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 마라톤!

2024 머니투데이방송 3.1절 기념 마라톤대회(2024/03/01)-FULL 236

HoonzK 2024. 3. 12. 18:58

 이건 완전히 지는 싸움이었다. 패배하리란 사실을 알고도 벌이는 결전. 2024년 3월 첫날의 풀코스 마라톤. 오전 아홉시경 뚝섬수변공원에 마라톤 참가자들과 함께 서 있는 나는 너무 뻔뻔스러웠던 건 아니었던가? 매주 풀코스를 달리는 희규형님, 기옥형님과 악수를 나누며 올해 첫 풀코스 출전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풀코스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내 몸은 석달 전과 비교하면, 아니 단 열흘 전과 비교해도 체중이 꽤 불어나 있었다. 감기 몸살 후유증으로 2월에 달려야 했던 풀코스를 포기한 뒤 이 대회도 불참할까 하는 유혹에 사로잡혀 있었다. 

 대회 당일 새벽부터 잠을 설쳤다. 새벽 1시가 넘어 겨우 잠들었는데 3시 40분 쯤 너무 시끄러운 대화 소리가 들려 잠을 깨었다. 어머니가 혼자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따져 물으니 내 동생이 와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 했다. 왜 그러세요? 새벽 3시에 누가 와요?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망상일 뿐이라고 말하고 방에 돌아와 다시 누웠지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대회장으로 갈 시간이 다 될 때까지 그저 누워만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출발 직전 현관을 열고 나갔다 온 사이 발생했다. 현관문이 잠겨 있었다. 방에 휴대폰과 열쇠를 모두 놓아두고 잠시 나왔기 때문에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무리 문을 두들기고 소리를 쳐도 현관문은 열리지 않았다. 체감온도가 영하 12도까지 떨어진 상황에서 헐벗은 상태로 몸이 꽁꽁 얼어 버렸다. 지난 7년간 단 한번도 새벽에 일어나 현관문을 잠근 적이 없던 분이 일부러 나와 문을 잠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문을 잠그고는 딸에게 전화를 걸어 새벽에 왔다 가지 않았느냐고 묻기까지 했는데 이때 전화를 받았던 동생이 전화를 통해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엄마, 문을 열어주세요,라고 한 뒤에야 문을 열어주었다. 거동이 쉽지 않아 문을 잠그기 힘들었던 만큼  여는 것도 매우 오래 걸렸다. 갑작스럽게 발생한 일로 출발 준비가 늦어지기도 했거니와 컨디션은 완전히 바닥을 쳤다. 달리는 동안 힘들면 새벽에 밖에서 갇혀(locked out)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던 일이 떠올라 서운함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지난 몇 년 간 대회에서 츄리닝 바지를 입고 달린 일이 없었는데 오늘은 너무 추워서 평소 훈련하는 복장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두꺼운 긴팔 티셔츠 두 장을 걸친 것도 모자라 바람막이까지 더 했다. 바람막이를 덧입으면서 배번은 가려졌다. 카메라맨을 만나면 맞바람이 불어도 앞춤을 풀어헤쳐 배번을 보여주느라 몹시 바빴다. 화장실 이용도 스트레스였는데 뚝섬 코스에서는 제대로 갖추어진 화장실이 한군데 밖에 없는 건 늘 아쉬움이었다. 참고 달려도 상관없었겠지만 한가지 스트레스라도 줄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19킬로미터 남짓 달렸을 때 만나는 화장실도 소변기 하나, 좌변기 하나인데 그마저도 누군가 선점하고 있다면 되돌아 나와야 할 일이었다. 고맙게도 좌변기 자리 하나가 비어 있어 근심을 풀 수 있었다. 2회전 할 때 보니 화장실을 이용하느라 줄을 서 있기까지 했다. 

 물품 보관이 지연되어 출발은 5분 가량 늦어졌다. 풀코스, 하프코스 참가자가 동시 출발인데 좁은 출발 지점에 2천 명이 넘게 물려 있어 출발 신호가 울린 후 내가 출발 패드를 밟은 것은 선두 주자가 나간 뒤 1분 30초나 지난 후였다. 9시 08분 25초였다. 뛰기 시작했지만 이건 뛴다고 할 수 없었다. 주변 달림이들이 한 마디씩 했다. 

