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경기마라톤대회. 갈 생각이 없었다. 전혀.
로운리맨님이 응원오라고, 놀러오라고 해도 이번에는 갈 수 없다고 했다.
'갈 수 없다'가 '확답을 못하겠다'로 바뀌고는 있었지만 예의상 그렇게 말한 것일뿐 여전히 갈 생각은 없었다.
내가 오면 콜라 보급을 부탁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콜라 보급 지원이 아니라 대회 직접 참가로 갈 뻔 했다. 대회 이틀 전 희수형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배번을 구할 수도 있으니 경기마라톤 풀코스 참가할 생각이 없느냐고 했다. 바로 좋다고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30분이 지나기도 전에 대회 출전은 무산되었다. 내게 올 수도 있었던 배번이 전날 쓰레기로 버려졌다고 했다. 경기마라톤과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그렇게 끝난 것이었다. 적어도 대회 당일 새벽까지는.....
혹시 대회 전날 수원에 응원 오라고 로운리맨님이 부탁한다면 뭐라고 답할지 준비해 놓고 있었다. 김채원이 윙크하는 사진에 문구를 새겼다. 아쉽지만 못 가요/ 멀리서 응원할게요
아무 연락이 없었다. 대회 당일 새벽 5시가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조금이라도 갈 마음이 있었다면 그렇게 늦게 잘리 없었다. 그로부터 2시간이 되기 전에 카톡 문자가 들어왔는데 인지하지 못했다. 문자 수신음을 듣기에는 너무 고단한 상태였다. 8시 쯤 잠이 깨어 혹시 문자 들어온 것은 없는가 스마트폰을 보니 로운리맨님에게서 6시 52분부터 7시 18분까지 문자와 유튜브 동영상이 와 있었다.
혹시 오시면 32키로 지점 성대역 앞에서 콜라 급수 부탁드립니다. 8시 30분 출발이니 10시 35분 이후 지날 겁니다.
아니 11시 5분 이후에요.
첨부된 동영상은 The Killers가 부르는 'All These Things That I've Done'이었다. 문자 마지막에는 노래 가사의 일부분인 'Help me out yeah'라고 적혀 있었다. 도움을 사무치게 갈구하는 문자였다. 어떤 문자는 어떤 외침보다 더 크게 들리는 법인가 싶었다.
콜라를 지원하는 것보다 더 큰 동기 부여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잠시 생각했다. 32킬로미터 지점에서 아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면 포기할 수도 있는, 늦추어 달릴 수도 있는 레이스를 좀더 집중해서 운용하게 되지 않을까? 맞다. 나라도 누군가 기다린다면 없던 힘까지 날 것이었다.
수원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집에서 바로 나갈 순 없었다. 집을 비우는 만큼 내 부재를 감당할 준비를 해 두어야 했다. 그 바람에 시간이 더 갔다. 이제는 서둘러도 11시 5분 성균관대역까지 가기는 힘들었다. 생각보다 수원은 멀었다. 로운리맨님은 성균관대역에 다다르면 나를 찾고 또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낙담하겠지. 그래도 전의는 상실하지 말아야 하는데.
가 봤자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응원 못 드렸네요. 이 글을 보실 때면 이미 골인해 하셨겠네요. 잘 뛰셨나요?
이렇게 썼다가 다 지웠다.
융통성을 발휘하기로 했다. 수원에 가긴 가는데 행선지를 바꾸기로. 35킬로미터 이후 만나는 화서역. 코로나 유행 전 자주 이용했던 역이라 매우 낯익은 곳이었다. 주자들이 어떤 방향에서 달려와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생생하게 기억하는 곳. 늦게라도 거기서 콜라 지원을 하도록 하지.
4호선을 타고 가다가 환승이 가장 편한 금정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면 좋을텐데, 수유역에는 오이도행이 아닌 사당역행 열차가 들어왔다. 서울역에서 환승하면서 시간이 지체되었다. 소설 100페이지를 읽을 정도로 멀기도 멀었다. 마라톤 기록 측정 사이트에 접속하여 로운리맨님이 어느 정도의 속도로 나아가고 있는지 검색했다. 본명으로 검색하니 사용자 정보가 없었다. 황당했다. 당황하지 않았다. 인천마라톤에서 참가자명을 '로운리맨'으로 했던 기억이 나서 '로운리맨'으로 검색해 보았다.
