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22일 104개월 연속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한 후 은퇴 수순을 밟다가 5개월만에 대회장으로 돌아왔다. 개별 출발 방식으로 풀코스를 달리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나 혼자 달리고 나 혼자 급수했다. 십여 명 되는 참가자들을 가끔 만났을 뿐이라 대회에 출전했다는 느낌이 도무지 들지 않았다. 손바닥보다 작은 배번이 웃도리 끝에 매달려 있어 대회 참가자라고 보여지지도 않았다. 그저 단독 훈련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올해 풀코스를 37번이나 달렸다는 관행님은 내 몸무게가 100킬로그램 쯤 되어 보이는데 참 잘 달리더라고 했다.(그 정도는 아니지 않는가) 운섭님도 육중한 몸으로 속도가 남다르다고 했다.(그렇게 뚱뚱해 보이는가, 아니 뚱뚱한가) 3시간 44분 14초라는 기록을 본 마라톤 TV의 접수담당 여사님은 내 기량이 여전하다고 말했다. 3시간 29분대로 골인한 연익님은 5개월만에 뛴다는 사람이 3시간 40분대라면 저력이 있다고 평했다. 돌이켜 보면 사실 이 기록이 쉽게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5개월 동안 전혀 운동을 하지 않고 갑자기 풀코스를 달려서 얻은 기록은 아니었다.
몸을 내팽개치고 있다가 크리스마스 연휴에는 풀코스를 달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10월 말. 60일간의 훈련 계획을 세웠다. 그저 풀코스를 완주하는 데 그쳐서는 안되며 반드시 서브 4로 완주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코로나19가 종식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스크를 쓰고 달려야 하는데 마스크를 쓰고도 서브 4 완주를 하려면 기본적으로 기량이 3시간 30분대는 되어야 했다. 지난 10여년 간 춘천마라톤을 앞두고 했던 특별훈련을 이번에는 춘천마라톤이 정상적으로 열렸다면 끝나는 시점이었던 10월말부터 시작해서 60일간 했다. 예년보다 살이 쪄서 힘들었고, 겨울이 되면서 발뒤꿈치도 갈라지고 손에 동상까지 걸리면서 여간 애를 먹지 않았다. 거의 매일같이 달리고 주중 두 차례는 인터벌 훈련을 이수하고, 주말에는 20킬로미터 이상 달렸다. 쉬고 싶은 마음을 추스려 독하게 밀어붙였다가 지쳐서 걸어들어오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마스크를 쓰고 훈련을 해야 했기 때문에 더 가혹한 나날이었다. 1.5킬로미터 중간 속도 달리기 6회(사이 400미터 회복 조깅), 3킬로미터 중간 속도 달리기 3회(사이 400미터 회복 조깅), 400미터 빠른 속도 달리기 16회(사이 200미터 회복 조깅), 800미터 빠른 속도 달리기 8회(사이 200미터 회복 조깅), 200미터 빠른 속도 달리기(사이 200미터 회복 조깅), 5킬로미터 중간 속도 달리기 2회(사이 400미터 회복 조깅)+1.5킬로미터 빠른 속도 달리기 2회(사이 200미터 회복 조깅) 등을 달리기 프로그램 사이에 끼워 넣으며 달리고 또 달렸다. 훈련하는 동안 추위가 찾아와 머리카락에 고드름이 달리기도 했다. D-day는 크리스마스 당일이었다. 그러나 나가지 못했다. 도저히 나갈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다. 1년 내내 새벽 2시 넘어 가까스로 잠드는 습관이 들었는데 특별한 날이라고 해서 새벽 4시경에 일어나 나갈 수가 없었다. 불가피하게 크리스마스 다음 날로 참가일을 변경했다. 코로나19 확진자는 당일 최대 환자가 나온 상황이었지만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었다.
크리스마스 당일 밤 11시 경 누웠지만 자정이 지나고 새벽 1시가 되고 2시가 넘어갔다. 빨리 잠드는 법을 인터넷으로 검색하기도 하고,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을 듣기도 하면서 잠들기 위해 애썼다. 아무리 열심히 운동하면 무얼 하는가? 대회 당일 컨디션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있는데..... 악착같은 노력으로 1시간 남짓 잤다. 별 요상한 꿈으로 점철된 잠이었지만 그래도 잤다. 다행히 졸리지는 않았다.
새벽 6시 30분 쯤 마라톤 힐링카페에 도착했다. 달리러 나오고 있는 연익님과는 주먹 인사를 나누었다. 은퇴했다가 5개월만에 다시 돌아왔다고 했다. 5개월만인데도 접수담당 여사님은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참가자 명단을 보니 달물영희님은 이미 달리고 있었다.