 이건 달리는 게 아니라 아예 걷는 건데요. 

 오늘은 완주만이 목표였기 때문에 예상한 것보다 느려도 상관없었다. 1킬로미터를 7분 이상 걸려 통과한 뒤 나를 제치고 나아가는 낯익은 분이 보였다. 희수형님. 아니, 제 버프를 보고도 못 알아보고 그냥 가시는 거예요? 그때부터 9킬로미터 지점까지는 함께 달렸다. 6분에서 6분 15초 페이스를 지키며. 연대별 입상을 노린다는 여성과도 대화할 정도로 천천히 달렸다. 만 69세의 SJ님은 바라는대로 연대별 3위에 입상하였다. 후반에 내게 추월당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지 않았다면 1등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1위와 2위는 단 1초 차이였고, 2위와 3위도 14초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오늘은 내가 아는 분들 누구보다도 늦게 골인한 하루가 되었다. 4시간 20분대의 은수형님, 희수형님, 춘효형님, 인천고 길석님, 서브 4의 해병대정의님, 기옥형님 등..... 추위 속에서도 맹렬한 속도를 이어나간 인천연형님은 60대 1위를, 희규형님은 70대 3위를 차지했다. 

 구리 방향으로 달려갈 때는 맞바람이 강하지 않아 바람막이를 벗어 가슴쪽에 묶었다. 달리다 보니 허리쪽으로 내려가긴 했지만 풀리지는 않았다. 5킬로미터는 31분을 넘겼고, 1차 반환(10.55킬로미터)은 1시간 4분을 넘겼다. 거리 표지판은 바람 때문에 태반이 넘어간 상태였다. 돌아올 때는 맞바람이 칼바람 수준이라 발걸음을 옮기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허리에 두르고 있던 바람막이를 다시 입는데 맞바람 속에서 옷을 입는다는 것이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 13킬로미터쯤 달렸나? 건너편에 너무도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하프 종목에 참가한 아세탈님이었다. 대회장 주로에서 본 것은 5년만이니 감회가 남달랐다. 지난해 12월 생일선물로 드린 전마협 참가권으로 출전한 것이니 의미가 있기도 했다. 9시 37분에 출발했지만 매우 여유있어 보였다. 기록에 대한 욕심을 버렸기에 이런 여유도 있는 것 같았다.

 한강 건너편으로 롯데월드타워도 보이고 잠실종합운동장도 보였다. 그러는 사이 화장실에 들러 근심을 풀었다. 출발점이자 골인점으로 돌아왔을 때는 결단이 필요했다. 무조건 되돌아가야 했다. 꿀물 한 잔 마시고 남은 하프 거리를 채우기 위해 대회장을 외면했다. 구리 방향으로 향하자 맞바람이 사라지면서 다시 바람막이를 벗어야 했다. 이 바람막이는 반환한 후 다시 입게 된다. 오후가 되어도 체감온도는 영하 8도 이하였기 때문에 달리기 조건은 나아지지 않았다. 25킬로미터 쯤 달렸을 때 1등 주자가 오고 있었다. 나보다 2시간이나 빨리 골인할 것 같았다. 그리고 아세탈님을 또 만났다. 아세탈님은 하프를 달리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무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세탈님을 만난 후 어차피 서브 4도 못하는 레이스를 끝낼까 싶었지만 참고 나아갔다. 3시간 42분대로 골인하는 샛별상민님이 예전의 내 기량을 기억하며 '강프로'라고 응원해 준 일에 감사하면서. 2.5킬로미터마다 설치된 급수대는 빠뜨리는 법이 없었다. 'perfect energy'라고 노래하는 김채원 목소리가 들려 힘이 나는 순간이 있었는데 배낭을 메고 달리는 주자가 들려주는 르세라핌의 영어 노래 [perfect night]는 너무 빨리 끊어져 버렸다. 노래가 주는 지원도 큰 힘이 될텐데. 머릿속으로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나아가는데 음치가 된 지 오래라 쉽지 않았다.

