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올라가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를 읽었다.
정민 교수가 고등학교 시절 먹기 싫은 밥을 물에 꾹꾹 말아 간신히 삼키는 것같다고 표현했던 소설.
종교 소설. 영혼이 아름다운 젊은 신부의 짧은 생의 기록을 담은 내용이다.
집중하기 어려워 수시로 분심(分心)을 갖게 되는 작품이었지만 인천 다녀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읽고, 급기야 북한산에 올라 읽기까지 했다.
뜻하지 않게 인공 동굴까지 찾아내었다.
동굴 안 쪽에 그려진 붉은 십자가가 다소 위압적으로 다가와 동굴 안으로 들어가 책을 읽고 싶지는 않았다.
전후좌우 공간이 펼쳐진 바위에 앉아 읽었다.
산에서 책을 읽던 날은 32도가 넘게 기온이 올라갔기 때문에 악착같이 그늘이 될만한 곳을 찾았다.
책을 읽다 보니 가까운 영락 기도원에서 울부짓는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 기도 소리와 종교 소설... 어울리긴 했다.
2년 전 동대문 도서관에서 대출했다가 거의 읽지도 못하고 반납해 버린 소설이었다.
2010년 4월 20일 대출 2010년 5월 3일 반납
뭐... 이렇게 끌리지 않는 소설도 있나 싶었다.
이번에 조선일보에서 명사 101명이 추천한 파워클래식에 선정되었기에 다시 한번 도전했다.
산에서 거의 대부분을 읽은 뒤 다음날 마라톤 택배를 기다리면서 완독하였다.
2012년 7월 4일 대출 2012년 7월 10일 완독
※다음은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입니다.
입력 : 2012.07.09 03:32
이 작품은 애처롭도록 유약한 젊은 신부가 쓴 내면 일기. 3개월 짧은 직무 수행 중 느닷없이 찾아온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는 신부의 사목 기록이기도 하다. 종교가 소설의 배면(背面)을 이룬 대부분의 작품과 달리, 이 책은 종교가 소설의 내용이자 전경(前景)이다. 종교문학의 정수(精髓)로 불리는 이유다.
젊은 신부가 사목을 맡게 된 앙브리쿠르 본당과 그 마을은 권태와 타성 그 자체. 어쩌면 탈그리스도교 과정에 접어든 20세기 초반 서구의 보편적 풍경일 것이다. 놀랍도록 순수한 사제는 열정적으로 나태한 영혼을 절절하게 사랑한다. 작가가 강조하는 것은 일종의 ‘어린이 정신’. 세계는 선한 자와 악한 자로 이분되는 게 아니라, 어린이 정신으로 충만하여 사는 성인과 그것을 잃어버린 불행한 사람들로 나뉜다고 말한다. 번역자 유영란씨는 “안팎으로 갉아 드는 고통에도 정녕 어린이 같은 욕심 없는 사랑으로 사제의 위엄을 확보하는 신부의 영적 혜안이야말로 베르나노스적”이라면서 “한마디로 완숙기에 든 베르나노스의 깊은 영성에서 걸러진 정수”라고 했다.
입력 : 2012.07.09 03:32 | 수정 : 2012.07.09 04:30

정민·한양대 국문과 교수
몇 대목에서는 그때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소녀 세라피타가 신부에게 한 말. "전 우는 게 역겹고 더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울면 슬픔이 빠져나가 버리고 마음은 버터 녹듯 녹아 버리죠. 끔찍한 일이에요!" 의사 라빌이 진단 후 신부에게 건넨 처방. "누구나 제 병을 지닌 채 사는 데 익숙해져야 합니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우리 모두 다 말입니다."