영하 1도의 날씨. 맨살을 드러낸 반바지를 입었다. 반바지 바깥 주머니에는 파워젤이 아닌 여분의 마스크가 들어갔다. 쓰고 있는 마스크까지 포함해서 총 3개의 마스크를 챙겨서 출발점으로 갔다. 전날도 풀코스를 달린 아이언맨 기민님에게 코스를 물으니 전과 다를 바가 없는데 자신은 4회전을 할 것이라고 했다. 5킬로미터와 7킬로미터 사이에 운용하던 급수대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2킬로미터 남짓 달렸을 때 지나는 무인급수대와 출발점의 급수대를 활용해서 달려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2회전보다는 4회전이 합리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굳이 2회전을 해야 한다면 무인급수대를 꼭 이용해야 무급수의 터울을 10.55킬로미터에서 8킬로미터 남짓으로 줄일 수 있었다. 나는 2회전을 선택했다. 2킬로미터 남짓 달리고 갈증이 나지 않아도 물을 마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오전 7시가 될 무렵이지만 깜깜했다.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고독한 레이스를 시작했다. 42.195킬로미터를 달리는 동안 무슨 일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두 달 동안 훈련했다고는 하지만 27킬로미터 이상 달린 적이 없기 때문에 종반에 들어서면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끝까지 마스크를 쓰면서 달릴 것이라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었다. 도림천은 허옇게 얼어붙어 있었다. 도림천변 주로는 미끄러울 때도 있었지만 크게 신경쓸 정도는 아니었다. 한겨울의 주자로 새벽을 여는데 페이스가 나쁘지 않았다. 목표는 서브 4이기 때문에 킬로미터당 5분 40초를 기대했는데 5분 20초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마스크가 호흡을 제어하는데도 이 정도면 매우 고무적이었다. 초반 5킬로미터가 26분 20초로, 기준 기록에서 2분을 벌었다. 이 페이스가 계속되면 3시간 40분대도 눈에 보였다.
얼마 달리지 않아 주위는 환해졌다. 처음 출발할 때는 쌀쌀하게 느껴졌으나 기온이 오르고 있는데다 땀도 흘릴 만큼 몸이 데워져 추운 줄 몰랐다. 한겨울 이른 시각이라 사람들이 거의 없었지만 마스크를 내리지 않았다. 어느새 몸의 일부처럼 되어 버린 마스크였다. 신대방역 직전 다리를 건너 신도림역 방향으로 달리는 동안 달물영희님, 연익님 등을 보았다. 일주일 전 풀코스 500회 완주를 달성한 달물영희님에게는 축하 말씀을 드렸다. 10킬로미터 남짓 달렸을 무렵 종오님이 운동을 나왔다가 나를 보고 매우 반가워하며 박하사탕 한 개를 주었다. (이 사탕은 먹지 못하게 된다. 돌아가는 동안 껍질을 까다가 박하사탕을 떨어뜨렸다. 민첩하게 팔로 박하사탕을 몸에 붙였으나 다시 잡으려다가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좋은 에너지원을 잃고 만 것이다.) 출발점이자 골인점이며 이제는 반환점까지 된 급수대에서 콜라와 생수를 마시고 돌아섰다. 56분이 지나 있었다. 10.55킬로미터가 56분이라면 서브 4에서 꽤 여유가 생겼다.