30킬로미터 쯤 달렸을 때 천군만마와 같은 지원이 있었다. 3차 반환 지점(31.6킬로미터)에서 지원하는 프로게이너 파워젤을 은수형님이 챙겨와 내게 미리 준 것이었다. 에너지를 얻어 마침내 마지막 반환점까지 갔다. 이미 3시간 22분이 넘어가 있었다. 바나나도 먹고 음료수도 마신 후 천천히 움직였다. 대화가 필요했다. 열대여섯살 쯤  먹은 청소년이 아버지와 함께 레이스에 참가한 것 같아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대답은 데리고 나온 아버지가 해 주었다. 하프 완주에 용돈을 걸었다고 했다. (과거에는 어린 학생을 하프 종목에 본 일이 없었는데 요즘은 가끔 보게 된다.) 내가 이것저것 물어도 아들은 답을 하지 않고 아버지가 모두 답했다. 먼저 가겠다고 한 내게 응원을 보낸 것도 아이의 아버지였다. 

 곧 10킬로미터 남았다는 표지판을 만났다. 32.195킬로미터나 달린 것이었다. 7분 페이스로 가도 4시간 30분대는 가능했다. 아예 내려 놓으니 마음이 편했다. 어느 시점을 지난 다음에는 7분대로 뛰거나 6분대로 뛰거나 상관없이 4시간 30분대의 예상 기록이 유지되었다. 5분대로, 급기야 4분대로 뛴다고 해도 4시간 30분대의 기록은 그대로였다. 맞바람은 1회전 때보다 더 심하게 느껴졌다. 얼굴이 칼에 베이는 느낌이랄까. 바람막이를 다시 입는 것도 고역이었다. 펄럭펄럭. 겨울이 끝난 줄 알았는데 3월에도 맹추위라니. 워낙 늦게 달리고 있어서 그런지 3개월만에 풀코스를 달리는데도 다리가 그다지 피곤하지는 않았다. 지독하게 느린 LSD. 
 32킬로미터 이후 나를 제치고 갔던 두 명의 주자는 모두 따라잡았다. 돌아갈 때 만나는 오르막 덕분이었다. 몇 백 미터를 남기고 난 뒤에는 맞바람에도 바람막이 지퍼를 열었다. 사진사에게 배번을 보여주었다. 바람막이가 펄럭이니 앞으로 나아가기가 무척 힘들었다. 

4:33:07.19

km당 6분 28초 페이스였다. 추웠지만 츄리닝 바지엔 소금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땀이 백태처럼 말라 붙어 있었다. 질 줄 알고 벌인 분투였지만 완주만으로도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게 마라톤이라 고된 분전이 싫지는 않았다.

 희수형님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사진을 찍어주었다. 너무 늦게 골인한 나머지 돌아간 줄 알았던 아세탈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주자들보다 30분이나 늦게 출발하여 하프를 2시간 50분대로 달렸다고 하지만 내가 너무 늦게 골인하여 1시간 이상 기다린 것이었다. 기다려준 배려심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등촌샤브 칼국수 자양점에서 점심도 함께 했다. 2년에 한번 하던 식사를 한 달 사이에 두 번 하니 좋았다.

 젖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남자 탈의실 천막을 향하는데 철거하고 있었다. 아직 옷을 벗은 참가자도 있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천막을 걷어내고 있었다. 풀코스 완주 제한 시간인 5시간을 넘어간 것도 아닌데 이 무슨 일인가? 전마협, 요즘 왜 이러는가? 1년간 하프 2시간 이내, 풀코스 5시간 이내 완주 기록증이 없으면 풀코스 신청은 불가하다며 공지했던 전마협. 화장실에 가서 옷을 갈아입는데 갈아입을 웃도리 한 장이 보이지 않았다. 새벽에 서두르느라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 완주 후에도 결정타가 끊어지지 않고 있었네.
 

 

 
 

 

 

체중이 불어난 태가 사진으로 확인된다.
사진 찍히려고 바람막이 지퍼를 열어 젖혔다.

 

반성의 의미로 코로나 전 사진을 가져와 봤다. 이번보다 1시간 10분 빨리 달릴 때의 모습. 일단 살을 빼는 게 급선무이다.


 

근래 이렇게 늦은 적이 없었다

 

골인하는 모습을 아세탈님이 찍어주었다.
이 사진은 희수형님이 찍어 주었다
아무리 봐도 이건 한겨울 훈련 복장이다.

 
 
 

 
 

아세탈님과 샤브샤브를 먹었다
칼국수도 익혀 먹었다.
볶음밥으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