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넥타이를 매다(2017/07/20)
휴대폰 문자 송신자에서 친구 이름이 떴다. 그 친구와의 추억이 떠올랐다. 1998년 1월 1일.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었다. 새해 일출을 보겠다고 울릉도 성인봉에 올랐다가 허탕을 쳤는데 그 때 함께 간 친구.
폭염경보가 내린 날 아침 그 친구로부터 부고가 들어왔다. 일반적인 부고 내용 상단에 한 문장이 더 붙어 있었다. '훈식아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 30년 절친의 어머니. 그동안 앓았던 것도 아닌 분이라 너무 급작스러운 부음이었다. 1988년 올림픽이 있던 해. 친구의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여름에 돌아가시고 난 후에야 돌아가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보다 먼저 죽는 불효를 할 수 없어서 당신의 운명을 애써 늦춘 것같다. 영구차에 실린 관을 붙들고 친구의 어머니는 '살아 고생 그렇게 시켜 놓고 이렇게 가느냐'며 절규했다. 그 절규에 가락이 있어 마치 노래처럼 들렸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흐느끼던 친구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좀처럼 모자를 벗지 않는 내가, 양복도 입지 않는 내가, 모자를 벗고 검은 넥타이를 맸다. 대낮 폭염 속에서 땀으로 흠뻑 젖어 영안실을 찾았다. 입관 때문에 조문은 지연되었다. 친구의 표정은 말이 아니었다. 너무 급작스러운 운명이었다고 했다. 30년 동안 남편없이 사신 분, 전날 잠깐 낮잠을 잤는데 그게 영면의 잠이었다.
친구는 지난 해 가을 어머니와 목포 여행을 가기로 했다면서 내게 같이 가자고 했다. 가족 여행에 내가 왜? 넌 와도 돼.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시간을 낼 수 없었지만 다음에 어머니를 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영정 사진으로 대하게 될 줄은 몰랐다.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도 친구는 우리 어머니 걱정을 했다. '어머니 많이 편찮으시다면서? 잘 해드려.'
장례식장 가는 길이 멀었다.
풀어 놓은 검은 넥타이
명복을 빕니다.
방금 조문을 마쳤다.
길을 건너야 하는데
지하도 입구에서 서성댄다.
폭염 경보가 내렸지만
그늘을 피하고 싶었다.
햇빛 아래 검게 타면서도
머뭇거림을 멈추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