어도 집사장은 일체의 동요없이 반응할 뿐이다. 그런 내용임을 알고 책을 들었다.

 

가즈오 이시구로. 송은영 옮김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2010. 9. 17 2판 1쇄

 

 영화에서는 굳이 1인칭 화자 입장을 취하지 않고 그저 여러 인물들을 화면에 그려넣지만, 소설에서는 스티븐스 집사장의 진술에 따라 그려진다.
일단 책을 들면 내려놓지 못하게 하는 매력은 무엇일까?  화자가 이끌어가는 스토리 때문일까? 매끄러운 번역 덕분일까? 아니면 내 개인 취향 탓일까?


 35년 동안 영국의 달링턴 홀에서 집사 생활을 했던 스티븐스가 1인칭 독백으로 회상하는 스토리이다. 생애 첫 여행을 하면서 하나씩 둘씩 지나간 에피소드를 꺼내어 놓는다. 인생의 황혼기에 다다른 노인이 아직도 남아 있는 날이 있음을 깨닫고 자신에게 부족한 면인 농담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키워보리라 마음먹는다. 영국의 대저택을 관리하는 집사의 삶과 그가 느끼는 바는 무엇일까? 호기심을 갖게 된다. 집사의 전문적인 업무, 그 생경함이 점점 소설로 파고 들게 한 것인가?


 저명한 가문을 보좌했다는 긍지, 집사로서의 품위와 사명감, 그리고 그녀 캔턴. 열정적인 사랑이 지배하는 스토리는 아니지만 재미가 넘친다는 게 신기하다.

 

프롤로그 1956년 7월 달링턴 홀
첫날 저녁 솔즈베리
둘째 날 아침 솔즈베리
둘째 날 오후 도셋 주, 모티머 연못
셋째 날 아침 서머싯 주, 돈턴
셋째 날 저녁 데번 주, 타비스톡 근처 모스콤
넷째 날 오후 콘월 주, 리틀 컴프턴
여섯째날 저녁 웨이머스

 

 달링턴 홀의 집사로서 평생을 보낸 스티븐스가 새 주인 패러데이의 선처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새로운 하녀장을 스카웃하는 것이 명목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스토리가 집사의 소임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집사 생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일등급 전문가로 일류급 집사들의 모임인 '헤이스 소사이어티' 회원으로 일체의 사사로운 감정을 제어한다. 공간을 깔끔하게 유지하고, 은식기들을 반짝거리게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부친의 임종보다 방문객의 발을 더 챙기며, 유태 여성을 해고하라는 주인의 지시에 일체 토를 달지 않는다. 급기야 캔턴 양에 대한 사랑을 억누르고 그녀를 떠나보낸다. 이런 게 집사인가 되물으며 강한 흥미를 느낀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나리, 저로선 그 문제에 도움을 드릴 능력이 없습니다. 244
거듭 죄송합니다만 저는 도움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244
죄송합니다만 저는 그 문제에 대해서도 도와드릴 능력이 없습니다. 244

 

 외교문제를 결정짓는 각료들이 던지는 질문에 대하여 스티븐스 집사는 사견(私見)을 최대한 자제하고 집사로 해야 할 발언만 거듭한다.

 

 '품위'는 자신이 몸담은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집사의 능력과 결정적인 관계가 있다. 모자라는 집사들은 약간만 화나는 일이 있어도 사적인 실존을 위해 전문가로서의 실존을 포기하게 마련이다. 57

 

 그래서 캔턴 양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지도 모른다.

 

스티븐스씨, 당신은 왜, 왜, 왜 항상 그렇게 '시치미를 떼고' 살아야 하죠? 189

 

 러브 스토리로도 읽어본다.
스티븐스 집사와 캔턴 하녀장의 로맨스.
 지독하리만치 감정 표현을 억제하고 말을 돌려서 말하는 중년의 집사와 하고 싶은 말을 서슴지 않고 해대는 30대의 여성이 꾸미는 로맨스. 단 한 차례의 신체 접촉도 없이, 감정의 진폭도 잔잔한 물결처럼 넘어가는 이야기. 두 남녀가 연정을 품었는지 말았는지도 모를 사랑 이야기.

 

 "그 사람이 제게 청혼을 해 왔어요. 당신도 알 권리가 있는 것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물론이오, 캔턴 양. 정말 흥미로운 얘기로군요."
 "저는 아직도 생각중입니다."
 "그렇겠지요."
 "제 지인이 내달 중으로 서부 지방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어 있어요."
 "아하."
 "좀 전에도 말씀드려듯 저는 아직 마음을 결정하지 못했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상황을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같아서요."
 "고맙소, 캔턴 양. 즐거운 저녁이 되기 바랍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소." 266

 

 "스티븐스씨, 최소한 오늘밤 제 지인과 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정도는 궁금하지 않으세요?"
 "실례할 생각은 없지만 켄턴 양, 나는 지체없이 위층으로 다시 가봐야 하오. 그야말로 세계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지금 이 순간 이 집에서 진행되고 있어요."
 "안 그런 때가 있기는 한가요? 좋아요, 그렇게 급하시다면 요지만 말씀드리지요  제 지인의 청혼을 수락했습니다."
......
 "아, 그래요, 캔턴 양? 그렇다면 축하할 일이군요."
.....
 "제가 이 집에서 일해온 지 여러 해가 되었건만,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도 겨우 축하한다는 얘기밖에 못하시나요?"
 "캔턴 양, 나는 진심으로 축하했을 뿐이오. 거듭 말하지만 지금 위층에서 중차대한 일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속히 내 자리로 돌아가봐야 하오."
 "스티븐스씨, 당신이 제 지인과 저에게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270-1

 

 캔턴의 구애나 다름없는 고백을 스티븐스는 그렇게 넘겨 버리고 만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방 앞에서 회의하고 있는 스티븐스. 결국 캔턴은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 캔턴의 자식이 결혼하기 직전 스티븐스와 캔턴은 해후한다. 자신이 갖게 된 또다른 삶을 떠올리면서. 하지만 그건 생각일 뿐이다. 되돌아가야 한다. 황혼기에 접어든 삶을 맞이한 노년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그런 것이다. 차분하게 옛일을 떠올리고 감내하는 것.

 

 달링턴 홀에서 중요한 외교 회의가 많이 열렸고, 시중드는 역할을 제대로 하여 '아주 미미하게나마 역사의 흐름에 공헌하는 데 일조했노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데서 오는 만족감을 느낄 권리'(174)를 누렸다면 집사로서의 소임은 다 한 것이다. 비록 달링턴 경이 나치주의자들에게 이용당했다는 비난을 받았고, 그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은 전혀 하지 못햇다고 하더라도......

 

 스티븐스는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니 이제 죽음을 준비하는가? 아니다. 남아있는 나날을 그냥 보낼 수는 없다.

 

 피끓는 청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계속 앞을 보고 전진해야 하는 거요.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