다음은 새로 읽으면서 밑줄 친 몇 대목이다. "맹수 조련사가 하듯 불의란 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 그놈이 뒷걸음질칠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네!" "고해소를 찾아와 부당 이익을 취했다며 죄를 고백하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 부류도 가난뱅이 입장에 처하면 술집으로 갈 것이다. 비참한 사람의 배는 빵보다는 얼큰한 환상을 더 필요로 하니까." "부인, 지옥이란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육욕의 악마는 말이 없다." "증오는 무관심과 무시입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마침내 그분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계십니다." "모르핀으로는 취하지 않으니 안심하십시오. 이놈은 골 속을 꽤나 분명하게 정리해 주죠. 저는 아마도 당신이 기도에서 구하는 것을 이것에서 구할 뿐이죠. 망각 말입니다." "희망은 인간 안에 있는 힘 세고 사나운 짐승입니다. 제풀에 조용히 숨이 꺼지게 그놈을 내버려두든지 고삐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손아귀에서 놓쳐 버리면 그 짐승은 할퀴고 물 겁니다."
삶의 깊은 통찰에서 나온 이런 문장들이 도처에서 웅성거린다. 세상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깊은 고통을 감추고 산다. 삶은 위장의 가면이다. 평화는 은폐된 유예다. 일상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연속이다. 엊그제 TV에 나와 애정을 과시하던 잉꼬부부는 얼마 뒤 '사실은 끔찍했다'며 갈라선다. 만인이 부러워할 미모의 여배우는 자꾸만 자살하고, 부자들은 끊임없이 송사를 반복한다. 하루가 비참한 인생들은 사는 게 차라리 단말마의 비명 같다. 인생에 구원은 있는가? 신은 대체 있기는 한가?
선과 악이 밀도가 다른 두 액체처럼 섞이지 않은 채 포개져 있는 듯한 앙브리쿠르 시골 본당. 나른한 권태와 뒤틀린 절망이 11월에 내리는 는개처럼 둘러싼 공간. 첫 본당에 부임한 지 3개월 된 초짜 신부, 그가 자신들의 삶 속에 끼어들까 봐 속물적 군상들은 신부를 완강히 거부한다. 몇 소소한 사건 너머로 편견과 오해와 독선과 음모가 늪처럼 숨어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k@chosun.com
젊은 신부의 열정을 감상벽으로, 신자를 짐승 떼에 견줘 훈계하는 토르씨의 본당 신부. 신부를 통해 백작 딸과의 갈등을 풀려다 실패하자 악담을 익명편지로 보내는 가정교사 루이즈양. 아들의 죽음을 딸에 대한 증오로 맞바꾼 백작 부인은 발작적으로 저항하다가 신부에게서 가까스로 평화를 얻고 이튿날 자살한다. 무신론으로 신부를 공박하던 델방드 의사 선생은 사냥총으로 간단히 자기 삶을 끝낸다. 그 둘레에는 등을 돌린 채 마치 고양이처럼 두 눈을 반쯤 감고 곁눈질로 신부를 관찰하는 마을 사람들이 있다. 덫은 도처에 쳐있고, 그 영혼들 때문에 그는 부단히 고통받는다. "나는 오직 나만을 위해 하느님을 청했다. 그분은 아니 오셨다."
그는 환속한 동창 신부의 지저분한 방에서 숨을 거둔다. 삶은 여전히 시궁창 속 같고, 비루하다. 구원의 시간은 결코 올 것 같지가 않다. 위암을 선고받고 그는 말한다. "이 아침과 저녁들, 이 길들을. 변화무쌍하고 신비스러운 저 길들, 사람들의 발자취가 가득 새겨진 저 길들. 대체 나는 저 길들, 우리 길들, 이 세상의 길들을 그리도 사랑했더란 말인가?" "아무려면 어떤가? 모든 것이 은총이니." 그는 이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그는 꺾이지 않았다. 졌지만 이겼다. 이 소설을 새로 읽으며 30여 년 전의 여드름투성이 소년과 난데없이 조우했다. 읽는 내내 마음이 짠했다. 신부가 되기로 결심하고 어머니와 함께 본당 신부님을 찾아갔던 고등학교 1학년짜리의 꿈이 이 소설 때문에 바뀌고 말았는지는 이제 와서 분명한 기억이 없다.
[140자 트윗독후감]
"나는 밤을 내쉬고 밤을 들이마신다. 밤은 어떤 식으로든 감히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영혼에 난 틈새를 통해 내 안에 들어앉는다. 나 자신이 밤이다." 차분하게 일기로 옮겨낸 시골 신부의 이야기가 그림같다. (트윗 응모자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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