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름이 내려와 롯데월드타워를 감쌌거나, 타워가 그 구름을 뚫었거나.
5.7킬로미터 달리기도 버거웠거나, 그 정도 거리는 부담이랄 것도 없었거나.
비가 내린 후라 기온이 떨어져 몸이 잔뜩 움츠려 들었거나, 서늘한 날씨 덕분에 오히려 달리기가 한결 수월했거나.
칩이 없는 5킬로미터 종목이라 기록에 대한 부담이 없었거나, 짧은 거리라도 대회에 나왔으니 좀더 열심히 뛰어 운동 효과가 컸거나.
너무 오랜만의 대회 출전이라 필요한 물품을 챙기는 데 경황이 없었거나, 방만한 삶을 추스리는 긴장감 덕분에 간만에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거나.
코로나 유행이 아직도 이어지는 상황인데 엄청난 인파에 휩싸여 두려움에 떨었거나, 수천명 이상이 모이는 마라톤 현장에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졌거나.
그렇게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되는 상황 속에서...
사이버영토수호 마라톤대회에 참가했다. 코로나 유행에도 마라톤 대회에 출전했었지만 죄다 개별 출발이었다. 이번처럼 코스별 집단 출발은 그야말로 3년만이었다. 마라톤 대회 각 코스별 출발 직전 꽉 들어찬 인파의 추억은 아득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대규모 참가자가 함께 하는 마라톤 대회는 돌아왔다. 풀, 하프, 10킬로미터 주자들 출발을 지켜보는 한편 나 역시 짧은 거리나마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야외에서 굳이 마스크 착용은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지난 몇 년 동안 풀코스를 달릴 때에도 마스크를 썼던 것처럼 5킬로미터 남짓 달리면서도 마스크를 내리지 않았다. 올림픽 공원의 외곽 도로를 따라 달리는 대회로 참가자가 적지 않았지만 주로가 넓어 달리는 데 방해받지는 않았다. 오히려 주자들 틈바구니 속에서 보조를 맞추는 즐거움이 있었다. 이렇게 둘러싸여 달리는 것이 무려 3년만이라는 사실. 초반에 아가씨 2인조가 내 앞으로 치고 나가도, 4킬로미터 이후 외국인 남성 2인조가 속도를 올려 나를 떨구고 나가도 그다지 자극받지 않았다. 무섭게 치고 나가던 어린이 한 명이 이내 지쳐서 걷고 있을 때 마라톤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어릴 때 겁모르고 도전해 보는 것이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바꾸어 나가는 게 어릴 때 해야 하는 일이지. 나이먹은 사람이 아이에게 이러니 저러니 떠들어대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해,라고 생각하면서 달리기도 했다.
요즘 운동할 때, 운동도 거의 하지 않지만 킬로미터당 7분이 넘는 페이스가 대회에 나오니 5분 30초대 페이스까지 올라갔다. 같이 달린다는 이유로 에너지가 급충전되는 것인가. 마라톤 대회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어느새 나는 마라톤 대회 참가 초창기로 돌아가 있었다. 2킬로미터를 넘기면서 아가씨 2인조를 제치게 되었고, 5킬로미터에 가까와졌을 때는 외국인 2인조까지 제칠 수 있었다. 외국인 한 명은 동료를 떨구고 맹렬하게 스퍼트를 시작했는데 그 주자까지도 어렵지 않게 제쳤다. 올림픽공원 안으로 꺽으면서 골인 아치가 보였을 때는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급피치를 올렸다. 하지만 여러 명의 주자가 내 앞으로 치고 나갔다. 무슨 일이람? 나와 같은 주황색 배번이 아닌 파란색 배번이었다. 40분 이내로 뛰는 10.8킬로미터 상위권 주자들이었다. 석 달 정도 운동을 하지 않고 있다가 몇 번 훈련하고 나온 대회라 두려웠지만 골인하고 보니 운동량이 부족했다. 골인한 이후 간식과 완주메달 받는 것을 미루고 올림픽 공원 안을 뛰어다녔다. 산책나온 시민들의 눈길이 느껴졌다. 저 사람은 왜 배번을 달고 정해진 주로에서 달리지 않고 공원 내의 산책로를 누비고 다닐까 하는. 하프를 달리는 로운리맨님의 반은 못 되어도 3분의 1 정도는 채우고 달리기를 마무리지었다.