13킬로미터 쯤 달렸을 때 희규형님이 매우 빠른 속도로 오고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다리를 건너 반대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한 15킬로미터 지점에서 마라톤TV 사장님이 자전거를 몰고 오다가 세웠다. 추가 급수대를 설치하려고 이동중이라고 했다. 자전거 짐칸에 실린 생수통을 들어 뚜껑을 따고 종이컵에 물을 붓고 다시 뚜껑을 닫아 돌려 드렸다. 사장님은 6.5킬로미터 지점(14.6킬로미터, 27.6킬로미터, 35.7킬로미터 지점이기도 했다)의 다리 부근에 급수대를 설치하러 가는 중이었다. 아직도 27킬로미터 이상 더 달려야 하는데 급수대 스트레스가 줄어들겠다 싶었다. 18킬로미터 쯤 달린 후 화장실에 다녀왔다. 그러고도 시간을 많이 잃지 않았다. 도로는 조금 미끄러웠다. 눈가루가 떨어져 있었는데 어두울 때 발 밑이 미끄러웠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깜깜할 때는 무섭도록 허옇던 도림천은 이제 밝게 빛나는 썰매장이 되어 있었다. 스케이트를 지치는 사람까지 보였다. 단조로운 달리기를 다채로운 기억으로 채워주는 순간이었다. 1회전을 마친 순간의 기록은 1시간 52분을 살짝 넘겼다. 40일 전 하프 단일 종목의 기록보다 2분 이상 빨라졌다. 3시간 45분 이내의 기록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바로 욕심을 버렸다. 30킬로미터에서 35킬로미터에 달하는 장거리주를 한번도 하지 않고 풀코스에 나선 주자의 말로(末路)는 뻔한 것이라 속도에 욕심을 내지 말고 자제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독였다. 마스크를 쓰고 27킬로미터 이상 달려본 적이 없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했다. 후반에 찾아올 피로감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주로에는 운동나온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걷는 사람들 가운데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다만 달리는 사람 가운데에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이 있긴 했다. 사람들이 몰려오면 멀찍이 떨어져 뛰었다. 흠뻑 젖어 무용지물이 된 마스크는 갈아주었다. 그저 달리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과거는 얼마나 소중했던가. 마스크를 쓰고 풀코스를 달리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30킬로미터를 넘어섰을 때는 다른 마라톤을 준비해야했다. 다섯 달 동안 달려본 일이 없는 거리를 달리게 되자 몸이 무리라고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다리에 통증이 생기고 발이 끌리는 느낌도 들었다. 5개월만의 풀코스라고? 2006년 11월 중앙서울마라톤 풀코스를 달리고 이듬해 10월 춘천마라톤 풀코스를 달린 적이 있지 않는가? 그 때와는 다르겠지. 그 때는 사이 사이 짧은 거리의 마라톤 대회라도 참가하고 있었으니.
공원사랑마라톤이 만들어내는 혈혈단신 고독의 레이스는 지독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라니. 그것도 마스크를 쓰고 있어 아는 사람을 만나도 소리 높여 인사를 나눌 수도 없는 상황이라니. 그 많던 주자들은 다들 어디로 가 버렸는가? 언택트마라톤으로 달리든, 코로나19의 위협 속에서 달리기를 접든, 유명을 달리하든..... 많은 마스터즈들이 떠나갔다. 최근 당한 손절에 충격을 받기도 했는데 그 사람도 마라톤을 뛰는 사람이었다. 마라톤은 결국 고독한 운동이니 받아들여야 하는 수순인가?
화장실에 한 번 더 들렀다. 35킬로미터를 지나면 스퍼트를 해야 했지만 엄두를 내지 못했다. 페이스가 크게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처음 계획했던 3시간 59분이 가능했기 때문에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36킬로미터 직전 무인급수대에서 콜라로 에너지를 보충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지난 60일 동안 거의 매일같이 훈련하며 진저리를 치며 이겨내던 일을 기억하면 후반의 피로감과 고단함을 견딜 수 있었다. 인터벌 훈련을 할 때마다 예상했다. 이렇게 훈련하면 풀코스를 달릴 때 이 순간을 떠올리며 힘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달리면서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당일 달렸다면 추위에 시달렸을텐데 오늘은 기온이 올라 달리기가 수월해졌다고. 훈련할 때는 배낭에 갈아입을 옷과 생수, 스마트폰까지 챙기고 있었지만 대회장에서는 몸이 훨씬 가벼워졌다고. 오늘따라 담배냄새를 한번도 맡지 않았다고.
5킬로미터가 남은 지점은 표식이 없어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예상 기록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3시간 19분 25초 경과. 6X5=30. 30분을 더하니 3시간 49분 25초. 6분 페이스로 달려도 3시간 40분대가 가능해졌다. 피곤함에 지치고 근육에 무리가 가는 가운데에서도 페이스가 떨어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땀으로 흠뻑 젖은 마스크가 속도에 브레이크를 걸고 있었지만 꾸준히 몸을 앞으로 밀었다. 마지막 5킬로미터는 3시간 29분대 페이스였다. 마지막 5킬로미터 기록 덕분에 후반 하프도 1시간 52분대가 되었다. 중반 이후 떨어졌던 페이스를 후반에 만회하면서 올해 달린 10번의 풀코스 가운데 두번째로 빠른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3:44:14
마스크를 쓰지 않고 달려도 되는 환경이었다면 3시간 39분대가 가능했을까? 그러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랜만에 풀코스를 달린다는 이유로 어떻게든 속도를 늦추었을 것이다. 풀코스를 달린 이후 이틀간 근육 통증에 시달렸다. 예상한 일이었다. 이제 다시 언제쯤 풀코스를 달리게 될까? 다음 선택도 개별 출발인 공원사랑 마라톤대회가 될 것인가? 나 역시 언택트마라톤이라도 달리게 될 것인가? 수백명이라도 모이는 소규모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코로나19가 완전히 종식되어 수천 수만명이 모이는 메이저 마라톤 대회에서 달리는 꿈같은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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