화서역에서 내렸다. 화서역 앞 주로에 가까이 갔을 때 3시간 40분 페이스메이커가 지나갔다. 11시 30분경이었다. 로운리맨님이 이 사람보다는 빠를텐데 내가 너무 늦었구나. 차선책. 건너편 주로로 가면 혹시 모르겠다 싶었다. 횡단보도를 건넌 후 수원역 방향으로 가는데 건너편에 로운리맨님일지도 모를 주자가 보였다. 좀 멀었지만 로운리맨님의 달리는 모습을 한두번 본 것도 아니니 맞는 것 같았다. 3시간 40분 페메 뒤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참 좋았을텐데. 조금이라도 빨리 콜라를 전달하고, 무엇보다도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건달이 나타나 에너지를 불어 넣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이제는 부지런히 걸어가 조금이라도 일찍 로운리맨님을 만나자는 생각 뿐이었다. 슬금슬금 뛰어가도 좋겠지만 배낭이나 복장 때문에 몸이 무겁고, 잠이 부족하여 피곤했다. 땀이 나면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다 뛰었다가는 거품 생긴 콜라가 뚜껑을 개봉했을 때 분수처럼 뿜어져 나올 수도 있었다. 샴페인처럼 터지는 콜라? 지금 이벤트하자는 게 아닌데!
뜀걸음 스타일로 걸었다. 37킬로미터 표지판을 지났다. 마중가는 내게는 내리막, 맞은편에서 오는 주자들에게는 오르막인 구간이 나왔다. 36.5킬로미터 쯤 되었을 것이다. 화서역에서 보았던 주자가 로운리맨님이 맞았다. FUN RUN하시면 되는데 무슨 응원이 필요한가요? 그렇게 말하며 콜라를 내밀었다. 제로펩시콜라 병이었지만 안에는 다른 콜라가 담겨 있었다. 로운리맨님은 서브4가 목표라고 했다. 나는 과장을 보태어 이제는 걸어도 서브4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로운리맨님은 함께 걷자고 했다. 그건 안 될 말이었다. 뛰셔야지요. 로운리맨님은 두르고 있던 벨트와 쓰고 있던 모자를 내게 넘겼다. 물에 담궜다 바로 뺀 것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 날이 더웠던 만큼 36킬로미터를 넘게 달리는 동안 얼마나 땀을 많이 흘렸는지 알고도 남았다. 콜라를 건넨 다음에는 바로 집에 갈까 했는데 행선지가 수원종합운동장으로 바뀌었다. 건네받은 물품을 전해주려면 꼼짝없이 골인 지점으로 가야 했다. 3킬로미터가 넘었다. 나는 걸을 것이고 로운리맨님은 뛸 것이라 5킬로미터 남짓 남은 로운리맨님이 먼저 골인할 것이었다. 만석공원을 감아돌아 풀코스 거리를 맞출 분과 비교하면 짧았지만 익숙한 길이 아니라 거침없이 걸을 수는 없었다. 수시로 방향과 거리를 확인해야 했다. 발빠르게 걸으면서 몸이 더워져 자켓을 벗어야 했다. 마스크는 썼다 벗었다 했다. 미세먼지가 보통 수준이라 다행이었다. 걸어가다 성하형을 보았지만 아무리 불러도 돌아보지 않았다.
대회장에 도착했다. 아직 서브4 이전의 기록을 가진 주자들이 속속 골인하고 있었다. 풀코스 참가자가 1천 명이 넘으니 대회는 아직 한창 진행중이었다. 이미 골인했을 로운리맨님은 보이지 않았다. 마라톤 용품 판매상을 만나 바지를 사고 있을 무렵 전화가 왔다. 로운리맨님은 편의점 앞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고 했다. 만나서 고등어 조림으로 점심식사했다. 생선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고등어, 무, 시래기의 조합이 환상적이었다. 포만감 충만했다. 이제 로운리맨님과는 한동안 볼 수 없으리라는 일정을 확인했다.
7770번 버스를 타고 사당역까지 와서 4호선 전철을 타고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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