출발 전 인천고마라톤클럽의 춘효형님은 그동안 통 얼굴 보기가 힘들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드디어 풀코스 뛰느냐고 묻는 형님에게 오늘은 오랜만에 배번을 달아 짧은 거리를 뛴다고 했더니, 풀코스 주자가 하프를 뛴다고? 그건 반칙이지, 라고 했다. 아마 10킬로미터도 아닌 5킬로미터 주자라고 했다면 반칙도 그런 반칙이 없다고 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동안 등한시하던, 아니, 아예 내팽개치고 있던 마라톤을 다시 시작하는 내게 오늘의 5.7킬로미터는 의미있는 활동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Not bad. But rather good.' (조유리 노래 'Loveable')
그렇게 만나기 힘들었던, 다시는 못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로운리맨님을 만나 1시간 30분대로 골인하면 기다리고, 그 보다 늦으면 그냥 갈 거라는 너스레도 떨고, 점심 식사를 나누며 마라톤 에피소드를 줄줄이 늘어놓을 수 있어 좋았다. 코로나 유행이 길어지면서 소중한 인연마저 모조리 끊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서로 달리는 종목이 달라진 것은 아쉬움이었다. 하프는 말할 것도 없고, 10킬로미터 종목 참가도 두려워하는 인간이 되었으니......
다음 주와 그 다음 주에 10킬로미터 종목에 출전하기는 한다. 몇 달 동안 몇 백미터 뛰다가 걷고, 몇 킬로미터를 이동하면 걷는 것도 힘들어 차타고 돌아오던 내가 10킬로미터를 어떻게 감당할지는 모르겠으나 참가하기는 한다. 목표는 하나! 5분대 주자가 되는 것. 정확히 5분 59초대 주자가 되는 것. 10킬로미터를 1시간 이내로 골인하는 것. 2003년 11월 30일 난생 처음으로 마라톤 배번을 달고 대회에 참가한 이후 올해처럼 달리기를 소홀히 해 온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5분 50초대 주자가 되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마라톤에서 요행을 바라는 건 금물이니까. 그냥 대회만큼 좋은 훈련이 없다는 것을 되새길 뿐이다.
로운리맨님을 기다렸다. 일주일 전 JTBC 마라톤에서 보여주었던 기량으로 보았을 때 1시간 35분 이내도 가능해 보여서 내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1시간 45분이 넘어 골인했다. 가민 시계를 보여주며 유도 안내 실수로 1.4킬로미터를 더 달리게 되었다고 했다. 로운리맨님이 옷 갈아입으러 간 사이 대회운영본부에서 연대별 시상 사실을 알아보았다. 현장에서 하기로 되어 있던 연대별 시상을 유보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 사이 하프 참가자들이 몰려와 전마협 직원들에게 유도 실수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고 있었다. 로운리맨님을 기다리면서 하프 1위가 1시간 12분대로 골인하는 것을 보았는데 2위가 1시간 31분대로 골인할 때 무슨 일인가 했었다. 주로에 쓰러진 사람이 있어 앰뷸런스가 필요하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을 때 혹시 로운리맨님이 쓰러져 있어 제 시간에 못 들어오는가 하는 걱정도 했었다.
대회 당일 저녁 9시가 다 되어 홈페이지에 장문의 제목이 달린 글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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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코스 및 하프코스 참가자 여러분들께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2022 사이버 영토수호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풀코스와 하프코스 참가분들께 전마협의 유도 안내 실수로 약 1.4km를 더 달리게 되었습니다.
이점 진심으로 깊이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내일 오전 중으로 10.7km, Half, Full 개인별 완주 기록과 연대별 입상자 분들을 파악 후 공지사항에 게재하여 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코스 유도 실수에 대하여 참가자 여러분들께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전국마라톤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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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일 새벽강변마라톤대회에서 45킬로미터나 달린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런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로운리맨님의 억울함이 남일같지 않았다. 예상한 기록이 주최측의 잘못으로 깨어질 때, 전의를 상실하여 페이스를 잃을 때의 기분은 마라톤 주자들이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라는 것. 로운리맨님은 연대별 10위에 입상하여 전마협 참가권을 획득했는데 그것으로나마 위로가 될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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